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요단 앞에서(여호수아 3:1-13)

 

   마가복음 12-16장, 누가복음 1-2장

 

요단 앞에서, 여호수아 3:1-13, 384장.

 

 역사학자 토인비는 “도전과 응전”이라는 그의 유명한 저서에서 한 문명이 

강하게 일어날 때 그 뒤안길에는 반드시 엄청난 도전과 시련이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개인에게 뿐만 아니라 한 민족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의 인생에도 종종 건너기 싫어도 건너야할 강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도 늘 새로운 역사를 시작할 때마다 장애물과 같은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우리 생각에 선택된 민족이면 그냥 만사형통하게 잘 살게 

하시면 좋겠는데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선택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삶을 up-grade 시키실 때는 여지없이 시험을 치르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 살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창세기 12:1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기독교의 기본은 떠남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익숙했던 것들에서 떠나는 것에서부터 신앙생활은 시작이 됩니다.

 

먼저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 유브라데 강을 건너야만 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유래되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뜻은 “강을 건넌 사람”입니다. 

그 후 애굽에서 430년 동안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이 모세의 인도 하에 홍해를 건넘으로 노예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이 꿈꾸어오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 또 하나의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그것이 바로 오늘 본문의 요단강이었습니다. 

지금 성지순례를 가서 보는 요단강은 작은 개울에 불과하지만 3500년 전의 요단강은 폭이 넓고 수심이 깊은 강이었습니다. 

더구나 그 시기는 연중 수위가 가장 높은 시기였습니다.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유랑민으로 전락할 것이요 젖과 꿀이 흐리는 가나안의 축복을 누릴 수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걷고 있는 길은 우리 인생길의 축소판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뭔가를 성취하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넘어야할 장애와 난관이 가로막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그 장애와 난관 앞에서 두 가지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는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입니다. 

캘빈의 예정론. 지내보고 나니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겠더라는 고백.

우리에게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처럼 보이지만 높이 계신 하나님의 눈에는 이 길이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이 길입니다. 예수님은 예배나 기도할 때만 필요하고 내 인생길은 

내 힘으로 개척해 나가야지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요한복음 14:6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둘째는 반드시 길은 있다는 확신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는 땅을 파서 샘을 내시는 것이 아니라 반석에서 샘을 

내시고 만나와 메추라기라는 하늘양식으로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홍해라는 엄청난 장애물 앞에서 길을 내심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탈출시키셨습니다. 지금 우리들도 우리를 가로막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힌 막막한 상황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알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오늘 이런 하나님의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은 여러분의 인생길에 대한 일말의 호기심이나 기대감을 느끼고 계십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당한 이 막막한 상황에서 어떻게 길을 내실까?’하는 그런 궁금증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장애물을 돌파하게 하실까 하는 기대감을 가지셔야 합니다. 반드시 길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우리 인생길은 동굴이 아니라 터널입니다. 

동굴은 막혔지만 터널은 반대편으로 뚫려 있습니다. 

깜깜하고 어두운 것 같은데 헤매다 보면 조금씩 희미한 빛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어느새 산 반대편에 도착하게 되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삶에 도전하시는 분들이나 인생의 질고 속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분들 모두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인생의 요단강을 돌파하는 법을 터득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먼저 1절은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서”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여호수아 생애 가운데 반복되는 말씀은 그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여리고성이 무너질 때도 6:12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니” 아이성 정복의 실패 후에도 7:16절에 “이에 여호수아가 아침 일찍이 일어나서” 아이성을 다시 정복할 때도 8:10절에 “여호수아가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성경이 여호수아가 일찍 일어났다는 것을 반복 기록한 것으로 보아 여호수아는 참으로 부지런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같이 부지런하고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결코 게으른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다. 

잠언 19:15 “게으름이 사람으로 깊이 잠들게 하나니

            태만한 사람은 주릴 것이니라“

 

그런데 요단을 건너기 전에 먼저 그들에게 요구된 것은 성결이었습니다. 

여호수아 3:5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쓰임받기 전에 먼저 갖추어야 하는 조건은 성결함입니다. 하나님은 실력 있고 능력 있는 사람보다는 깨끗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다니엘은 유대인으로서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왕은 그를 발탁하여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왕조가 바뀌는데도 불구하고 다니엘은 계속 그 높은 지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느부갓네살을 비롯하여 다리오, 벨사살 왕등이 다스리는 때에 총리직에 있었습니다.  

그 비결이 다니엘 6:4에 나옵니다. “이에 총리들과 고관들이 국사에 대하여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고자 하였으나 아무 근거, 아무 허물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 성결이 곧 능력임을 믿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성결한 자를 사용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성결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1:45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려고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여호와라.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진영에 머무를 때, 언약궤는 항상 그들의 중앙에 있었습니다. 즉 언약궤를 중심으로 사방에 흩어져 진을 쳤습니다. 그러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동할 때 항상 언약궤를 맨 앞에 앞세웠습니다. 

여호수아 3:6 “여호수아가 또 제사장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건너라 하매 곧 언약궤를 메고 백성에 앞서 나아가니라.”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맨 앞에서 그들을 인도하여 갔던 것입니다.  

언약궤는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언약궤가 가는 곳에 하나님은 늘 그들과 함께 하셨던 것입니다. 

3:4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즉 이 길은 그들에게는 초행길이었기 때문에 안내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인생길은 우리에게 언제나 초행길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갑니다. 그러므로 초행길을 가는 인생은 언제나 하나님을 앞세우고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그 길을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하나님을 앞세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앞세우는 것은 바로 우리가 매사에 먼저 기도하고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기도도 안하고 일을 시작했다가 문제가 생기고 난 다음에 하나님 앞에 수습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일을 시작하는 것보다 기도와 말씀이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는 강물이 갈라진 다음에 건넌 것이 아니고, 강물이 철철 흘러 넘치고 있을 때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그 물로 들어 선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잠기자 위에서 내려오던 강물이 멈추게 되었습니다. 

아직은 물이 갈라지지 않았으나 멈추어 설 줄로 믿고 들어섰다는 것입니다. 

믿고 들어섰을 때에, 물은 위에서 멈추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는 어떤 스타일입니까? “하나님, 이 문제만 해결해주시면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예배에도 열심히 참석하고 십일조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니다. 먼저 충성하고 봉사하라. 그러면 내가 길을 열어줄 것이다.”

믿음은 불가능해 보이는 현실에 도전장을 내는 것입니다. 

될 것 같지도 않은 일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으로 시도해 보는 것입니다.  

뭐든지 겁을 내서, 아무 것도 시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가복음 9:23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새하늘 교회 성도들이 믿음을 가지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반드시 요단이라는 장애물을 넘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 장애물을 하나님께 대한 기도로 극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헌신을 하시되 철저한 헌신을 하십시오. 

요단에 발을 담근 만큼 은혜를 받게 되어 있는 법입니다.  

유태인들의 탈무드 중에는 “유태인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고 안식일이 유태인을 지켜주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자기희생과 결단이 요구됩니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더한 희생도 치렀습니다. 

기원전 2세기의 마카비 전쟁 때는 안식일에 군인들이 칼을 들고 싸울 수 없다고 하여 스스로 무장해제 하는 바람에 적에 의해 몰살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을 지킴으로 말미암은 희생보다 안식일이 준 은혜가 더 컸다고 고백을 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일과 말씀에 우선순위를 두고 그에 헌신하는 자의 축복이 이러하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면 시간적으로 손해고, 물질적으로 손해고, 인간관계나 여러 가지 개인적 시간이나 즐거움을 침해당하는 것 같은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자에게 그 누구보다 풍요로운 삶을 보장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오늘 말씀에서 놓쳐서는 안 되는 아주 중요한 구절이 있습니다. 

7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내가 오늘부터 시작하여 

너를 온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크게 하여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는 것을 그들이 알게 하리라.” 

그 하나님이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그 분이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와 풍요함으로 

우리 인생을 채우실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마침내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