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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산나 (요한복음 12: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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젓가락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지옥에서는 젓가락으로 상대방의 잘못만 지적.

하늘 나라에는 기다란 젓가락으로 서로를 먹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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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이 납니다.

주일에 입성하시고,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셨으며,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토요일에 무덤 속에 계시다가,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은 성 금요일이라 하여 금식을 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능하신 분들은 모두 금식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으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하셨습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는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시면 안 되고 죽으려고 오셔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별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배웠던 한신 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라는 분은 별세신학으로 유명합니다. 그 분이 큰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프더랍니다.

그러자 의사들이 어 안 죽었네

죽어야지 살리는 수술을 하는구나 하시고는 별세신학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 별세신학의 중심에 갈라디아서 220절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리스도와 함께가 먼저 나와서 못박혀 죽었다는 뜻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사가 먼저입니다. “I have been crucified”

내가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with Christ”

나는 이미 죽었다. 여러분, 앞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벌써 죽었습니다.

오늘 죽는 것이 아니라 어제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죽었습니까?

 

사람은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돈을 영접하면 돈의 종이 됩니다. 권력, 학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 믿는다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 중에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뛰어넘는 모습입니다. 대개의 동물은 원래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거의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려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물이 그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 불이 붙을 고리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 힘은 뛰어든 후에 이루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모는 가혹한 훈련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여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 나에게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자녀됨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좁은 길을 택하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게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받는 넓은 길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련과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라는 좁은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2차 대전 당시 독일 교회는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히틀러를 따르는 국가 교회와 히틀러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

히틀러를 지지하는 국가 교회가 교회의 90%였고, 나머지 10%만이 히틀러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국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고백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교수들은 교회나 신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일본의 천황에게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극히 소수의 교회나 성도들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여기에 속한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이었습니다.

 

좁은 길이란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자살, 나뉘는 것, 싸움.

 

오늘 저희가 주목하여 볼 부분이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 21:3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런데 말씀을 듣고 나귀 새끼의 주인은 어디에 쓰실 것인지, 어떻게 쓰실 것인지, 왜 하필이면 자기의 나귀 새끼여야 하는지 그는 전혀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오늘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딪쳐야 합니다.

나는 돈이 없으니까, 시간, , , 기술, 전도 - 천사도 부러워하는 것.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훌륭한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드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드리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든지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고백되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Comments

목사님 2017.04.09 15:16
젓가락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천당과 지옥이 나뉘어진다고 합니다.
지옥에서는 젓가락으로 상대방의 잘못만 지적.
하늘 나라에는 기다란 젓가락으로 서로를 먹여 줍니다.

 오늘은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마치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종려주일입니다. 그리고 오늘부터 고난주간이 시작됩니다.
 고난주간은 종려주일에 시작하여 그 다음 주일인 부활주일에 끝이 납니다.
 주일에 입성하시고, 목요일에는 최후의 만찬과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시다 가룟 유다의 배반으로 잡히셨으며, 금요일에는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토요일에 무덤 속에 계시다가, 주일에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 이후 유대인들은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키는 반면,
우리 기독교인들은 부활하신 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예수께서 돌아가신 금요일은 성 금요일이라 하여 금식을 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가능하신 분들은 모두 금식함으로써 그 고난에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예수께서는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오늘, 종려주일에 예루살렘 성으로 승리의 입성(Triumphal Entry)을 하셨습니다. 승리의 입성이라고는 하지만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오직 하나, 죽기 위해서였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오시면 안 되고 죽으려고 오셔야 합니다. 죽어야 삽니다.
죽어야 별다른 세상, 즉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처음 목회를 배웠던 한신 교회의 이중표 목사님이라는 분은 ‘별세신학’으로 유명합니다. 그 분이 큰 수술을 받기 위해서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실로 들어갔는데 마취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아프더랍니다.
그러자 의사들이 ‘어 안 죽었네’
죽어야지 살리는 수술을 하는구나 하시고는 ‘별세신학’을 만드셨다고 합니다. 
그 별세신학의 중심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있습니다. 거기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라고 말씀합니다.
우리말 번역에는 ‘그리스도와 함께’가 먼저 나와서 못박혀 죽었다는 뜻이 약해지는 것 같습니다만 영어 성경을 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동사가 먼저입니다. “I have been crucified”
내가 죽었다, 그리스도와 함께 “with Christ”
나는 이미 죽었다. 여러분, 앞으로 죽는 것이 아니고 벌써 죽었습니다.
오늘 죽는 것이 아니라 어제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죽었습니까?

 사람은 누구를 영접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달라집니다.
누구와 함께 어울리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품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돈을 영접하면 돈의 종이 됩니다. 권력, 학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다, 믿는다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서커스 중에 동물들이 불이 붙어있는 둥근 고리 속을 뛰어넘는 모습입니다. 대개의 동물은 원래 불을 싫어합니다.
털이 긴 동물일수록 거의 본능적으로 불을 두려워하고 꺼려합니다. 그렇다면 이 동물이 그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 불이 붙을 고리 속으로 뛰어들게 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그 힘은 뛰어든 후에 이루어지는 보상이나 혹은 뛰어들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내모는 가혹한 훈련이 아니라 바로 동물과 조련사 사이에 있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동물에게는 여태껏 조련사가 훈련시키는 대로 해서 목숨이 위험했거나 손해를 당한 적이 없었다는 믿음, 나에게 위험한 일은 시키지 않는다는 그 믿음이 있기 때문에 본능을 거슬러 가면서까지 불 속으로 뛰어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자녀되는 권세를 주셨다고 합니다.
자녀됨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예수님의 모습은 “좁은 길을 택하신 예수님”이라고 표현할 수 있겠습니다. 그 당시, 예수님에게는 넓은 길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수많은 군중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지만 예수님은 이렇게 칭찬받는 넓은 길을 택하지 아니하시고, 시련과 고통과 죽음의 십자가라는 좁은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13, 14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2차 대전 당시 독일 교회는 양분되어 있었습니다.
히틀러를 따르는 국가 교회와 히틀러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
히틀러를 지지하는 국가 교회가 교회의 90%였고, 나머지 10%만이 히틀러를 반대하는 고백 교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차이는 엄청났습니다.
국가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주일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는데 고백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신앙의 탄압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목사나 교수들은 교회나 신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나라의 1910년부터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일본의 천황에게 신사참배를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이들은 주일에 교회에 나와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극히 소수의 교회나 성도들만이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회는 문을 닫아야 했고, 여기에 속한 신자들은 공식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없었습니다. 좁은 문이요, 협착한 길이었습니다.

좁은 길이란 판단의 기준을 하나님께 두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의 뜻이 어디에 있느냐? 자살, 나뉘는 것, 싸움.

오늘 저희가 주목하여 볼 부분이 요한복음에는 나오지 않지만
마태복음 21:3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귀를 잠시 빌리자고 부탁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당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런데 말씀을 듣고 나귀 새끼의 주인은 어디에 쓰실 것인지, 어떻게 쓰실 것인지, 왜 하필이면 자기의 나귀 새끼여야 하는지 그는 전혀 묻지를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성경에 전혀 언급이 없기 때문에 알 수 없지만 예수님의 그 말씀에 대한 그의 반응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의 것을 기꺼이 드렸습니다.
오늘 ‘주가 쓰시겠다!’는 이 말씀이 우리들의 심령에 부딪쳐야 합니다.
나는 돈이 없으니까, 시간, 손, 발, 기술, 전도 - 천사도 부러워하는 것.
우리의 작고 보잘것없는 것이라도 하나님께 드리면 훌륭한 하나님의 것이 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드리는 사람입니다. 미련한 사람은 드리지 못하고 주저주저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든지 빼앗기는 사람입니다.
누가복음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에게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가 쓰시겠다!”는 말씀 앞에서 선뜻 내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의 모습이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모두 다 주님의 것입니다.
다만 이 땅에서 사는 동안 잠시 빌려 쓰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거꾸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주인인 것처럼 착각하고 사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쓰십시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 가운데서 언제나 고백되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주님은 바로 이와 같은 신앙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이하였습니다. ‘호산나’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분명 자기들에게 메시야가 나타나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아들이며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호산나!’를 외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그들이 왜 예수님을 메시아로 맞아들였는지에 대해서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본문 17-18절입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언한지라.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예수님께서 불과 며칠 전에 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일이 있었습니다.
죽어서 무덤에 묻혀 있던 나사로를 예수님께서 살려내셨습니다.
요한복음 11:45절 이하의 기록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내시자 그 광경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본 사람 가운데 일부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알려 줍니다. 그러자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종교지도자들이 급하게 모여 회의를 합니다. 비상대책회의를 한 것입니다. 그들의 회의는 이렇게 결론을 맺습니다. ‘이대로 민중 봉기가 날 수 있고, 그러면 로마군이 민중봉기를 진압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쳐들어 오게 될 것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오가면서 결국 그 자를 잡아 죽여야 한다.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는 그 때부터 예수님을 죽일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의하고 죽이게 됩니다.

16절을 보면 모든 예언이 성취되고 나서야 예수님께서 메시야였다는 사실을 깨닫고 되고 왜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비단 제자들만이 그런 것이 아닙니다.
당시 수많은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오시자 예수님을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에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왜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열렬히 환영했었나?’ 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대답을 본문 18절에서 해 주고 있습니다.
“이에 무리가 예수를 맞음은 이 표적 행하심을 들었음이러라.”
‘이 표적’이라는 말은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를 외치며 예수님을 맞아들인 것입니다.
그들 가운데는 나사로를 살리신 그 기적을 본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접 보진 못했지만 소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을 행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사로를 살리셨다는 이야기는 당시 예루살렘을 비롯한 온 동네에 가장 큰 뉴스거리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은 놀라운 기적을 행하시는 슈퍼스타였습니다.
미러클 메이커(기적을 만드시는 분)이신 슈퍼스타 예수님을 환영한 것입니다.
여러분, 혹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나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힘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이 아니라, 나사로를 살리신 것과 같은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예수님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행하시는 분이십니다.
나사로를 살리신 것도 분명 사실이고,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예수님께서 행하신 그 기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원하여 주신 것보다 내 병을 치료해 주시고 내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그런 슈퍼스타이신 그런 예수님을 믿고 산다면 우리의 삶에 기적이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믿음을 잃고 맙니다.

하나님을 온전하게 섬겼던 욥은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한 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열 명의 자식들과 그 많던 재산을 한 순간에 다 잃었습니다. 만약 욥이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다면 자신의 재산과 가족들을 지켜주지 못한 하나님은 원망과 불평의 대상이요, 저주의 대상이 되었을 겁니다. 
평생 안고 살아온 질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자신의 병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의 병을 고쳐주지 않습니다. 바울이 능력을 행하시는 하나님만을 믿었다면, 바울이 자신을 위해서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만을 믿었다면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병을 고쳐주시는 미러클 메이커 예수님을 기대하고 그런 예수님이기 때문에 호산나를 외친다면, 우리도 얼마 지나지 않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는 무리가 되고 말 것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기적을 행하시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슈퍼스타가 되시기 위함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셨고, 인류를 구원하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묵묵히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생명을 건져주셨고, 우리에게 영원한 나라를 기업으로 얻게 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사노라면 우리들의 인생 앞에 여러 가지 시련과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저 새벽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주님이 가신 그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걸어가셨던 좁은 길, 어려운 길, 그런데 그 고난의 길 끝에서 새로운 창조가 시작됩니다.
나귀 타고 갔던 예루살렘 길은 골고다 언덕으로 이어지고 그 고통의 끝에서  바로 다음 주일 아침에 예수님은 부활하실 것입니다.
그분과 같이 부활의 아침을 기쁘게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