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이기는 믿음, 요한일서 5:1-4, 357장
사무엘상 8-14장
한 할머니가 택시를 탔습니다. 한참 가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소리쳤습니다. “기사양반, 내가 어디로 가자고 했지?”
이때 기사 아저씨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며 말했습니다.
"아이구, 깜짝이야! 할머니, 언제 타셨어요?“
건망증입니까? 치매입니까?
배우자 생일을 잊어버리면 건망증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배우자 얼굴을 잊어버리면 치매라고 합니다.
가장 겁나는 병, 저희 또래인 1955년 생 브루스 윌리스가 전부인 데미 무어를 못 알아본다고 해요.
세상에서는 고스톱 치는 것이 치매 예방에 좋다고.
믿는 우리들은 성경 읽기, 암송, 찬송가
오늘 본문 말씀 3절을 보면 계명을 지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라 하였습니다.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하나님의 계명이 무거운 짐입니까?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거짓증거하지 말라, 우상 숭배하지 말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 자, 이게 무거운 짐입니까?
이게 그렇게 힘든 일입니까? 이것들이 얼마나 우리를 자유케 합니까?
차를 운전하다 보면 신호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신호등이 우리를 지켜주는 것입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은 무거운 짐이 아니로다, 무거울 수 없습니다. 왜요? 이것이 내 생명을 지켜주니까.
바로 그러한 이해가 하나님의 사람의 온전한 자유의식인 것입니다.
국립 공원에 가면 이렇게 써 있습니다.
“야생 동물에게 먹을 것을 주지 마시오”
무심히 이런 걸 주어 이런 것을 받아 먹는 버릇이 생기면 사냥하는 힘도 없어지고 나아가서는 입맛도 돌아서고 맙니다. 이래서 겨울이 되면 속절없이 굶어 죽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율법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에게 이 율법을 주신 분은 하나님이신데 이 분은 우리를 무지무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되 이것을 가볍게 지킵니다. 아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킵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율법을 지킨다 할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율법을 범할 때 율법이 나를 심판하지만 율법을 지킬 때 우리가 진정한 자유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온전한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계속 초점을 맞추는 것이 율법주의입니다.
왜 은혜로 시작했다가 율법으로 마치느냐?
사랑의 반대말은 미움이 아니랍니다. 예전에는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라고 하였는데 요즈음은 변했답니다.
사랑의 반대말은 “사랑했었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신혼의 홈 스위트 홈이 감옥으로 바뀐 것입니다.
저녁마다 집에 갈 때면 감옥으로 들어가는 기분.
은혜가 율법으로 바뀐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주 사랑스럽게 들려오고 그 사랑을 확실하게 믿을 때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 캘빈의 명언이 있습니다. “인간에게 두 가지 지식이 있는데
하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지식이고 하나는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 자신에 대한 지식은 없다”
하나님을 알고 그 사랑을 알 때 내가 누구인지를 비로소 압니다.
그 넓고 큰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고 나서 확실히 믿는 것 중 하나는 이 우주의 중심은 나라는 사실입니다. 내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확신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께 코드만 맞추면, 회개를 제대로 하면 이 세상 아니 이 우주를 움직여서라도 다 해 주십니다.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Know thyself, 너 자신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이 어떻고 우주가 어떻고 본질이 어떻고 아르케가 어떻고 그만하고 네 자신을 알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고독과 불안이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모름지기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데 담대해야 합니다.
저는 로마서를 참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특별히 7장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이 7장에 가장 위대한 사도 바울의 자기고백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기 때문입니다. 7장 전체를 깊이 명상하면서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경탄합니다. ‘어쩜 이렇게도 정직할 수 있을까?’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고린도에서 로마로 보내는 편지입니다. 써 보내는데 적나라하게 자기 모습을 노출시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25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고 고백을 합니다. 그는 누구입니까?
대사도요, 온 세계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요, 예수 이름으로 감옥에 들어가 매를 수없이 맞은 사람이요, 성자 같은 사람입니다. 아니 성자입니다. 이런 사람이 죄의 법을 섬긴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위대한 고백입니다. 어찌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사람이 이만큼 정직하기는 힘듭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헬라어로 제 사물함 안에 써 놓은 말씀입니다.
“탈라이포로스 에고 안드로포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자기 자신을 완전히 부정할 때 바울은 이제 로마서 7장 끝과 8장으로 가면서 마침내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하게 됩니다. 그리고 은혜 충만한 8장 그 은혜의 복음이 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완전히 자기 부정을 할 때 은혜의 복음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불행과 근심과 스트레스는 자기 자신의 내부에서 태어난다’고 합니다. 자기 문제를 남의 문제로, 내 책임을 사회문제로 돌리려고 하는 순간 스트레스가 다가옵니다.
일단 내 책임입니다. ‘이건 내 잘못이야’ 인정을 해야 합니다. 남이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 자신을 바르게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단순한 마음, 이것만이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느 만큼 평가하고 있습니까?
나를 완전히 부정하고야 하나님의 은혜를 긍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나를 인정할 때 은혜로 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려고 하면 사단 마귀에게 넘어가고 마는 법입니다.
사탄 마귀가 마르틴 루터를 공격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형편 없는 놈이 무슨 종교개혁을 한다고 하느냐, 네가 뭘한다고, 네가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그러면서 마귀는 율법을 가지고 루터를 공격합니다. 루터는 괴로웠습니다. 그때마다 루터는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십자가를 보라. 주께서 나를 위해 죽으셨다. 내 죄를 다 담당하셨다. 저 십자가 안에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확실하게 계시되어 있다”
그럴 때 마귀는 조용히 꼬리를 사리고 도망갔다고 합니다.
오직 이기는 것은 이것입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이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믿고, 그 사랑을 믿을 때, 그럴 때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나를 이기고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서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소중히 여기십니다.
십자가의 거룩한 희생을 통하여 오늘도 사랑을 계시하고 계십니다.
오직 믿음이 이 세상을 이기고 나 자신을 이기는 것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사노라면 보이지 않던 새로운 세상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새하늘과 새땅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이고 예배입니다.
그 새하늘 새땅에 믿음으로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