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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발걸음으로 (로마서 10:13-15)

 

 

     새로운 발걸음으로, 로마서 10:13-15, 518장.

 

창세기 20-26장

 

옛날 옛날 먼 옛날에 어떤 왕이 살았는데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발에 먼지가 묻고 거친 땅 때문에 발이 종종 상하게 된다고고 짜증을 내었다고 합니다. 늘 이렇게 길 때문에 불만스러워 하다가 급기야는 계엄령을 내리고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나라 전역을 쇠가죽으로 깔아라”

이 소문이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지고 사람들은 황당해 했다고 합니다. 

어떻게 이런 명령이 있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어느 지혜로운 사람이 왕을 찾아가 이렇게 충고했다고 합니다.

“쇠가죽으로 온 땅을 덮는다니요. 그것은 가당치도 않은 생각입니다. 그럴 것 없이 폐하의 두 발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쇠가죽 두 조각만 있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 가죽으로 폐하의 발을 잘 싸면 다시는 상처도 나지 않을 것이고 먼지도 묻지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왕은 무릎을 치며 좋아했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이구나”

이것이 구두의 유래라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2025년이라는 새로운 길에 서 있습니다. 

여러분은 새해의 길이 좋아지기를 바랍니까? 

그런데 길이 새롭게 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내 발과 내 발걸음이 새로워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이 달라질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참으로 아름다운 말씀이 나옵니다. 

15잘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구절절 깊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것에는 절대 조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그 말씀을 전하고 받아 들이게 하는 성령의 감화입니다. 셋째는 이것을 전하는 인격입니다. 

그 누군가가 전도해야 되는데 그 전도자의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질 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게 될 때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런 고마운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고 그가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역사해서 오늘 ‘나’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를 내게 전해준 분,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저에게는 ‘리브가’ 집사님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 옛날에도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전쟁에 나갔다하면 1년이고 2년이고 못 돌아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들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요새같은 통신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화도 없고 우편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그러니 후방에 앉아서는 이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겼는지 패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식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전쟁에 이겼다면 이겼다는 소식을 후방에 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겼더라도 지금 후방의 성내에서는 그걸 모르는 채 걱정과 근심으로 지내고 있거든요. 그래 이 좋은 소식을 한시바삐 전하기 위하여 승전보를 가지고 뛰는 것입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길을 달리고 

한 번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에 이겼습니다. 이겼다는 소식을 가지고 먼 길을 뜁니다. 이 사람이 소식을 전할 때 성문에 올라가서 “우리나라 군대가 이겼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를 때 온 성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그를 맞고 얼마나 반가워 하겠습니까? 

승전보, 기쁜 소식을 가지고 뛰는 그 사람의 발걸음, 그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행복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올림픽이라고 하는 것은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시작되었는데 그 시초는 마라톤입니다. 그런데 이 마라톤이 어떻게 생긴 것이냐하면 그 유래가 이렇습니다. 그리스의 용사 페이디피데스가 마라톤 전장에서 아테네까지 약 40 km를 달려 그리스의 대승을 알리고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합니다. 마라톤 경주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생긴 것이라고 합니다. 올림픽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운동, 그래서 마지막 final은 지금도 마라톤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려면 이 복된 소식이 내 것이어야 합니다. 

이 복음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긴 병사가 뛰는 것입니다. 

승리감에 취해서 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의 그 놀라운 영적 체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가지고 증인이 됩니다.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 소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겠다. 이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달려갈 때 그 사람은 이 거룩한 역사에 내가 쓰여진다고 하는데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발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신데 대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그 발걸음이 얼마나 가볍겠습니까? 

여러분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합니다. 엄청난 소식이 여기에 있지마는 전하는 자가 없다면 이를 어찌 듣겠느냐,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듣지 못했다면 어찌 믿겠느냐, 믿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받겠느냐 여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이 마음이 있을 때에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기쁨을 나 혼자만 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기쁨과 감격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더불어 기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로, 자의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교회는 성령 충만한 가운데서 유무상통하며 은혜의 생활을 누릴 때에 어쩌면 예루살렘에 그대로 머무르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큰 핍박을 주십니다. 야고보가 죽고,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고, 큰 핍박이 있을 때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흩어져서 사마리아로도 가고 다른 나라로도 갑니다. 다시 말하면 난민이 된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정처 없이 피난의 길을 떠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4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난민이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저들이 원치 않는 사마리아 땅에도 가게 하시고 이방 땅까지 가게 하신 것입니다. 갈 수 밖에 없도록 강하게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소식을 나 혼자 듣고 말아서는 안됩니다. 그 누구에게 전해야 됩니다. 전할 수 밖에 없도록 역사하십니다. 편견이나 고집은 버리고 그들에게 나아가 복음을 전하도록 주께서 강권적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비 콕스라는 사회윤리학을 강의하는 신학자가 쓴 ‘Secular city’(세속도시)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현대인의 특색을 요약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익명성’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한 마을이 다 알고 지냈습니다. 모두가 다 알고 개방적으로 살았는데 요즘의 세속도시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을 닫아 놓고 삽니다. 잠그고 또 잠그고... 이렇게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익명적입니다.

작은 교회들, 개척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아서라고들 합니다. 큰 교회에 나가면 가고 싶은 날은 가고 가고 싶지 않은 날들은 가지 않아도 묻지도 않고 그거 좋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개척교회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자꾸 찾아오고 뭘 물어보고 하면 귀찮다, 골치 아프다 할까요?

 

저는 고스톱은 여럿이 치는 걸로만 알았는데 요즈음은 혼자서도 기계하고 칩니다. 그런 세대가 된 것입니다. 전부 혼자서 놉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피상적으로 만납니다. 적당히 적당히...

무슨 클럽이니 모임이니 뭘 한다고 해 보아야 전부 피상적입니다. 깊은 만남이 없습니다. 고독합니다. 바로 이런 고독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들판을 뛰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이웃을 찾아가야 됩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야 됩니다. 

자 이렇게 문을 닫아 건 사람들을 찾아 가는 것을 우리들은 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 마음 문을 열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을 구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친구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랍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한테는 교회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더랍니다. 아무튼 이 분이 교회를 나와서 예수를 믿고나서 보니 너무 후회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왜 나는 이렇게 늦게야 믿게 됐나. 주변에 예수 믿는 친구들도 많은데 그 누구도 나더러 예수 믿으라고 권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구나!’ 저희들만 믿고 나 보고는 예수 믿으라는 말을 안 했다는 것입니다.    

하기야 얘기해 봐야 안 믿을 것 같으니까 그랬겠지만. 이게 문제입니다.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익명성을 해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게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전도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한 사람이 전도 되려고 하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은 고구마가 될 때까지, 물렁물렁 해 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내가 마지막으로 finish blow를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폐쇄적인 사람들을 찾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폐쇄된 인간을 개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 나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을 때 나도 행복해지고 저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을, 종착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걸음을 걷고 있습니까? 언젠가는 마지막에, 종착역에 도달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수도사가 죽어서 하나님 앞에 갔는데 천국 문에서 베드로가 그를 반갑게 맞이하고 하는 말이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한번 돌아보라고 하기에 뒤를 돌아다 보니 자기가 살아온 발자취가 죽 나있는데 자세히 보았더니 발자국이 두 사람의 발자국입니다. 왜 두 사람의 발자국이냐고 물었더니 “예수님께서 함께 하신 것이요”라고 대답합니다.

다시 자세히 보았더니 어떤 데서는 발자국이 한 줄인 것입니다. 

“저기는 왜 하나요?” “당신이 너무 힘들어 해서 예수님께서 업고 걸으신 때문이오”라고 대답하더랍니다. 

그는 생각했습니다. 지금까지 세상을 나 혼자 산 줄 알았더니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셨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캘빈의 예정론이 그것입니다.

지내놓고 나니 주님이 나와 함께 하셨구나! 이것에 감격하는 사람이 진정한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주님여 내 손을 꼭 잡고 

 

사랑하는 새 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 증인들이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저 가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가 지금 마지막 코스를 달리고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종착역을 바라보며 결승점을 바라보며 마지막 코스를 달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과 같이 바르고 복되게 신바람나게 

마지막 시간을 행복한 발걸음으로 달려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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