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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도(고린도전서 1장 18절)

 

 

 

       마태복음 12-18장

 

십자가의 도, 고린도전서 1:18, 341장.

 

여러분, 혹시 Tomato Effect, 토마토 효과라는 말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근거 없는 추측이나 편견 때문에 좋은 것을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은 토마토가 얼마나 좋은지 사람들이 다 압니다. 

그런데 16세기에는 관상용으로 재배했지만 먹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토마토를 처음에는 관상용으로 심었으나 차츰 영양가가 

밝혀지고 밭에 재배하여 대중화되었다고 합니다. 

원산지는 남미 페루인데 16세기 초 유럽으로 건너가 재배되었고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초 일본을 거쳐서 들어왔다고 추정하고 있다.

토마토가 과일이냐 채소냐 하는 시비가 한때 미국에서 정부와 업자 사이에 논란이 있었는데 대법원에서 토마토를 채소로서 판결을 내렸다고 합니다.

먹지 않은 이유가 아주 황당합니다. 토마토 속에 독이 들어 있어서 사람이 먹으면 열이 나고 급사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먹을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미국에서는 위험하니까 텃밭에서 재배하지 말라는 법령까지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1820년 미국 뉴저지의 존슨 대령이 사람들을 불러 모아놓고 시식을 하기로 합니다. 사람들은 불쌍한 사람 하나 죽겠네 하고 수군거렸습니다. 드디어 존슨이 토마토를 한 입 먹자 사람들은 놀라서 기절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이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 둘 따라 먹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무려 2백년 이상 그 좋은 토마토를 편견 때문에 먹지 못했던 겁니다. 

 

오늘 본문도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편견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중에 직접 세운 교회입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는 부족한 것이 없는 참으로 대단한 교회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5절에 보면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하므로’라는 말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말씀을 통하여 고린도교회에는 세상적으로 출중한 사람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장 7절에 보면 ‘너희가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이’는 말씀이 있는데,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고린도교회에 하나님의 은혜로 많은 은사가 나타나는 아주 뜨거운 교회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린도교회에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교회 안에 파가 갈리어 서로 다투고 싸우는 분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12절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고린도전서는 이같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것을 책망하기 위하여 에베소에서 쓴 서신입니다. 사도바울은 그 분쟁을 종식 시킬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는데 바울이 제시한 방법은 십자가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문제를 재판관의 역할이 아닌 십자가의 도로 풀려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18절에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말씀합니다. 

기독교는 십자가의 종교입니다. 십자가는 일종의 암호입니다. 하나님의 암호! 

암호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공개된 비밀’입니다. 

누구에게 공개하는가 하면 자기 편에게만 공개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 교회 출입구의 비밀번호 같은 겁니다.

하나님이 그 비밀을 예정 선택된 사람들에게는 다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복음을 들으면 예정된 사람들은 신기하게도 순순히 믿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할 때 믿음으로 “아멘!” 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습니다. 

 

구약 성경에도 보면 하나님의 암호가 등장합니다. 

민수기 21장에 나오는 ‘놋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하며 불평하다 하나님의 진노를 삽니다. 불뱀이 나타나 그들을 물었고, 그들은 온 몸이 부어오르고 죽어갑니다. 그때 모세의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께서 암호를 알려줍니다. 놋으로 불뱀과 동일한 모형을 만들어 장대에 매달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면 살 수 있다는 겁니다. 

그대로 믿고 바라본 사람은 다 살았습니다. 그런데 죽으면서도 끝까지 놋뱀을 바라보지 않는 무리들은 그대로 죽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암호를 믿기만 하면 죄와 사망에서 구원을 받습니다. 다른 행위나 공로는 필요 없습니다. 이 믿음의 유무에 따라 모든 인간이 둘로 갈라집니다. 동일한 상황에서 동일한 십자가 복음을 전해도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대표적으로 두 부류로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과 헬라 사람들입니다. 

22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유대인들은 메시야에게 초자연적인 능력을 바랬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야라면 표적을 보여주시오’라고 말한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런 능력을 가진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 힘없이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의 모습은 무능력한 것이었고, 우스운 것이었습니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표적을 구합니다. 그 표적이 보이는 곳을 향해 움직입니다. 병 낫게 해 주십시오. 돈을 벌게 해 주십시오. 만사 형통하게 해 주십시오. 놀라운 기적과 이적을 보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들은 항상 놀라운 일들이 내 주위에 일어나야만 믿음 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위로를 받습니다. 일상적인 평범한 생활 속에서는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은혜를 발견하지 못하고 불안해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이란 나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그 분과 동행하며 사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에 관해 가장 잘 설명해주는 책입니다. 

세상의 그 어느 책보다 인간의 본질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그런 성경이 인간의 비극이 창조주 하나님을 떠난 데 있다고 증거합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죄의 대가가 사망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망의 개념은 ‘분리’입니다. 

지옥같이 산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은 지옥 같은 삶을 살게 됩니다. 하나님을 떠나 사는 상태가 지옥인 것입니다.

 

반면에 헬라 사람들은 지혜를 추구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헬라 사람들은 인간의 지혜, 과학의 힘으로 모든 질병과 인류의 문제를 극복하고 결국은 파라다이스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대 헬라 사람들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추구한 것이 철학입니다.  

철학은 영어로 필로소피입니다. 필로는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소피아는 ‘지혜’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철학은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헬라인들은 철학을 사랑했습니다. 

헬라인들은 다양한 철학들을 추구해서 웅변술과 토론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길거리에서도 논쟁하고 토론하는 것을 즐겼고, 사람들은 지식 쌓는 것을 아주 좋아했습니다. 고린도 교인들 역시 그 영향으로 무엇인가 고상하고 수준 높은 지식을 찾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 헬라 사람들의 특징을 잘 아는 바울도 아테네에 가서 철학적인 실력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매우 실망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철학이 가미된 복음을 전파했을 때 사람들은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 확고한 결단을 보여줍니다. 

‘십자가의 도’ 외에는 어떤 것도 전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인간적인 지혜나 지성에서 나온 자랑들을 늘어놓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오늘 본문에서 소개되는데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교회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상에 전달해주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줄 것은 십자가의 복음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의 행위는 십자가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십자가 없는 헌신이나 활동들은 신앙적 행위가 아니라 사회활동이 될 수 있습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든지 십자가로부터 흘러나와야 신앙적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무리 사회봉사를 많이 하고 활동을 많이 해도 십자가가 빠지면 세상 단체 중의 하나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치관이 근본적으로 다르고, 사물을 보는 관점과 해석도 다릅니다. 세상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 남을 죽여야 하지만, 신앙의 논리는 죽어야 산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역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지고, 포기해야 얻고, 약할 때 강함이고,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기꺼이 가고,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고, 하나하나 뜯어보면 한마디로 정상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을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정상이 아닙니다. 

 

본문을 쓴 바울은 자신이 바로 지식과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과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적인 삶을 산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전통적인 유대인인 바리새파 사람이었지만 헬라 철학에 능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랍비 가말리엘의 수제자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비웃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변화됩니다.  

이런 변화를 본문 23절을 통해서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자신이 비웃었던 십자가에서 아주 놀라운 ‘십자가의 도’의 신비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24절에서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 고백을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은 만난 후에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신비적인 종교적인 행위를 추구하거나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의 신앙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 세워집니다. 

바울은 ‘내가 평생에 자랑할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고 고백합니다. 

 

믿음이 생기기 전 십자가 없이 세상과 역사를 보면 언제나 절망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고 절망적이어도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보면 그곳엔 언제나 소망이 있었습니다. 

살다보면 힘들고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는 것과 같은 자리에 처할 때가 있습니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도 십자가를 통하여 그 절망적인 상황과 불안한 상황을 다시 보면 극심한 절망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 세상과 우리의 인생을 궁극적으로 지배하시고 역사하시는 분은 나와 사람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자신과 사람을 보면 전혀 다른 것이 보입니다.

사도바울은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바울은 우리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훌륭한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자기 자신을 보았기 때문에 자신을 죄인으로 인식하였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로 인식하였습니다. 

자신이 그와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귀한 그릇으로 쓰임 받는 것에 대하여 그는 늘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다. 

그것이 자신의 의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가 십자가를 통한 죄 사함 때문에 가능해졌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고백하였고, ‘십자가 외에는 자랑하지 않겠다.’며 고백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의와 능력을 자랑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오늘 본문 마지막 절에서도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참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못 마땅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에게 고통을 주고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힘든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가시 같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세상에 사람처럼 힘든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를 통하여 저들을 보게 되자 저들도 나와 똑같이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아들과 딸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436장 1,3절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신앙 생활이란 이와 같은 것입니다. 

C.S 루이스는 “당신을 편안하게 해 줄 종교를 찾는다면 나는 절대로 기독교는 추천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진리를 갖는 것이 자기중심적인 편안함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기독교를 찾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편히 사는 것이 무조건 나쁜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좋은 일도 아닙니다. 무조건 편히 사는 것만 추구하다보면 우리들은 몸도 약해지고, 마음도 약해지고, 정신도 약해지고, 신앙도 약해 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삽시다.

예수님이 가르치시고 친히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범을 보여주신 원리인 십자가의 도를 따라 사는 것이 행복입니다. 

지금은 힘들고 어려워도 거기에 생명과 축복과 상급과 위로가 있습니다. 

주님이 맡기신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십자가의 도를 따라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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