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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버지의 마음( 누가복음 15:17-24 )

   

 

       누가복음 15:17-24, 그 아버지의 마음, 273장.

 

민수기 15-21장

 

5월은 가정의 달이고, 5월 8일은 어버이날이었습니다. 

세상의 불행의 시작은 가정 파괴에서부터 일어납니다. 

그래서 마귀는 가정을 파괴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효의 종교입니다. 십계명 5번 째 계명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한자로 “효(孝)”는 부모가 연로하여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기운이 없을 때 자식이 그 숟가락을 대신 들어 드린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어버이날의 유래는 미국에서는 1913년 이래 매년 5월 둘째 일요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고, 점차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5월 8일을 어머니 날로 정하였으며, “그럼 아버지는 뭐냐”는 여론에 따라 1973년부터는 “어버이 날”로 바꾸었습니다.

참고로 미국에서는 어머니날과 아버지날을 구별하여 지키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사람은 아버지의 이미지에따라 그의 신관이 결정된다’고 하였습니다. 일리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아버지를 모시고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의 인생관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하나님께 대한 인식도 달라집니다. 

비근한 예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의 신학을 들 수 있습니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은 아주 무서운 하나님으로 표현됩니다. 창세기의 홍수사건을 설명한 것만 보아도 하나님을 너무나도 무서운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렇듯 하나님의 진노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자랄 때에 그의 아버지로가 엄격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버지의 이미지(father image)’란 그 사람의 인생관에 이렇듯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언젠가 좌담을 하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지 말고,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말한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라고 하면 언제나 무서운 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특히 신약에서, 우리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은 진노의 하나님이 아니요, 율법적인 하나님이 아니요, 오직 아버지, 아바 아바 지이십니다. 

주기도문에도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입니다. 이 ‘아버지’ 개념은 참으로 중요한 개념입니다. 

왕의 자식은 왕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너무나 잘 아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말씀은 복음 중의 복음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돌아온 탕자가 될 수도 있고, 집에 남아 있던 큰아들을 부각시켜 그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고, 탕자를 반갑게 맞이하는 아버지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은 탕지비유의 주인공을 아버지로 하여 설교를 하고자 합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타나는 아버지는 어떤 아버지입니까? 

한마디로 허용하는 아버지입니다. 어찌 생각하면 참으로 한심한 아버지일수도 있습니다. 멀쩡히 살아 있는 부모에게 유산을 요구하는 고약한 아들을 둔 것도 한심하거니와 그런 아들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는 이런 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네 상식으로는 분명히 어리숙한 아버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아버지의 그런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입니다. 

사랑에는 낭비성이 있습니다. 똑똑한 사람은 사랑을 할 줄 모릅니다. 사랑은 계산으로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바보가 되는 것입니다. 바보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2:15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하므로 재물을 사용하고 또 내 자신까지도 내어 주리니”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것이 사랑인 것입니다. 이렇듯 사랑에는 희생이 있습니다. 

사랑은 마음과 재산과 명예를 내어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탕자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고, 그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오는 그 아들을 기뻐하며 맞이하는 어찌 보면 바보스러운 아버지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24절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아버지는 그 아들이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 감사하고 만족합니다. 

재산 따위야 다 버려도 좋으니 부디 돌아와 다오. 이것이 그 아버지의 진실입니다. 남들이 비웃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끝없는 사랑으로 끈기있게 기다립니다. 출세해서 돌아올 아들을 기다린 것이 아닙니다. 탕자를 기다린 것입니다. 탕자가 어떠한 모습으로 돌아올 것인지 번연히 알면서 기다린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은 부모님의 사랑을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어느 불량 청년이 여러 차례 범죄를 하여 감옥을 들락거렸습니다. 그러다 크게 범죄를 저질러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습니다. 선고를 받고 포승줄이 채워져 법정을 나서는 아들을 보고 그 어머니가 재판정에 주저앉아 엉엉 웁니다. 

딱하게 여긴 판사가 그 어머니를 위로한답시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몹쓸 자식, 이젠 포기하세요. 잊어버리세요.” 순간 그 어머니는 눈물을 씻고 정색을 하면서 당당하게 대답합니다. “천만에요, 절대로 단념할 수 없습니다. 무기징역을 산다 해도 나는 내 아들을 단념하지 못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리 방탕한 자식이라도 자식은 자식입니다. 모든 사람이 단념하여 내버린다 해도 부모는 그 자식을 마음에서 내몰지 못합니다. 

왜? 부모의 사랑은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을 읽어 가느라면 참으로 가슴 아픈 이야기를 보게 됩니다. 참으로 구슬픈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압살롬과 다윗의 이야기입니다. 다윗에게는 모두 열아홉 명의 아들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압살롬은 세 번째 아들로서 갈멜 여인 아비가일의 소생입니다

사무엘하 14:25에 보면 “온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압살롬같이 아름다움으로 크게 칭찬 받는 자가 없었으니 그는 발바닥부터 정수리까지 흠이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너무 유능했던 탓인지는 몰라도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이 하나님께 기도하였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너무 자신감이 넘쳐서, 그 영혼 속에 하나님이 거하실 틈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결국 압살롬의 인생을 실패로 종지부를 찍게 하고 맙니다. 

 

그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압살롬에게는 다말이라는 누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배다른 형인 암논이 다말을 자기 방으로 유인해 들이고 강간을 한 뒤 구박하여 쫓아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다윗왕은 아들 암논의 죄악에 대해 징계를 내리지 않습니다. 

차 고장. 사인이 왔을 때 즉시 대비해야.

압살롬은 아버지가 아무런 징계를 하지 않자, 복수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2년의 세월이 흐른 뒤 압살롬은 양털을 깎는 행사에 암논을 비롯한 형제들을 초대해서는 암논을 살해합니다. 

다윗은 통곡합니다. 어째 이런 일이 우리 가정에 일어날 수 있단 말인가? 

2년 전에는 오빠가 동생을 강간하는 부끄러운 일이 있었는데, 이제 동생이 형을 살해하는 사건이 나니 다윗은 할 말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자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피해 외가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압살롬을 그리워합니다. 이 마음을 읽은 다윗의 신복 요압이 압살롬을 이스라엘로 데리고 옵니다. 

돌아온 압살롬은 국민들의 인기가 그에게 모이자 세력을 모아 왕위를 넘보며 아버지마저 해하려 듭니다. 그리고 반란을 일으킵니다.  

그런데 반란이 일어났을 때 다윗은 반란군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떠나는 편을 택합니다. 

다윗의 부하들은 다윗을 설득하여 싸우려고 했지만 다윗은 결코 대적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당시 다윗이 힘이 없어서가 아니었습니다. 또한 지지 세력이 없어서도 아니었습니다. 다윗에게는 저를 넉넉히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차마 아들과 대항하여 싸울 수 없어서 보좌까지 내어놓고 광야의 길을 나선 것입니다. 

이것이 아들 압살롬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었다는 것입니다.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비록 아들은 아버지를 향해 칼을 겨누었지만, 아버지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특히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마지막 싸움터로 나갈 때 다윗은 요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하 18:5 “나를 위하여 젊은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우하라” 

다윗은 요압에게 만약 전쟁에서 승리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게 되더라도 압살롬만은 살려주라고 모든 백성이 다 듣는데서 선포합니다.

그러나 요압은 압살롬을 죽이지 말라는 왕의 명령을 어기고 압살롬의 심장에 창을 꽂았습니다. 

비참하게 죽은 아들의 비보를 접한 다윗이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지 보십시오. 사무엘하 18:33절입니다.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다윗은 죽은 아들의 소식을 접하고 웁니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합니다. 그는 땅바닥에 엎드려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아들을 생각하며 울부짖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심정, 사랑, 마음, 믿음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고귀한 눈물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적극적인 사랑을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은 돈을 들고 머나먼 타국으로 갔습니다. 말려서 될 일이 아닙니다. 찾아간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기다릴 뿐입니다. 

아들의 마음이 돌아오기를 끝까지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아버지는 여러 해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아들을 간절히 기다렸을 것입니다. 지금 그 아들이 거지가 되어 돌아오고 있습니다. 

알아볼 수도 없는 먼 거리이지만 아버지는 한 눈에 아들임을 압니다. 

20절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먼 거리에 있는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고 기쁜 마음으로 달려가서 아들에게 입을 맞추고 영접합니다. 이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거지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아들을 대번에 알아보고 달려가 끌어안고 입을 맞추는 부모의 사랑입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복귀에 있어서도 적극적입니다. 탕자를 아들로 영접하는 데에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수속도 필요 없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이렇듯 빠를 수가 없습니다. 물어볼 말도 없습니다. 

‘너는 내 아들이다’ 이것말고 다른 조건이 필요없습니다. 그간의 걱정근심이며 아픔과 고통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푸념이 없습니다. 

No Condition. 어떠한 조건도 필요치 않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과거도 캐보지 않았고, 자신이 겪어온 고통에 대해서도 언급이 없습니다. 그리고 용서합니다. 탕자의 아버지는 무조건 아들을 용서합니다. 

아들이 돌아왔기 때문에 용서한 것이 아니라 이미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완전히 용서하고 기다린 것입니다. 

또한 아버지는 큰 기쁨으로 아들을 맞고 잔치를 벌입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명하여 좋은 옷을 입혀라, 가락지를 끼워라, 좋은 신발을 신겨라 하면서 풍악을 울리게 하여 잔치를 벌입니다. 

아들의 귀가 자체를 그렇게 기뻐하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소원은 이 기쁨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왔다는 이 한 가지 기쁨에 더불어 참여하라는 것입니다. 아무런 조건이 없습니다. 오직 은혜 안에서 아버지의 이 벅찬 기쁨을 함께 수용하고 누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소원입니다. 

아들이 모든 부끄러움과 죄송스런 마음과 죄책감을 다 묻어버리고 깨끗한 마음으로 이 기쁨에 참여해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이렇게 염치없이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기독교 신앙은 바로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지금 이 시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든든한 부모와 형제가 있는 자는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외롭지 않으며 

어떤 일 앞에도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며 슬퍼했으나 그분의 자녀가 된 이후로는 고아와 같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그분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간 모두들 결단하시기를 바랍니다. 

이사야 43:1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이 주님의 음성을 듣고 나의 하늘 아버지의 품으로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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