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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다니엘 3:13-18)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 다니엘 3:13-18, 384장. 

 

요한복음 21장 – 사도행전 6장

 

7월을 마무리 하면서 드는 감상

어느 교인의 편지

목사님! 저 육칠월 십일조 했어요

십일조를 요새 잘 안내다 보니까 돈일 줄줄 세네요, 깨달음에 감사

 

황혜진 성도님 이준영 성도님 윤진이와 리아

8월에는 정이가 캐나다 워킹 홀러데이로

소윤이 출산이 8월 19일 주중  

아마 오늘이 최대 인원

 

바벨론에 느브갓네살이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이 느브갓네살은 그의 아버지 나보폴라살로부터 훈련을 잘 받았습니다.  

그가 왕이 된 후에도 주변의 모든 국가들을 점령하여 영토확장을 하였던 

당대 누구도 당할 자 없었던 전쟁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은 현재의 이라크 땅입니다. 그래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나는 느브갓네살의 후예다.”라고 자신에 대해 공식적으로 말한 바 있습니다. 

 

유다 왕 여호야김 3년(주전 605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유다왕 여호야김을 비롯해 많은 유대인들을 첫 번째 포로로 끌고 갑니다. 이것이 바로 1차 바벨론 포로기인데 이 때 느부갓네살이 아무나 다 붙잡아 간 것이 아니라 유다인 중에서도 뛰어난 사람만을 뽑아 잡아가 이들을 바벨론 언어와 각종 학문을 배우게 하였습니다. 

이들로 하여금 그들의 신앙을 버리고 바벨론 왕에게 충성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였습니다. 

일제 시대에 우리나라의 똑똑한 젊은이들을 뽑아 동경제국대학이나 일본 육군사관학교에 보내 장교가 되게 한 것도 조선인으로서 일본을 위해 충성을 다할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이 때 뽑혀간 네 젊은이들이 다니엘과 세 친구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방금 말씀드린 대로 바벨론 사람들이 이 젊은이들을 가르치면서 말도 바벨론 언어인 갈대아어를 쓰게 하고, 학문도 바벨론의 학문만 가르치고, 음식도 왕이 직접 하사한 진미와 포도주만 마시게 했다는 점입니다. 무엇을 뜻합니까? 이들 유대 젊은이들의 언어와 지식과 식성과 가치관을 바꾸어 철저하게 바벨론을 위해 충성하는 신복으로 만들려는 음모인 것입니다.

브레인 워시, 이를 잘 알고 있던 다니엘과 세 친구는 뜻을 정하여 왕이 내리는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았습니다. 다니엘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그들은 이것이 단순히 음식만의 문제가 아닌 자신들의 정체성과 신앙까지 바꾸어 놓을 것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하나님의 규례에 따라 열흘 동안 왕의 진미와 포도주를 먹지 않고 채소만 먹은 이들의 얼굴이 오히려 그것을 먹은 다른 젊은이들보다 더 아름답고 윤택해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들에게 모진 시련의 바람이 휘몰아쳐 옵니다. 

 

‘느브갓네살’은 바벨론 제국의 권위와 왕의 위엄을 드러내기 위하여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웠습니다. 바벨론 성 남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두라 평지’에 커다란 느부갓네살 모습의 금 신상을 만들어 놓고 제막식 날부터 모든 신하와 백성들로 하여금 그 금 신상 앞에 절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만약, “왕명을 어기면 활활 타오르는 풀무 불에 넣어 죽이겠다.”고 위협했습니다. 드디어 제막식 날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온갖 악기소리에 맞추어 

왕명에 따라 금 신상 앞에 절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절할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절을 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에 시기하고 있던 신하들이 그들이 절을 하지 않는다고 왕에게 이릅니다. 

왕은 크게 노하여 당장 그들을 끌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그리고는 느부갓네살이 그들을 회유합니다. “이제라도 너희가 절하면 살려주겠지만 절하지 않으면 당장 너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 던져 넣겠다. 이런 상황에서 너희를 풀무 불 속에서 건져낼 신이 어디 있겠느냐?” 

22절에 보면 이 풀무 불이 얼마나 뜨거운지 세 사람을 던져 넣으려고 붙잡고 있던 사람조차 그 불꽃에 타 죽었다고까지 말합니다. 

이제 막 이들을 극렬한 풀무 속에 던져 놓으려는 절대절명의 순간입니다. 

물론 눈 한 번 딱 감고 신상 앞에 절만 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데 당연히 왕에게 더 칭찬 받고 더 큰 총애를 받게 될 것입니다. 까짓것 눈 한 번만 딱 감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때 느부갓네살의 회유를 들은 그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16절을 보세요. 이 세 사람의 대답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이 일’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앞에서 느부갓네살이 회유한 것, 즉 지금이라도 신상 앞에 절하면 살려주겠다는 말과 나아가 그 어떤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이 극렬한 풀무 불에서 건져낼 수 있겠느냐는 말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이 일에 대해 왕에게 대답하지 않겠다.”고 한 것은 그 어떤 일이 있어도, 심지어 우리가 당장 이 풀무 불에 던져져 타죽는다 할지라도 절대 왕에게 살려달라고 호소하지 않겠고 우상 앞에 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또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우리를 극렬한 풀무 불 속에서, 그리고 왕의 손에서 건져 내실 것을 확신하므로 왕의 말에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분명한 믿음과 확신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다니엘서는 그냥 재미있는 옛날이야기가 아니라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 

신앙인들에게 너무도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이라는 점입니다. 

오늘날의 시대가 마치 다니엘 당시 바벨론 시대와 같다는 것입니다. 

온갖 우상과 불신이 판을 치고 물신주의와 부도덕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가치관이 혼란스럽고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조차 구분하기 힘든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신앙을 지키며 살아간다는 것, 믿음의 정절을 지키며 나를 더럽히지 않고 순결하게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다니엘과 세 친구의 이야기는 바로 이것을 보여줍니다. 

믿는 우리들은 아무나 만나서도 안 됩니다. 아무 곳이나 가서도 안 됩니다. 아무 일이나 해서도 안 됩니다. 

마귀는 작은 데서부터 야금야금, 우리를 더럽혀 죄로 오염시키고 죄악된 세상에 휩쓸려 살도록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내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를 만나곤 합니다. 

우선 삶이 너무 평안할 때, 우리는 교회로부터 멀어질 수 있습니다. 

친구들이 유학만 갔다 오면 다들 교회를 떠납니다. 

“그 때는 내가 약했지” 살만해 지니까 떠나가는 것입니다.

 

반면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도 믿음을 지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뱃사공이 능숙한 사공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고요한 바다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바다에 풍랑이 일어나 흉흉할 때 비로소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참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는 그 신앙의 진위를 알 수가 없습니다. 극심한 환란과 시련 그리고 도전에 부딪혀 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세 주인공은 죽음의 길을 선택하고 이글거리는 풀무불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이들의 믿음이 더욱 빛나는 것은 그 다음에 나오는 말에서입니다. 

18절을 함께 읽습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이 그렇게 하지 않으실지라도 우리는 신상 앞에 절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는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신앙이 정금같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찌라도.’ 세 사람이 바로 이 말을 한 순간 금으로 만든 우상 신상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신앙이 정금 같이 빛난 것입니다. 

 

2차대전 당시 연합군이 독일의 쾰른에 있는 한 지하 감옥에 들어갔다가 벽에 새겨진 시 한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그 지하 감옥에 갇혀있던 어떤 이름 모를 유대인이 쓴 시였습니다. 

그 유대인은 이미 처형을 당한 다음이었기에 지은이도 모르고 제목도 모르는 시, 투박하고 짤막한 시입니다. 하지만 이 짧은 시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엄청난 감동을 주었습니다. 그 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I believe in the Sun

even when it is not shining

I believe in Love

even when I am alone

I believe in God

even when he is silent

 

이 유대인은 지하 감옥에서 큰 절망에 빠져있었을 것입니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 없고 하나님께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도저히 살아나갈 희망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은 뭐라고 고백합니까?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더라도 태양이 있음을 분명히 믿는 것처럼 지금 이 시간 하나님이 침묵하고 계실지라도 나는 분명히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얼마나 귀한 신앙고백입니까? 

같은 신앙인이라도 하나님께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정말 귀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대한 감사에도 세 가지 종류가 있다고 합니다.

 

1. 은혜를 받고도 감사하지 않는 사람, 잊어버리는 사람. 

은혜 받고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대다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의 예를 보면 90%나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을 보면 예수님이 문둥병자 10명을 고쳐주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10명 중 오직 1명만 예수님께 찾아와서 감사를 표시합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이 탄식하십니다. 누가복음 17:17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은혜가 중지됩니다.

 

2. 은혜를 받고서 감사하는 사람

감사하면 은혜 위에 더욱 더 은혜가 넘치게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확대재생산을 하게 합니다. 

스펄전 목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불행 중 감사하면 불행이 끝이 난다. 형통 중 감사하면 형통이 연장된다.” 

 

3. 은혜를 받지 못해도 감사하는 사람

인생을 살다 보면 고난과 역경을 만나게 됩니다. 이럴 때는 대개 낙심, 하나님 원망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이런 경우에도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고난 중에도 감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런 경우입니다.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며, 만일 도와주지 않고 순교를 당하게 하셔도 감수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만 순교하는 게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것조차도 기쁨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겁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감사’입니다. 

쾰른 지하 감옥의 이름 모를 유대인이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은 이런 점에서 참으로 귀한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조건부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의 감사는 조건부 감사가 아니었습니다. 

 

풀무불속에 던져진 세 청년은 놀랍게도 머리털 하나 상처입지 않고 보호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사 43:1,2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나의 안에 거하라, 나는 네 하나님이니

모든 환난 가운데 너를 지키는자라.

두려워하지말라 내가 널 도와주리니

놀라지말라, 네 손 잡아주리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내 것이라 너의 하나님이라.

내가 너를 보배롭고 존귀하게 여기노라

너를 사랑하는 네 여호와라.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이 약속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불 속에서 구원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28절 이하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마저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굴복하고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28-30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제 갈 길을 알고, 찾아 가는 사람에게 세상은 길을 비켜준다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이 땅의 현실은 그 본질적인 면에서 지난날 바벨론 역사의 반복입니다. 그리고 저 두라 평지의 풀무불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 피부에 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오늘날 온갖 유형, 무형의 풀무불이 우리 앞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무신론의 불길, 쾌락의 불길, 세속의 불길, 황금만능주의의 불길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도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이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의 고백을 함으로써 참된 크리스찬임을 증거하며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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