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열왕기하 18:3-8, 210장
잠언 21-27장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관일 겁니다.
어떤 인생관을 가지고 세상과 사람과 자신을 보고 사는가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바르고 정확한 인생관과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야만 하는데, 아담과 하와의 죄로 말미암아 그 중요한 인생관이 왜곡되고 말았습니다.
그 왜곡된 인생관을 바로 잡기 위하여 십자가가 필요합니다.
종교마다 그 종교를 상징하는 문양이 있습니다. 불교는 만자 형태의 문양을 사용합니다. 만물의 덕스럽고 좋은 것을 뜻하는 문양이라고 합니다.
원불교에서는 동그라미를 상징 문양으로 사용합니다. 모든 진리가 하나의
원리에서 시작되었고, 하나의 진리로 연결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이슬람교는 초생달을 상징 문양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점점 커지는 초기에 뜨는 달이기 때문에 이슬람교가 진리의 시작이라는 뜻을 담아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기독교를 상징하는 문양은 고난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없이 세상을 보면 절망스럽게 보이지만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과 역사를 보면 소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기 시작하면 소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오늘 종교 개혁 기념 주일 예배를 맞이하여 십자가를 통하여 소망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면 히스기야가 유다의 왕이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한 일은 산당을 제거하며 우상들을 찍어 깨뜨리는 일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아하스는 (16:3) 이방인들의 가증한 우상숭배를 본받아 아들을 불에 태우는 끔찍한 일을 했고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던 사람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아버지 아하스의 이런 행위를 버리고 산당들과 우상들을 제거하는 신앙개혁을 주도하였습니다. 4절을 읽습니다.
모세가 만들었던 그 놋뱀은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뱀에 물려 고통당하며 죽어갈 때 장대에 달아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은 고침을 받게 하셨던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후대 사람들이 그 놋뱀이 무슨 병고침이나 능력을 주는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보다 못한 히스기야가 이것은 그냥 놋조각일 뿐이라고 선언했던 것입니다. ‘느후스단’은 놋조각이라는 뜻입니다.
기적, 하나님께 집중, 기적에 집중.
오늘 본문 5-6절에서 열왕기 역사가는 히스기야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곧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키는 것, 바로 이것이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이었습니다. 이 정신은 중세 교회를 향해 부르짖었던 개혁자들의 개혁정신과 다르지 않고 오늘 우리가 따라야 할 정신이기도 합니다.
이번 주 목요일, 31일은 507번 째 맞이하는 종교개혁일입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그 성당 정문에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함으로써 종교개혁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종교개혁은 세상의 부조리와 죄악을 개혁하고자 하는 한 개인의 개혁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타락, ‘이 문제를 내가 해결하겠다’고 하는 영웅적인 발상에서 시작된 것도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한 겁 많은, 평생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한 수도사의 깊은 고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깊은 고뇌 끝에 참복음의 진리를 로마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에서 발견한 것이 그 출발이 되었습니다.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시작이 되었고, 예루살렘 교회는 로마의 핍박으로 흩어져 각지에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흩어진 그들을 ‘디아스포라’라고 합니다.
여러 지역으로 흩어진 성도들은 흩어진 그곳에서 교회를 세웠습니다.
교회사적으로는 교회들이 성장을 하여 힘을 얻어 영향력을 끼치게 되었고, 마침내 교회의 대표인 로마 교황이 국가의 대표인 국왕보다 더 높은 실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핍박은 사라지고, 편안하게 되자 교회는 점점 타락하고 부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부패한 교회는 진리를 떠나게 되어 세속적으로 흘러갔습니다.
중세 유럽 사회는 교회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거대한 종교집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갖고 있던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순전한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미신과 신비주의가 혼합된 정체불명의 종교생활이었습니다.
화려한 성당건물과 그 안에 그려놓은 각종 성화와 조각상 등은 일반 성도들에게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종교개혁 당시 개혁자들이 예배당에 모셔놓은 성화들이나 성상들을 파괴했던 것은 그런 미신적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곳이 네덜란드.
그 시대 교인들이 미신적인 신앙으로 빠져들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 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라틴어로 된 성경은 사제들만 읽고 해석할 수 있는 전유물이었고 일반 성도들은 사제들이 읽어주는 성경구절과 기도문을 듣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성경을 스스로 읽을 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던 일반 민중들은 성경에 기초한 신앙생활보다는 성화와 성상들에게 절하며 수많은 미신을 만들어내었습니다.
더 나아가 종교 지도자들은 공공연히 성직을 돈으로 사고 팔았으며,
자식들에게 대를 이어 그 자리와 재산을 물려주었습니다.
마르틴 루터가 외친 종교개혁의 근본정신은 한 마디로 성경으로 돌아가자는 것이었습니다. 로마 카톨릭을 부정하고 새로운 교회를 세우겠다는 것이 아니고 말씀에 바로 서자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것이 진정한 종교 개혁입니다.
당시 로마 카톨릭은 1,000년 이상을 권력의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엄청나게 잘못된 길로 가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이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영적인 나병환자와 같았습니다.
나병이 무서운 것은 감각이 없다는 것입니다. 코가 썩어서 떨어져나가도 아픈 줄 모릅니다. 손을 뜨거운 물에 넣어도 뜨거운 줄을 모르는 게 나병입니다. 나병이 그래서 무서운 것입니다.
종교개혁 당시 교회가 그랬습니다. 면죄부를 팔면서도 그게 잘못이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 때 과감하게 ‘그건 아니라’고 외치고 나온 사람이 바로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 Luther)였습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인 찰스 5세는 보름스 회의를 소집하고 마르틴 루터를 소환합니다. 루터의 친구들은 루터가 가면 돌아오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피신할 것을 요청합니다. 이때 루터는 말합니다.
“원수들이 보름스 성당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며 재판정에 갑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말합니다. “Oh, God! Here I stand. I have no choice. 하나님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종교개혁자의 신앙이며 정신입니다.
실로 당당한 태도입니다. 그리고는 밀고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종교개혁입니다. 585장
루터가 그렇게 거대한 교회의 세력에 대항하여 개혁을 요구했던 것은 로마 교황청과 교회들이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던 중요한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루터가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어느 시대고 우리 신앙인들이 늘 깨달아야 할 진리이고, 오늘의 우리 시대에 교회와 우리 신앙인들이 되찾아 용기를 얻어야 할 진리들이기도 합니다.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을 일으키도록 신앙적인 양심에 용기를 준 - 루터가 깨달은 중요한 진리는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루터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하나님입니다.
중세에는 교회의 최고 권위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황에게 있었고 교회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은 언제나 뒷자리에 조용히 앉아 계시는 분에 불과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근엄한 얼굴을 하고, 교황이나 교회의 권위에 복종하지 않는 사람에게 심판의 채찍을 내리칠 준비를 하고 계신 분과 같았습니다.
그러기에 교인들에게 하나님은 무서운 분, 언제 채찍을 내리치실지 모르는 심판주로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루터가 발견한 하나님은 심판의 하나님보다는 은총을 베풀고 사랑을 베푸시기를 좋아하시는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크고 넓은 가슴으로 우리를 품으시고,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주셨고, 누구든지 그 독생자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베푸시는 그런 사랑의 하나님이었습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으로 우리가 오늘을 살아갈 용기를 얻게 되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의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교회 정문에 내건 95개 반박문 가운데 62조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교회의 진정한 보화는 하나님의 영광과 은총이다.”
두 번째로 루터가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오직 성경’으로 입니다.
만일 성경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 두 가지 잘못된 결과에 봉착하게 됩니다. 첫 번째는 인본주의이고, 두 번째는 신비주의입니다.
성경이 근간이 되지 않는 신앙은 인본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말씀이 떠난 교회는 교회가 중심이 되고 인간이 중심이 되어서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인간이 움직이는 교회로 전락하고 맙니다.
말씀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면 빠지는 또 하나의 중요한 함정은 신비주의라는 것입니다.
잘못된 신비주의는 인간의 감정에 따라 신앙생활하도록 유혹합니다.
말씀이 없이 하나님과 직접 대화하고 직접 계시를 받는다거나, 기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열쇠라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면서 말씀을 듣는 것보다 혼자 기도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면 그것 또한 잘못된 신앙입니다. 그런게 신비주의에 빠진 모습입니다.
그런 잘못된 신앙 때문에 수많은 이단들이 태어났고, 우리 기독교 역사를 어둡게 만들고 있습니다.
인본주의, 신본주의 모두 아주 위험합니다.
둘 다 신앙의 객관성을 잃고 개인의 생각이나 감정에 이끌려 사는 ‘주관적인 신앙’으로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주신 음성을 듣고, 말씀을 묵상하면서 내 문제가 풀어지는 경험을 꼭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우리의 신앙이 바르게 자라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루터가 발견한 중요한 진리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중세 시대에 교회가 권위주의에 빠지고 하나님 대신에 물질적인 세속주의에 빠지게 되었을 때 결국 생명력을 잃고 말았습니다.
재산이 많은 사람들은 못할 짓을 다 하면서도 면죄부를 사기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으로 마음에 위안을 삼았습니다. 면죄부를 살 수 있는 돈만 있으면, 자신의 생활은 엉망으로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그게 분명히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를 연구하면서 성경에서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서 3:24절에 보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면죄부를 사야 구원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주고 면죄부를 산다 하더라도 결국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믿음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에게 구원을 줍니다.
우리가 선한 행동, 신앙의 덕목을 쌓아 가는 것은 구원을 받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선을 행하고 착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앞뒤가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지금도 개혁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모든 신앙인들의 마음속에서 계속되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개신교회를 개혁교회(reformed church)라고 합니다.
날마다 잘못된 것은 잘라내고 올바른 신앙을 향하여 끊임없이 개혁되어 가는 교회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지 마십시오. 누가 뭐래도 믿는 자의 삶의 원리는 오직 성경입니다. ‘Sola Scriptura’입니다.
오늘 종교개혁 기념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두 개혁교회의 전통 위에서
늘 바른 신앙을 회복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올바른 신앙을 회복하는 사람들에게는 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큰 기쁨이
있게 될 것입니다.
바른 신앙을 회복하셔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고,
우리의 삶에는 큰 기쁨과 희락이 넘쳐나는 을신앙생활 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