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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집(요한복음 5:1-9)

  

 

     은혜의 집, 요한복음 5:1-9, 365장.

 

여호수아 22-24장, 사사기 1-4장

 

인도네시아 설나라 사모님의 선교 보고.

 

홍수가 나면 물은 넘쳐 나는데 제일 필요한 것이 마시는 물, 식수입니다.  홍수 속에서 마실 물을 찾기가 쉽지 않듯이, 사람은 많지만 좋은 사람을 

찾기는 참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취직하고자 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대기업에 들어가는 것이 바늘구멍인데, 

회사 입장에서는 좋은 인재 찾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날 하나님도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역대하 16장 9절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서 높이 들어  쓰시고 싶어도 쓰임 받는 그릇이 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도 구인난을 겪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아니고 경험입니다. 훈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참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성경의 달란트 비유를 보면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머뭇거리지 않고 곧 바로 가서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적극적인 삶의 태도입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두려워서 가서 땅속에 묻어두었습니다. 

누가 이런 사람에게 일을 맡기겠습니까? 그래서 주인은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였습니다. 

결국 소극적, 수동적인 사람은 있는 것도 뺏깁니다. 

모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유대인의 명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의 명절이 고향 중심이라면 이스라엘의 명절은 성전 중심이었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환자를 만나러 베데스다로 가십니다. 

여러분, 이 시대 교회의 마음은 어디에 있어야 할까요? 

고독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곳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병을 고칠 수 없는 무기력한 모습들입니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스스로 나를 구원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들입니다. 뭐 좀 가졌다고, 좋은 옷 입었다고 으스대고 폼 잡을지 모르지만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감기만 걸려도 꼼짝 못해서 누워있는 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무기력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 시간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이 시간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오늘 이 시간 우리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출입할 수 있는 성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Sheep Gate)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성전에 

속죄 제물로 드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그 부근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에 행각(정자 비슷한 것) 다섯이 있었습니다. 그 행각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혈기 마른 사람은 피가 말라버려서 수족이 오그라든 환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특별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3절 후반부터 보십시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성경의 괄호 부분은 성경 원어에는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괄호 안의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본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까봐 후대 교부들이 삽입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고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난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정작 난치병 환자들은 들어갈 능력이 없습니다.

맹인이 어떻게 물이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다리 저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물로 뛰어들 수가 있겠습니까? 

아마 이들이 물에 뛰어들 때면 사람들은 이미 수건으로 몸을 닦고 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일 겁니다. 한마디로 절망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란 뜻인데,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모순은 은혜는 아무 대가나 노력 없이 받는 것인데 은혜의 집에 와서도 물이 동할 때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지요. 

생각해 보세요. 물이 동할 때 재빨리 몸을 날려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물에 들어갈 필요가 없는 건강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난치병 환자들입니다.  

이게 베데스다의 모순이요 인생의 딜렘마입니다. 

이 문제의 현장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동하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내가 들어간다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은혜의 집에 어울리지 않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자녀되었음에도 삶의 능력을 잃어버린 자들의 모습이 나의 모습,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기 한사람은 이천년 전 그 환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응시하셨단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내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문제를 살피십니다. 당신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시길 바랍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우리 주님과 눈만 마주치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289장 1, 3, 5절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야 변화합니다. 

술 마시는 사람보고 마시지 말라고 하면 더 생각나서 더 많이 마십니다. 

담배 피우는 사람들에게 끊으라고 아무리 말해도 끊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변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만나고 변화된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욥도 고통이 너무 심하니까 자기 태어난 것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원망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자 이렇게 말합니다. 욥기 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사야 6장에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을 뵙고 나서 변화되었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말씀하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하합니다. 순종하고 헌신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도 예수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아 죽이고 

핍박하며 살았습니다. 하지만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위대한 사도가 됩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만나는 사람들은 변화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가까이 걸어 오셔서 묻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 진정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이 있느냐, 

참으로 너를 속박하고 있는 죄악 속에서 헤어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질문입니다.  

38년 된 환자에게 네가 낫고자 하느냐 하는 이 물음은 그를 일깨우는 소중한 물음이었습니다. 심령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도전이었습니다.

진정 여러분은 주님을 만나고자 하는 열망의 불길이 타오르고 있습니까? 

주님을 만나야만 내 인생의 모든 어려운 것들이 해결된다고 믿으십니까? 

베데스다의 물이 아니라 심령의 물이 동하는 곳에 기적이 일어납니다. 

역사가 일어납니다. 

크리스챤에게 있어서 절망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묻고 계십니다. 

“네가 낫기를 원하느냐?”

“너의 실패 속에서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느냐”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물음에 이 환자는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 이 말을 영어로 보면 “I have no one to help me”입니다. 

나를 도와줄 그 어떤 사람, 단 한 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한 줄기 희망마저 살아졌을 때 단 한 사람의 소망마저 사라졌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누구하나도 붙들 수 없는 세상 어느 곳에서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부딪힐 때가 있습니다.  

그때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주님이 당신을 찾아 갈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의 못남을 비웃고 우리의 죄를 조롱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우리를 품어주십니다. 우리 주님께 우리의 사정을 있는 그대로 아뢰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이제 주님이 찾아오셔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니, 38년 동안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미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났으므로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그가 믿음으로 몸을 움직여 봅니다. 그 순간 몸에 이상한 변화가 감지됩니다. 힘이 생깁니다. 그래서 일어났고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니까 육신의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 무엇인가 또 한 가지 깨닫게 됩니다. 

믿음은 자기를 부정하고(No) 하나님을 긍정하는(Yes) 겁니다. 

자기 자신의 조건을 보고 형편을 보면 부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바라보면 긍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행하시기 전에 먼저 긍정하기를 요구하십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에스겔 선지자를 골짜기로 이끌어 가는데, 거기에는 해골과 뼈다귀가 수북합니다. 그걸 가리키면서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질문합니다. 

겔 37:3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여러분이라면 그런 질문을 받고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하나님 체면 생각하면 긍정해야 되는데, 솔직히 내 이성대로 하면 부정해야 됩니다. 

에스겔은 절묘하게 대답합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기로서는 부정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이기에 긍정한다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그에게 말씀을 주시고 대언을 시킵니다. 해골과 뼈를 향하여 외칠 때 뼈가 서로 연결되고 힘줄이 붙습니다. 그리고 생기가 들어갑니다. 마침내 살아있는 큰 군대가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긍정할 때 나타나는 놀라운 역사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물에 들어가려고 하는 것도 결국은 걷기 위함이 아니었습니까?

예수께서는 그를 물에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리를 아주 낫게 해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배드리는 이 시간 우리의 마음을 정리합시다. 

이제는 힘을 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38년 된 병과 같은 영적인 무기력,  상처로 남은 패배감,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좌절감을 다 씻어내야 합니다.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지금 마음에 결단하셔서 어떤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절망 속에서 일어서시는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에 당당하게 들어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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