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얼굴, 창세기 33:1-10, 412장
역대상 4-10장
어린이들 초콜릿 수여
독일 선교사 모임에 갔더니 아직 은퇴 안하셨냐고?
이제 6개월 후면 은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난 목회를 돌아보았습니다. 굽이 굽이 하나님의 은혜,
은혜가 아니면 설명이 안되네요.
목회하면서 제 1 중점은 지각, 11시에 문을 잠갔습니다.
그러면서 예배 시간 준수에 대한 교육을 하였고. 지금도 회복하여야.
주일 성수에 대한 교육, 결단하고 거의 다 예배 참석. 심지어 명절에도.
그리고 마지막이 십일조 교육이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는 우리 노회 내에서는 십일조를 제일 잘하는 교회.
그래서 1,500만원씩 되는 임대료도 하나님의 은혜로 모든 교인들이 다같이 십일조를 함으로써 정말 자랑스럽게 자립.
질문들, 은퇴 후에 무엇을?
새벽 예배 중 택시가 자꾸 떠올라요, 사진.
주변에 목회하시면서도 택시하시는 분, 은퇴하시고 택시 하시는 분,
버스보다는 비교적 시간이 자유롭다고 합니다.
저는 원래 십일조 하려고 일을 했던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십일조 하려고 택시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여러분들이 다 다른 교회로 가시게 될텐데 훈련을 잘 받은
신앙인으로 칭찬들었으면 합니다.
새하늘 교회 예배는 10시 50분에서 1시 반까지
주변에 선한 영향력, 십일조 도전.
인간의 불행은 행복이 무엇인지 확실히 모르면서도 그것을 찾아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행복이 모르면서도 막연히 그것을 추구하면서 온 생을 바칩니다. 여기에 불행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
복이란 무엇입니까? 복이란 행복을 얻는 것이 아니라, 행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 행복이 무엇인지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다만 시간 시간 경험하며 깨달으며 정말로 행복이 무엇인지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일생을 통하여 성공, 실패, 역경의 숱한 곡절을 겪으면서 진정한 행복을 알아 나가는 것입니다.
2025년도 거의 다 지나갔습니다.
이제 잘 준비해서 마무리를 해야 되는 시점에 왔습니다. 오늘은 창세기에 나오는 인물 중 가장 좋아하는, 야곱에 대하여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야곱의 일생은 축복을 받고자, 축복을 쟁취하고자 애쓴 생이었습니다.
그는 쌍둥이 형제의 동생으로 태어나서 형의 축복을 탐낸 사람이요, 끝내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집요한 노력의 사람입니다.
수고도 참 많이 하였지만, 적당히 거짓말도 할 줄 알았고,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간사한 짓도 곧잘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복을 받기 위하여 복 받지 못할 짓도 서슴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복을 추구하는 데에 야곱처럼 철저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피나는 노력을 다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는 복을 추구한 사람의 표본입니다.
그러나 사실을 알고 보면 야곱은 복이 무엇인지를 알아 가며, 복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가는 pilgrim으로, 순례자로서의 생을 산 것입니다.
창세기 47장을 보면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가 묻습니다.
“네 연세가 얼마뇨?” 야곱의 대답이 저의 대답입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험악한 세월,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야곱이 생각했던 복의 개념은 야곱의 삶의 자리에 따라 변합니다.
처음에는 장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형이 받을 축복을 속임수로 가로챘지만 결국은 형의 증오를 사서 집을 떠나 하란으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야곱은 외가집이 있는 하란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돌을 베개삼아 노숙까지 합니다. 광야에서 혼자 밤을 지내는 것은 위험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도무지 살아남을 것 같지 않습니다. 그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복이란 살아 남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외가가 있는 하란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을 만납니다.
그런데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만나 반하고 맙니다.
야곱은 또 다시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복이다. 라고
그리하여 라헬을 아내로 취하고자 라반 밑에서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7년이 짧지는 않지만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9:20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칠 년 동안 라반을 섬겼으나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같이 여겼더라”
얼마나 라헬을 사랑했던지 그녀와 결혼만 하면, 그녀와 함께 살 수만 있다면 더는 바랄 것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과 사는 것이 진정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와의 생활도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지나친 질투심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헬과의 결혼도 진정한 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생각한 복의 개념은 물질이었습니다. 부가 곧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 큰 부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처갓집 식구들에게 그 부로 인하여 시기를 받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는 또 깨닫습니다. 부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형 에서와 원수지고 하란에 와서 20년, 이제는 안정된 것 같은데 마음에는 아직도 기쁨이 없습니다. 마침내 그는 원점으로 돌아가 형과 화목하기 전에는 진정한 행복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야곱은 깨닫습니다. 평화가 복이라는 것을, 화평이 복이라는 것을,
화평이 진정한 복이라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수양대군이 조카 단종을 해치고 왕위를 차지하여 세조가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탐내던 왕권을 잡았는데 그의 마음은 죽을 때까지 편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눈만 감으면 형수(단종의 어머니)가 나타나 자기를 괴롭히는 악몽에 시달렸다고 합니다. 하도 괴로워서 별일을 다 벌여 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밤에는 형수가 자기를 보고 침을 탁 뱉는 꿈을 꿨는데,
그 뒤로 침 맞은 그 자리에 악창이 나서 굉장히 고생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화평을 깨뜨리고는 행복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피해가도 평안을 찾지 못합니다. 야곱의 문제는 형과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형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어느 하늘 아래 가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형과 화평을 이루기 전에는 무슨 수를 써도 해결이 있을 수 없습니다.
좀 더 깊이 생각해 본다면 이는 화목의 문제이기 이전에 죄의 문제입니다. 화목하지 못한 책임이 야곱 자신의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인 죄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문제입니다.
죄의 문제입니다. 죄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언제나 불안합니다.
죄인도 부유할 수 있고 출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하지는 못합니다.
죄에 대한 고민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께로서 문제 해결을 얻는 길 말고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 밖의 어떠한 대체행위도 있을 수 없습니다.
No Substitute. 다른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야곱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얍복 강변에 홀로 남아 밤새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문제 해결의 길을 하나님과의 독대에서 찾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한 일은 먼저 얍복강가에서 밤새 기도한 것입니다.
이제는 오직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과 일대일로 만납니다.
그러면서 야곱은 살아왔던 과거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하란으로 갔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거기서 20여 년을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큰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은혜로 살아왔다면 미래도 은혜로 살 것입니다.
이젠 불안해 할 것이 없습니다. 정말로 하나님을 바로 믿었다면, 정말로 은혜의 하나님을 믿었다면 이제 와서 무엇을 불안해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야곱이 착해서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심으로 착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내가 착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받을 조건이 없지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변덕을 부리지 그 분은 변하지 않습니다.
야곱은 천방지축 휘청거리고 쓰러지지만 하나님께서는 한결같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요지부동이십니다.
변함없이 야곱을 사랑하시고 변함없이 은혜의 길로 인도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자신의 식솔과 가축들을 거느리고 에서 앞에 나아가 절을 할 때 에서가 “너와 함께한 이들은 누구냐?”고 묻습니다.
“하나님이 주의 종에게 은혜로 주신 자식이니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야곱은 에서 앞에 엎드려 일곱 번 절을 합니다. 여기에는 잘했고, 못했고 하는 어떤 변명도 없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화평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일곱 번 절한 이 사건 자체가 기도의 응답이요, 기도 가운데서 얻은 신앙적 용기입니다. 이로써 모나고 강팍하던 에서의 마음도 녹습니다.
서로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감격의 눈물을 흘립니다.
형 에서의 얼굴을 마주하고 감격한 야곱은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고백합니다.
20년 동안 막혔던 담이 무너져 형제간의 화평을 찾는 순간, 형 에서의 얼굴에서 하나님을 뵙는 것 같은 엄청난 감격을 맛보게 됩니다.
신앙의 기적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은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고 합니다.
왜 얻고도 기쁨이 없고, 왜 성취하고도 행복이 없고, 왜 쟁취하고도 불안에 떨어야 합니까? 화평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5: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Blessed are the peacemakers, for they will be called sons of God)
다 같이 기도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