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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피난처(시편 46:1-11)

   

 

    시편 46:1-11, 우리의 피난처, 384장

 

사무엘상 15-21장

 

만약에 우리 교회 앞에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쳤는데 목격자가 여럿일 경우와 한 사람일 경우 어느 경우가 신고할 확률이 높겠습니까?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이 많으면 신고하는 경우가 많을 것 같지만 신고하는 확률이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아니어도 다른 사람이 하겠지?” “누군가 하겠지!”라고 서로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합니다. 

누구라도 방관자가 되어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며칠 전에 홍범도 장군에 관한 독립군, 그 끝나지 않은 전쟁, 이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독립군은 일본한테 이기려고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 통치에 방관자로 남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서 처절하게 싸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안중근도 마찬가지. 이또오 히로부미 하나 죽인다고 일본의 강제 병합이 멈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방관자가 되어서 역사 앞에 부끄럽게 남아서는 안된다고.

12.3 계엄이 발표되고 국회로 모여든 시민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어느 여성 분이 군인의 총부리를 쥐고는 물러가라고 외치는 장면.

계엄군들이 시민들의 저항에 놀라서 뒤로 물러서서 시민들이 국회를 지켜냈기 때문에 계엄 해제를 국회에서 의결할 수 있었습니다.

시민들이 방관하였으면 어찌 계엄을 막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유다왕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의 산헤립이 군사를 이끌고 유다에 쳐들어 와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항복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때에 히스기야는 전쟁을 준비한 것이 아니라 먼저 전국의 제사장들에게 하나님께 함께 기도하도록 부탁하였습니다. 혼자 기도하지 않았음.

그러자 하나님은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앗수르 군대 18만 5천명을 물리쳐 주셨습니다. 

이에 히스기야가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에 감사하며, 레위 자손 고라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한 것이 오늘 시편 46편의 배경입니다. 

이 시에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우리의 힘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신다고 

고백합니다. 

 

또 시편 46편은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가장 애송하고 사랑했던 시라고 합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면서 이 시편 46편에서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는 마르틴 루터에게 보름스에서 열리는 종교회의에 참석하라는 소환장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보름스 종교 회의에서 루터는 황제와 로마 교황청의 대표들로부터 종교개혁을 포기할 것을 강요받았습니다. 이 때 루터는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나는 내가 주장한 어떠한 것도 철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담대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시편 46편에서 큰 힘을 얻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루터는 이 시에서 힘을 얻어서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를 작사, 작곡했습니다. 

 

585장 1절 

 

오늘 시편 말씀을 보면 원치 않는 시련과 고통이 때때로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을 봅니다. 

오늘 시인은 그들이 당하는 어려움을 4중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2-3절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산이 요동하는 삶의 자리에 그들은 지금 서 있습니다. 

삶의 터전의 불안전성, 그것이 그들의 삶의 현주소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안전한 곳은 어디입니까?  

오늘 본문 말씀은 세 번이나 반복해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1절 첫머리에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라고 합니다. 

7절 끝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말합니다. 

11절에서도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라는 말로 마치고 있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시는 여러분들도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아 세상의 염려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계의 대도시들은 강을 중심으로 발달하였습니다. 

런던의 템즈, 파리의 세느, 뉴욕의 허드슨. 서울은 한강.

하지만 예루살렘은 강이나 시내가 없고 밖에서부터 물을 끌어들여 사용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인 예루살렘에 강이나 시내가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백성은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도움이 됨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생명의 물이 예루살렘을 풍요롭게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 생명의 물이 우리로 하여금 시련을 이기고 승리하게 합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의 물, 위로의 물, 은혜의 물을 마십시다. 그 물이 우리를 환난에서 건져줄 것입니다. 

 

출애굽 때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뒤에는 애굽의 군대가 추격해 오고 앞에는 홍해가 가로막고 있는데 

출애굽기 14:13, 14 “너희는 두려워 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십니다. 

시련을 당할 때 울고만 있지 말고, 신세타령하며 세월을 보내지 말고,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우리를 위하여 싸우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나와 탄식하며 기도하십시오. 특히 새벽에 교회에 나와 기도하십시오. 

5절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어찌 새벽만 도우시겠습니까? 

언제든지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 언제든지 도와 도와주십니다. 

그런데 왜 새삼스럽게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라”는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유가 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다. 새벽은 매일 있고, 이 땅에 존재하는 한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새벽을 누구나 소유하는 것은 아닙니다. 새벽은 오직 깨우는 자에게만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57:8에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합니다. 새벽이 나를 깨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새벽을 깨웁니다. 

매일 새벽이 있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그 새벽은 본인과 아무관계 없이 그냥 흘려보내고 맙니다.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맛보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낸다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결론을 짓습니다. 

10절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찌어다.”

이것이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주신 명령이었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대한 처방입니다.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하시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으라고 말씀하셨는데 우리의 생각으로는 말도 안되는 것 같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답답하게 여겨졌던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대로 하다가 지쳐 쓰러지지만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들은 가만히 서있다가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믿음이 무엇입니까? 맡기는 것입니다. 

살다가 어떤 큰 문제가 있으면 어른들은 염려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부모를 100퍼센트 믿고 맡기기 때문에 쿨쿨 잠을 잘 잡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 염려를 주께 맡기라”고 합니다. 

맡기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면 맡기게 됩니다. 

그래서 은혜 중에 은혜가 ‘잘 맡기는 은혜’입니다. 

제가 가끔 목욕탕에 가면 언제 보아도 은혜가 되는 문구가 있습니다. 

‘귀중품은 주인에게 맡기십시오. 맡기지 않은 귀중품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들이 하나님께 맡기지 않은 것은 책임지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에게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왜 교회에 나오십니까? 

왜 신앙생활 하십니까?

신앙생활은 우리가 행복해지기 위해서 합니다.

행복해지지 않는 신앙생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행복해지려면 하나님을 잘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행복해집니다’

호세아 6:6 “나는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신앙생활이란 내 생각, 내 주장, 내 원함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각과 내 주장을 맞추어 나가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나를 맡기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이해되지 않는 문제가 있을 때에도, 원치 않는 환란 가운데서라도 전적으로 신뢰하며 나아가는 것입니다. 해가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한밤중에도 

새벽이 올 것을 기대하며 서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리심과 통치하심을 확신하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라면 이제 우리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 즉 신뢰입니다. 

불평하고 원망할 수 있는 상황에서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두 손을 높이 들고 찬양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묻고 계십니다. 

어려움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나를 신뢰할 수 있느냐?

 

광야 교회는 구원받은 감격 속에서 영적 순례의 길을 떠나는데, 그 길을 하나님이 친히 인도해 가시는 행복한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이 그들 앞서 행하고 계셨으며 나아갈 길을 보여 주고 계셨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그들을 인도하시며 지키고 계십니다. 

출 13:21-22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아무리 힘들어도, 아무리 문제가 어려워도 날마다 하나님을 향해 고개를 들라는 말씀입니다. 날마다 고개를 들어 그분이 인도하시는 방향을 바라보면서 빠져 나오기 힘든 웅덩이에 빠졌다 할지라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

고 계시는 주님을 믿고, 그분을 신뢰하면서 살라는 말씀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가 되시며 힘이 되시며 도움이 되실 것이라고 오늘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진정으로 회복되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가 비록 홍해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답답함 

가운데 있다 할지라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믿는 우리들이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참 모습입니다. 

오늘의 환경에 지배당하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으며, 살아계신 하나님, 도우시는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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