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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과 떠나심(창세기 12:1-5)

   

 

    부르심과 떠남, 창세기 12:1-5, 366장

 

요한복음 7-13장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르시고 계십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반응한 사람들은 모두 새롭게 되어서 대단히 존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부름 받는 시간 이후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삶은 사실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도 아브라함이 부름 받은 75세 이후의 삶만 그려져 있고,  그가 전에 무엇을 했는지, 선하게 살았는지 악하게 살았는지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은 순간부터 공적인 경기가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기 이전을 설명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순간부터 그의 태도 하나, 하나를 생중계하듯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은 30세에 공생애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도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의 30년의 세월에 대하여 거의 

언급이 없습니다. 3년 반 동안의 공생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경기는 언제 시작이 되었습니까? 

하나님을 만나기 이전의 삶은 자랑할 것도, 또 부끄러워 할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저에게 중요한 것은 바로 지금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지금,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았느냐? 

어떻게 믿음의 길을 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 12장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찾아와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음으로써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만 우리가 듣지 못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하시는데 사람들이 듣지 못할 수가 있습니다. 방송국에서 계속 전파를 보냅니다. 누군가 라디오를 가지고 주파수를 잘 맞추면 당장 소리가 들립니다. 뉴스도 들리고 음악도 들립니다. 

그러나 우리가 라디오가 있어도 방송국에서 송출하는 주파수를 잘 맞추지 못하면 절대 들을 수 없습니다. 

그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주파수를 맞추지 못함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8:26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그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 잘 표현되어 있습니다. 

의심으로 가득하여 마음을 닫고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완고한 고집으로 처음부터 거부하는 자세로 있으면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잘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히브리서 3:15에 그 대답이 나와 있습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격노하시게 하던 것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열린 마음, 사모하고 기다리는 마음을 품고 준비만 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 소년 사무엘이 어느 날 자려고 누웠는데 ‘사무엘아! 사무엘아!'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얼른 일어나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습니다. 

“부르셨습니까? 제가 여기 왔나이다.” “부르지 않았으니 가서 자거라.” 

누웠는데 또 부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재빨리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는데 부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부르는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번에도 엘리 제사장에게 달려갔더니 엘리 제사장이 주께서 사무엘을 부르신다는 것을 깨닫고 이번에 또 음성이 들리거든 

“주님, 말씀하십시오.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대답하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사무엘은 하나님의 부르시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의 무대 정면에 중요한 인물로, 위대한 인물로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설교를 듣거나 기도 할 때, 성경을 읽는 중에 어떤 말씀이 여러분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의심 없이 하나님의 음성이라고 받아들이십시오. 

그 순간 하나님이 지금 나를 부르시고 계시구나! 하고 사무엘처럼 얼른 

“주님, 말씀하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 들으면 여러분의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출발이 될 수가 있습니다. 

 

저도 마흔의 나이에 찬송을 부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나 자신의 참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바로 나의 죄를 씻기 위해서 당하신 고난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아무도 관심을 같지 않는 나 같은 죄인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사랑이 가득한 음성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렇게 구원해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다면 왜 부르시는 것일까요? 

예레미야 29:11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심은 평범하기 짝이 없는 그의 인생을 놀라웁고도 아름다운 인생으로 바꾸어 주시기 위한 위대한 계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12:2,3

당시에 아브라함의 나이가 75세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인간적으로 볼 때에 75세는 희망이 사라지는 나이임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그 때까지 자녀가 없었습니다. 

쓸쓸히 자식 없이 살아가는 그에게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하시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삼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는 어마어마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여러분이 아브라함이라면 믿어지겠습니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짐을 싸서 그 땅을 떠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믿음으로 받는 것이 중요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갈 바를 알지 못했으나 일단 믿었습니다. 

하나님이 상세히 보여주신 것은 아니지만, 명확한 증거를 주신 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 전적으로 믿었습니다. 이 믿음이 중요합니다.

똑 같은 말씀을 몇 사람이 같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말씀을 통해서 큰 축복을 받았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했다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4:2에 보면 “들은 바 그 말씀이 그들에게 유익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과 결부시키지 아니함이라”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화합했느냐? 그렇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무지 내게는 일어날 것 같지 않게 느껴지지만 내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놀라운 일이 내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 믿습니다. 나를 향해서 큰 복과 놀라운 비전을 준비하셨군요. 감사합니다. 믿습니다.” 하는 이 믿음이 우리들의 인생을 바꾸어 놓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떠남의 종교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떠난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났습니다.

모세는 왕자의 신분을 떠났고,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의 삶을 떠났습니다. 

기독교에는 역설적인 진리가 있습니다. 

약한 자를 쓰셔서 강하게 하시고, 미련한 자를 택해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자들을 택하사 있는 자들을 폐하게 하시고.  

떠나면 망할 것 같은데 사실은 망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 나라의 중심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박해를 받아서 쫓겨나고 밀려나서 고향을 떠났는데 얼마 후에는 그들이 세계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지옥은 자신의 과거에 붙잡혀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 곳입니다. 

그러므로 지옥에는 희망이 없고 새 것이 없습니다. 

단테의 신곡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주인공이 지옥을 방문하게 되는데 지옥의 문패에는 이렇게 써있다고 합니다.  “이 문을 들어서는 자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희망이 없는 곳이 지옥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천국을 묘사할 때마다 새 것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합니다. 천국을 새 예루살렘이라고 했습니다. 천국에서 부르는 노래를 새 노래라고 했습니다. 천국을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언제나 새로움이, 참신함이, 신선함이 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는 사람도 언제나 새로운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은혜가 떨어지면 그 사람에게서 새로움이 보이지 않습니다. 같은 사람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새 사람, 신선함이 느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떠난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미지의 세계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하고 삽니다. 미지의 세계에 대해 출발하려고 할 때에 항상 ‘두려움’이란 것이 방해하는 것입니다. 이 두려움에 빠져 있는 사람은 늘 자신이 떠나지 않으면서 떠나지 않을 핑계거리를 만들어 냅니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그 일은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편하게 해 주는 데에 머문 사람치고 성공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은 사업적인 것이나 공부나,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의 내면에는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늘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만하면 됐지’ ‘이 나이에 내가 무슨 새로운 일을’ ‘이대로 살다가 죽으면 되지’ 미래에 대한 도전이나 꿈을 접고 사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학생이 공부를 잘 하려면 놀기만 좋아하던 그 습관, PC에서, 게임에서 떠나야 합니다. 

사업가가 성공하려면 게으름에서, 두려움에서 떠나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본토, 친척, 아비 집’ 이 모든 것들은 아브라함에게 익숙한 것들입니다. 지금까지 누리며 살던 것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러한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라고 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그 익숙한 것에서 떠나지 않고는 결코 새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익숙한 것은 우리를 안주하게 만듭니다. 발전적이지 못하게 합니다.  안주가 얼마나 무서운 죄인지 모릅니다.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뒤쳐지게 됩니다. 

 

1997년까지 휴대폰 시장은 모토롤라가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모토롤라는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넘어가는 1-2년 정도의 시기를 놓쳤습니다. 

일등 기업이라는 자만심에 빠져 고객들이 휴대폰 디자인의 변화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소홀히 여겼고, 디지털 기술에 대한 대비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저 익숙한 휴대폰을 가지고 소비자의 관심을 끌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북유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스노우타이어와 고무보트를 만들던 작은 기업에 불과했던 ‘노키아(Nokia)’하는 회사는 달랐습니다. 

이 회사는 익숙한 것들을 다 버렸습니다. 모토롤라와 달리, 디지털 기술을 빨리 도입하고  감성적인 휴대폰을 만들어, 단숨에 모토롤라를 휴대폰 시장에서 밀어내고 1위를 차지했습니다. 

 

타성이 우리를 망하게 합니다. 변화하지 않고 안주하려는 마음이 우리를 뒤처지게 합니다.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떠남은 고통이 따르고 아쉬음이 따릅니다. 

그러나 떠남이 없이는 결코 새로워 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늘 새로운 것을 향해 부지런히 도전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성능 좋은 배가 있을지라도 배가 항구를 떠나서 바다로 향하여 나가야만 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좋은 배를 항구에 묶어만 둔다면 그 성능 

좋은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떠나야 합니다.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바꾸거나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려고 할 때 많은 갈등을 하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기 앞서 갈등을 했습니다. “나는 말을 못합니다. 입이 뻣뻣합니다.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도 새로운 일에 대한 두려움과 갈등이 분명히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이 갈등을 믿음으로, 순종으로 넘어섰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런 갈등들을 넘어서야 합니다.  

하나님이 떠나라면 떠나는 것이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을 따라 떠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온 인류의 믿음의 조상이 되었고, 

복의 근원이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큰 축복을 받기 위하여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순종하며 첫 걸음을 떼어 놓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며 

그 손을 꼭 잡고 따라가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이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여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그 크고 놀라운 축복을 성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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