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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사단으로(마태복음 16:15-24)

   

 

     베드로가 사단으로, 마태복음 16:15-24, 518장

 

사무엘하 5-11장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어려운 문제는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이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말입니다.

‘나’라는 존재는 전혀 믿을 것이 못되는데 이것을 믿으려 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정선 강원랜드 카지노에는 영구적으로 출입을 금지해달라고 스스로 신청한 ‘영구출입제한 신청자’가 만2천여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렇게 자기 자신을 못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이 못 믿을 자기 자신에 근거해서 다른 것을 판단하려고 했던 대표적인 인물인 베드로가 등장을 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 중에서도 수제자입니다마는 주책이 없다 할 정도로 실수도 많이 한 사람입니다. 저는 베드로를 생각할 때마다 나하고 어쩌면 그렇게 똑 같은지 탄복을 합니다.

오늘 본문 앞에도 보면 예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질문을 하자 베드로가 그 위대한 신앙고백을 합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저는 찬송가 365장 “마음 속에 근심있는 사람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슬픈 마음 있을 때에라도 주 예수께 아뢰라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

복음성가로는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그리고 말씀으로 거듭 난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3일 낮밤을 성령의 감동으로 울면서 지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말씀이 저에게는 더 큰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를 크게 칭찬하시면서 ‘베드로’라고 하는 귀중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헬라어로 ‘페트로스’인데 반석, 돌이라는 뜻입니다. 

그뿐 아니라 ‘천국열쇠’를 베드로에게 줍니다.

유럽을 여행하다 보면 여러 가지 석상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베드로의 석상은 어떻게 알 수 있느냐 하면 손에 열쇠를 쥐고 있는 분이 바로 베드로입니다. 반면에 손에 큰 칼을 가지고 있는 분은 사도 바울입니다. 

말씀의 검을 가졌다고 해서 이렇게 나타냅니다. 

자 예수님께서 그와 같이 엄청난 칭찬을 하고 나니 베드로는 사뭇 우쭐해 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엄청난 실수를 하게 되고, 주님한테서 큰 책망을 받게 됩니다. 예수께서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하십니다. 

조금 전까지 ‘베드로, 반석’이라 하셨는데 지금은 ‘사탄’이라 하십니다.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역사는 돌아보지 않고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고, 

내 명예만 위하는 그런 마음에 사단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생각에는, 풍랑을 잠재우시고, 죽은 자도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신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충성을 과시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 같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베드로는 자기 나름대로 가진 메시야관에 근거해서 판단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 나름대로 보는 성경, 자기 나름대로 이해한 메시야의 나라만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도대체 베드로가 왜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자신의 욕망과 욕구에만 얽매어 있는 동안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중한 진리를 알아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마음 문이 열려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 십자가를 져야 하겠고 삼일만에 부활하리라”

얼마나 소중한 말씀인데, 이 말씀을 한 마디도 알아듣지 못한 것입니다. 

언제나 욕망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덮어 놓고 자기 말만 합니다.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모릅니다. 하나님의 귀한 말씀을 그대로 받아 들일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앉아서도 딴 생각만 합니다. 

베드로도 그 때문에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책망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원문의 뜻을 보면 예수를 앞질러 가면서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마저 제멋대로 해석할 생각 말고 뒤로 물러가 주님을 따르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 사단이 있느냐?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마는 하나님께서 왜 사단을 만드셨는지, 어째서 사단이 있도록 허락하시는지, 여기서는 구구한 설명은 생략하기로 하고 사단이 있다는 그 사실에서부터 출발을 합시다. 

사단이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사단의 시험에 들기 때문이지 사단의 시험에 빠지지만 않는다면 사단이 제 아무리 많은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내가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야 사단의 시험이 무슨 문제가 되겠습니까?

사단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고 어디에나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광야 40일 동안에 그토록 엄청난 시험을 겪지 않으셨습니까? 하물며 우리들 사람에게야 얼마나 많겠습니까?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 가지 방법으로 사람을 시험한다”고 합니다. 

첫째는 ‘누구든지 죄를 지으니까 너도 죄지어라, 너만 죄인이냐, 다 죄인인데’하는 유혹입니다. 

그 두 번째는 ‘이 정도의 것이야 뭐 어떠냐, 별 것 아니다’하고 약간의 죄는 괜찮다고 유혹을 합니다. 

셋째는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입니다. 이번만 죄를 짓고는 다시는 죄를 짓지 않을 것이니 마지막으로 한 번만 하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무섭고 간교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실을 깨닫고 베드로전서 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에덴 동산에서부터 겟세마네, 골고다까지, 그리고 저 성자라 불리는 사람들로부터 속세에 사는 모든 사람에 이르기까지, 사단의 유혹은 참으로 집요하게 따라 붙습니다. 

그리고 사단이 유혹을 하는데는 성역이 없습니다.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그 시간에도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단의 역사는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사랑하는 자를 통하여 역사합니다. 가룟 유다가 아니고 이 순간 왜 베드로에게 나타났습니까?

사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관계라는 것이 함정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관계,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는 일이라면 시험될 리가 없습니다. 

내가 지극히 좋아하는 것, 내가 지극히 사랑하는 바로 그것에 시험의 여지가 있고 함정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고사성어에 ‘호사다마’라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일에는 흔히 마가 끼기 쉽다는 말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따라 바로 살아보고자 뜨겁게 믿으려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유혹이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거룩한 역사에 참여하여 큰 일을 해 보고자 마음먹고 출발을 할 때, 거기에 사단의 시험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훼방하는 것, 이것이 사단의 유혹입니다.

 

기독교인들이 시험을 당함에 있어서 하는 몇 가지 오해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지금 내가 당하는 시험을 우연하게 일어나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 애매하게 억울하게 그저 말려들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생각을 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시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있을지언정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들에게는 결코 우연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안에서는 필연일 뿐입니다. 그 사건, 그 시험,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의 확실한 경륜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겪고 있는 작고 큰 사건 하나하나에 하나님의 뜻이 있고 계획이 있습니다. 문제는 내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느냐, 들을 수 있는 귀가 있느냐, 받아들일 줄 아는 지혜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하기 위해서 꾸준히 말씀하십니다. 

각자 각자 개별적인 사건을 통해서 개인적으로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를 예외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당하는 시험은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나만이 당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나만이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에게나 시험이 있고 그 질량은 똑 같습니다. “요 사정은 아무도 모릅니다”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세상 사람들이 다 겪는 것을 나도 겪을 뿐입니다. 

보편적인 것입니다. 그 속에 내가 하나 끼여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유별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왜 나만 겪는 고난이냐고.

 

여러분, 시험이란 언제나 있습니다마는 시험은 필요해서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필요하고 아니하고는 하나님께서 아십니다. 

그 분량과 정도와 때도 하나님께서 정하십니다. 

이 사람에게는 이런 시험이 있어야 하겠다, 이 사람은 이렇게 다루어야 되겠다, 지금 내가 당하는 시험은 특별히 나에게 꼭 필요하다고 믿는 데서부터 신앙을 고백하고 출발해야 합니다.

그래서 시험은 당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는 것입니다. 

손해보는 것이 아니고 유익한 것입니다. 

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하게 하는 것입니다. 

슬펴할 것이 아니라 기뻐할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야고보는 야고보서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모든 시험, 모든 시련이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가치 판단을 새롭게 하고, 새로운 의미를 깨닫게 해 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과 불필요한 것을 구별해 주는 것입니다. 

성 어거스틴의 유명한 비사도 있습니다. 

‘포도를 따서 포도주 틀에다 넣고 포도즙을 내기 위해서 짓이겨 짜면 한쪽으로는 깨끗한 포도물이 나오고 한 쪽에는 찌꺼기가 남는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도 그러하다. 이 시련, 이 고난들이 나를 짓이겨서 고통을 주지만 그럼으로써 필요한 것과 필요치 않은 것, 유익한 것과 무익한 것, 거짓된 것과 참 된 것을 갈라 놓는 것이다’ 

내 마음에 있는 쓸데없는 욕심, 버려야 할 허영심, 교만, 거짓. 이와 같은 찌꺼기를 모조리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시험은 그러기 위해서 있는 것입니다. 

어떤 때에는 버려 마땅한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는 하나님께서 찍어 버리십니다. 여기에 아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아픔이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이 시험을 통해서 나 자신을 알게 하시고, 이웃을 알게 하시고, 온전히 하나님을 알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사단의 모든 시험을 다 이기고 우리들 각자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기쁜 마음으로 감당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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