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아는 지식, 빌립보서 3:5-9, 91장.
요한일서-요한삼서
오늘은 대림절 첫 주일입니다. 대림절은 즉 Advent는 기독교에서 성탄절
전 4주간 예수님의 탄생과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교회력 절기입니다.
2024 대림절 첫 주일은 12월 1일입니다.
여러분은 성탄절을 어떤 마음으로 기다리고 계십니까?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두 가지 은혜의 방편을 허락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성경으로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또 하나는 성만찬 예식을 통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5일 성만찬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해 놓은 성경은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보여주며, 그 하나님의 사랑은 신실해서 변함이 없고 영원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가운데 끊임없이 예언자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주심으로 지속적으로 드러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범죄한 우리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님을 이 땅에 구원자로 보내주신 것입니다.
메시야의 오심은 이미 구약 성경 가운데 여러 차례 예언된 사실이었고, 하나님은 때가 되매 여자의 몸에서 예수님이 태어나시도록 하신 사실이
복음서에서 증거되고 있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기사들입니다.
약 3주 후이면 우리는 성탄절을 맞이하게 되는데 ‘성탄절’이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날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은혜'라고 하는 말의 본질적인 의미는 예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에게 찾아오셨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육신의 몸을 입고 구세주로서 인간에게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사건입니다.
인생은 힘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지혜로 사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지혜로 산다는 것은 어떻게 산다는 것일까요?
우리가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분류 방법이 있겠지만 저는 그 차이점을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어리석은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생각도 다른 사람에 대한 것으로 가득 차 있어서 다른 사람의 의견, 다른 사람의 평판을 그대로 따라갑니다.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면 나도 좋아하고, 다른 사람이 싫다고 하면 싫어합니다.
이러한 사람을 가리켜 ‘종속적인 세계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합니다.
자기 나름의 주체의식이나 개성이 없이 남에게 질질 끌려 다니는,
그러한 가치관과 세계관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평할 때에도 지기를 먼저 반성합니다.
남의 집 불난 것을 보면 빨리 돌아와서 내 집 불 단속을 합니다.
다른 사람의 실수를 보았을 때에 나에게 그런 실수가 없는가를 묻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둘째, 어리석은 사람은 과거에 집착해서 삽니다.
족보 찾고 학벌 따지면서 ‘내가 그래도 왕년에는...’ 하고 허구헌 날 옛 자랑 늘어놓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혹은 지난날의 괴로웠던 일을 자꾸 생각합니다. 과거에 섭섭했던 일, 과거의 실패, 여기에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뛰쳐나올 줄을 모릅니다.
그 마음과 생각이 과거에만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못하고 점점 더 무기력해집니다.
이런 과거 지향적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과거가 어떠하든지 그것을 딛고 떨치고 일어나
미래 지향적으로 승화시키고 살아갑니다.
셋째, 어리석은 사람은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는 일에 지나치게 마음을 씁니다. 세상에는 반반의 가능성을 지닌 일이 많습니다.
만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만에 하나’, ‘일어날 수도 있고 안 일어날 수도 있는’ 일들에 얽매어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에 지진이 났다는데 한국에도 지진이 나면 어떻게 하나,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났는데 한국에도 나면 어떻게 하나, 땅이 꺼지면 어떻게 하나, 하늘이 내려앉으면 어떻게 하나 하고 한도 끝도 없이 만일, 만일, 만일의 일들을 상상하며 걱정에 사로잡힙니다. 이러다 보니 사는 게 걱정의 연속이어서 옆에 있는 사람들도 불안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지금 1년의 마지막인 12월에 와 있습니다.
땅이 꽁꽁 얼어붙고 매서운 겨울 추위가 닥쳐 왔습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12월은 아닙니다. 성탄절이 오고, 새해가 되고, 다시 봄도 올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섭리를 확실히 알고 하나님의 가치, 절대가치를 알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상대가치에 매달려 허덕이며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처럼 불행한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사랑하는 빌립보서 2장 17절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전제’란 피를 제물 위에 쏟아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이를테면 살아 있는 양을 제물로 드리는 경우, 양의 목을 쳐서 피가 치솟아 오르면 그 피를 제단에 붓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내가 너희를 위해서라면 나의 피를 쏟아 부을지라도
기뻐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생명도 기꺼이 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대가치와 생의 의미를 가지고 사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라면, 그 분을 위해서라면 기쁜 마음으로, 죽어도 좋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유아기의 아이들에게는 어머니면 그만입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입으로는 젖을 빨고 손으로는 다른 한쪽의 젖가슴을 만지면 그만입니다. 더는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만족해 합니다. 유아기에는 그것이 절대적입니다.
그런데 유년기로 접어들면 장난감이 중요해집니다.
어머니가 불러도 노느라고 정신이 없습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큰 체벌은 장난감을 빼앗는 것이 되어 버립니다.
사춘기가 되면 이성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게 됩니다. 여학생이 옆에 있으면 정신이 없습니다. 좋아하는 남학생을 멀리서 바라만 보아도 가슴이 마구 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들, 지금 이 시간 무엇이 더 중요한가, 무엇이 first priority인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은 절대가치를 발견하고 사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라고 누누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 13: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며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느니라”
어떤 사람이 남의 밭을 갈고 있었는데 밭에 숨겨진 보화를 발견했습니다.
옛날에는 은행이 없어서 보화가 있으면 항아리에 담아 땅속에 묻어 두었습는데 아들에게조차 어디에 묻었는지 가르쳐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땅속에 묻어둔 사람이 죽기라도 하면 그것은 임자없는 보화가 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의 풍습에 따르면 그런 것은 발견한 사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발견한 곳이 남의 땅이라면 땅 임자에게 절반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이 사람은 보화가 든 항아리를 발견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는 이 보화를 혼자 차지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묻어두고는 밭을 사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있는 소유를 다 팔아서 그 밭을 사고 마침내 보화를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라는 보화를 내 인생에서 발견하게 되면 다른 것들을 다 팔아서라도 예수님을 사려고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가장 고상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위페레콘’이라고 하는 이 말은 영어로 ‘excellency, the best’입니다.
가장 귀한 것, 탁월한 것, 절대적 가치가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가장 고상한 것을 알고나니 전에 좋아하던 것, 유익하게 여기던 것이 다
시시해져서 그만 버리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물려받은 소중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서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언약의 백성이요 순종 유대인인 것입니다.
게다가 베냐민 지파입니다. 남유다는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베냐민 지파였습니다.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정통 유대인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특별히 경건하고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파였다고 합니다. 적어도 일반 사람들의 수준보다 높고 거룩한 인격의 소유자였다는 것입니다.
또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배반하고 훼방하는 자는 누구든지 죽여야 한다는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과거요 그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추구하였던 것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님을 알고 보니 그 모든 것이 다 소용없어져 버렸습니다.
지식적인 교만, 도덕적인 교만, 종교적인 교만을 다 내어버리고 주님만을 알고 주님만을 따르며 주님만을 소유하는 인격으로 바뀌어 살아 가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기 위해서 전에 좋아하고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다 잃어버렸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잃어버렸다고 합니다. ‘잃어버린다’라는 말은 헬라어 원뜻대로 보면 ‘잘라버린다’가 좀 더 정확한 의미일 것입니다.
여러분, 잊어버릴 것은 빨리 잊어버립시다. 다 지난 일인데 잊지 못하고 매여 있는 것을 봅니다. 가끔 소중히 여기던 것을 분실하고 많이 괴로워하는 사람을 봅니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은 하루빨리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보다도 능동적인 행위가 필요합니다. 내 스스로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너무도 소중한 것을 얻었기에 전에 좋아하던 모든 것을 내버립니다.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기를 바랍니다.
436장 2절 “이전에 좋던 것 이제는 값없다”
둘째로 배설물로 여겼다고 말씀합니다. 나를 더럽게 하는 것이다, 가까이 두면 오염된다, 이렇게 여기고 멀리 버렸습니다.
가까이 가시면 안됩니다.
셋째로, 좀 더 나아가 해로 여겼다고 합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입니다. 우상이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돈이 우상이 될 때에는 해가 되는 것입니다.
자녀 교육이 반드시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 자녀가 나의 우상이 될 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승진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만 승진이 우상이 될 때 해가 되는 것.
돈, 자녀교육, 승진 그 자체가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닌데 내가 그것들을 예수님보다 우선 순위에 둘 때 내게 해로울 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말씀합니다.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이 지식은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를 알고,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한다고 세 단계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나는 행복하고 기쁘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생각하는 것만이 나의 행복이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이 나의 행복의 전부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시 설명합니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의’ ‘디카이오스’ 이것으로 인하여 구원받고, 이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사에 적자냐 흑자냐를 따지며 살아갑니다마는 어떠한 것을 지불해서라도 예수님을 얻었으면 그것으로 행복한 것입니다.
때로 물질을 손해보면서 믿음을 얻습니다. 명예를 손해보면서 신앙을 얻습니다. 좀 더 큰 것, 좀 더 귀한 것, 좀 더 영원한 가치의 것을 얻었기에 그 밖의 것을 미련없이 내던집니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다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발견했기에 세상을 다 알았다고 만족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 살기에 영생 안에서 현재를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얻었기에 모든 것을 버리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오늘도 이 기쁨, 이 감격, 이 능력 안에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