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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리와 죄인의 친구들 (누가복음 7:33-34 )

   

    세리와 죄인의 친구, 누가복음 7:33-34, 369장 

 

창세기 34-40장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랑의 극치는 십자가로 표현이 됩니다.  

크리스찬이란 바로 십자가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리스도인의 속성이 결정됩니다. 

고린도전서 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분명히 알 것은 십자가는 죄인에 대한 처참한 처형법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가장 부끄럽고 가장 저주스러운 죽음이 바로 십자가 죽음입니다. 

신명기 21:23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 십자가 안에 기독교인들의 무궁무진한 비밀이 숨기어 있습니다. 그 속에 엄청난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또한 십자가 위에서 죽어 가시는 시간에 말씀하십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엄청난 선언입니다. 

죽어가면서도 그렇게 자기를 죽이는 자들을 용서하시고 위하여 기도하고 계십니다. 거기에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상상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려다 보시면서 ‘이놈들 두고 보자’ 하셨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 한 마디가 역사를 바꾼 것입니다. 

 

또 예수님의 십자가 속에 자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리저리 도망다니다가 일이 꼬여서 할 수 없이 죽으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경이, 복음서가 계속 증거하는 그 초점은 십자가가 우연히 발생한 일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십가가는 예정된 것이요, 계획된 것이요, 하나님의 큰 경륜 속에 미리 약속된 것이요, 그래서 자발적으로 십자가를 지신 거다. 이것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많은 이적이 무엇을 말씀합니까? 

병든 자를 고치시고 귀 먹은 자의 귀를 여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의 무덤에 가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소리치십니다. 죽었던 사람이 살아서 걸어나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씀하는 겁니까?

이러한 능력을 가지신 분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말씀입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신 분이 말없이 십자가를 지십니다. 그래 빌라도는 그것을 알 수가 없어서 ‘Behold the man!’ 이 사람을 보라, 도대체 알 수가 없는 사람이다. 그 능력을 가지신 분이 왜 말없이 죽어가는가, 합니다. 

십자가는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오묘한 우주적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계획적인 일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는 의의 계시입니다. 의의 승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죄란 그저 흐지부지 용서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누가 당하든지 당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냥 어물쩍 넘어가는 게 아닙니다. 

우리 나라 정치처럼 흐지부지 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하게 밝혀서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으로 벌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엄연합니다. 죄 값은 사망입니다. 

그런고로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 분이 죽지 않고는 절대로 살리지 못하니까요. 

 

갈보리 십자가의.

 

뉴욕 타임즈가 ‘친구의 정의’를 공모해서 가장 잘 되었다고 하는 친구의 정의를 내 놓았습니다. 

 

그 첫째가 모든 사람이, 온 세상 사람이 다 나를 버릴 때 그 때에 나를 찾아오는 사람, 그 사람이 친구다 라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로든지 모든 사람이 나를 배척하고 버릴 때 나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이 친구다, 한 것입니다. 

 

둘째는 나의 침묵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한 것입니다. 

나는 너를 안다. 네 억울함을 안다. 네 고통을 안다, 네 진실을 안다. 

침묵을, 나의 침묵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람 그게 내 친구입니다. 

 

셋째는 ‘나의 기쁨은 곱해주고 나의 슬픔은 쪼개주는 자다’입니다. 

나의 기쁨에 대해서는 multiply, 그와 만나면 기쁨이 배가 됩니다. 

점점 커집니다. 곱절로 커집니다. 슬픈 마음으로 만나면 슬픔이 반으로 감해집니다. 자꾸만 작아집니다. 그것이 친구다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보면 우리 죄인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세리와 죄인의 친구’라고 하는 오명을 받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그 부활하신 몸을 제일 먼저 보여주신 분이 바로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창녀로서 일곱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을 때 예수께 고침을 받았고, 그는 예수의 최후를 지켜보았고, 무덤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했습니다. 

저에게 궁금한 것은 언제 어떤 계기로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포르투칼의 주세 사라마구(Jose Saramago)가 쓴 ‘The Gospel according to Jesus Christ’라는 책에서 그는 전설에 근거해서 이 사실을 우리들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전도하실 때 그만 실족을 해서 발을 좀 다치셨습니다. 발에 상처가 나서 피가 납니다. 이걸 좀 싸매고 싶으신데 인근에 집이 없습니다. 그래서 두리번거리고 보았더니 저 동구 밖에 외딴 집이 하나 눈에 띕니다. 그래서 그 집을 찾아 가십니다. 가서 문을 두드리니 거기서 막달라 마리아가 나옵니다. 이 집은 전문적으로 간판을 내걸고 하는 창녀집입니다. 

창녀 막달라 마리아가 요염하게 차려입고 손님을 기다리다가 문 두드리는 소리에 반색을 하고 나온 것입니다. 

‘어서 오세요’하고 문을 열었는데 보아하니 점잖게 보이는 사람이 문밖에 서 있거든요. 막달라 마리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이 집이 어떤 집인지 알고 오셨습니까?’

‘어떤 집인데?’ ‘창녀집, 매음굴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저는 이 소설을 읽다가 이 대목에서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냐! 

예수님께서 들어가셔서 그 상처를 치료받으시고 그날 밤을 거기서 유숙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그 매음굴에서 주무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어떤 오해가 따라오겠습니까? 얼마나 소문이 많이 났겠습니까? 

 

그리고 그 뒤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다가 두어 달쯤 지나서 거기를 또 지나가시게 됩니다. 지나가시다가 궁금해 하십니다.

‘그 마리아는 어떻게 지낼까? 나를 만난 다음에도 계속해서 몸을 팔고 살아갈까?’ 그래서 그 집을 또 찾아드셨습니다. 마리아가 반갑게 맞이합니다.

‘이 여자가 변화했을까? 아니면 그대로 창녀 일을 계속할까? 

궁금하지만 그렇게 물어보시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물어보십니다. ‘요새 손님이 많으냐?’ 

막달라 마리아는 정색을 하고 대답합니다. 

‘선생님, 여자는요, 참으로 존경하는 어른을 한 번 만나고 나면 다시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답니다.’ 

이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때부터 막달라 마리아, 그 유명한 귀신들린 창녀가 예수님의 제자가 됩니다. 그때부터 열심히 따르고 마침내 십자가까지 따라가고 부활하시는 언덕까지, 그 무덤까지 따라가서 예수님을 뵙게 됩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무엇이 사랑입니까?

여러분은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해 본 일이 있으십니까?

사랑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사랑하면 변화합니다. 남을 사랑하는 순간 먼저 내가 변합니다.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에 내가 달라집니다. 

내가 달라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을 하면 먼저 듣는 마음이 생깁니다.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말을 듣습니다. 그게 사랑입니다. 들어주는 게 사랑입니다. 지루함도 없습니다. 계속해서 들을 뿐만 아니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이해가 자동으로 됩니다. 전 같으면 비판했겠는데 이제는 비판할 마음이 없습니다. 이제는 충분히 이해가 되니까요. 이게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애정의 눈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눈으로 보니 다 아름답습니다.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희망적으로 봅니다. 

사랑에는 낙심이 없습니다. 어떤 자를 사랑했든지 사랑하는 순간 그에게서 소망이 보입니다. 희망적입니다. 절대로 절망하지 않고 환하게 미래가 보입니다.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또 사랑은 내가 그에게로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저가 나에게 오기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내가 그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합니다. 그와 함께 먹습니다. 함께 잡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사랑은 주는 것입니다.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받고자 하는 마음이 주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얻고자 하는 마음이 베푸는 마음으로 바뀝니다. 그래서 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내가 생각하는 대로 주는 게 아닙니다. 

그가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게 뭔가, 그걸 알게 됩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충만했던 바로 그 교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는 것입니다. 필요, 필요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뭔가? 정말로 필요한 게 뭔가?

그것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충족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필요에 마음이 가고 관심이 가고 사랑이 갑니다. 

 

이렇게 참사랑을 베풀 때 사랑받는 자가 변합니다.

사랑받는 자가 달라집니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할 때 저가 변하고 내가 변합니다. 내가 달라지고 저가 달라지고 세상이 달라집니다. 그것이 사랑의 신비요 사랑의 속성입니다. 

사랑하는 내가 달라지고 사랑받는 저가 달라집니다. 

그래서 죄인인 우리가 새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사랑이 무엇입니까? 높은 자리에 서서 약간의 구제금이나 던져줄 생각입니까? 내 자랑하면서 선한 일 했노라고 할 것입니까?

사랑의 깊은 뜻을 알아야 합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명언을 제가 늘 마음에 새깁니다. ‘God's love does not find its object but creates it’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창조한다고 합니다. 

창조적 사랑,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참사랑을 얼마나 깨달았습니까? 우리 모두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이 얼마나 엄청나다는 것을 아십니까? 

나를 사랑하시기 위하여 당신이 죄인이 되셨습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 이것이 예수님께서 얻으신 이름이었습니다. 

여기에 참 사랑의 깊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 안에 내가 있습니다. 

이 참사랑의 깊은 뜻을 깨닫고 그 참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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