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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랑속의 고요함(마가복음 4:35-41)

 

 

    스가랴 9-14장, 말라기 1장

 

풍랑 속의 고요함, 마가복음 4:35-41, 400장

 

 중국의 고전 ‘채근담’을 보면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고요한 가운데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니요, 시끄러운 곳에서의 고요가 참된 고요이다”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고요한 환경 속에서의 고요는 참 고요가 아닙니다. 사람의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번화하고 소란한 환경 속에서 마음의 고요를 얻어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것이 참 고요인 것입니다. 

 

사람은 환경에 대처하는 스타일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뉘어 집니다. 

첫째는 환경에 좌우되는 종속적 인간입니다.

환경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되는 환경 동화적 존재를 말합니다.

기뻐하는 사람들 중에 섞이면 기뻐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슬퍼하고, 누구를 비난하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같이 비난하고, 남이 나를 미워하면 나도 그를 미워하고,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리는 그런 스타일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의 인격은 오로지 환경의 산물일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스타일의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항거 체질의 인간형입니다. 이런 유형의 사람들은 언제나 거스르고 퉁깁니다. 그래서 일단 반항부터 하고 봅니다. 

반항이야말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처음부터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하고 순순히 나오면 자기가 지는 줄로 압니다. 남의 말을 다 들어 보지도 않고, 깊이 생각해 보는 법도 없이, 무조건 ‘노우’입니다. 덮어놓고 노우해야 합니다.

반항으로 자기 존재를 확증하려는 것, 소인배들의 자기 방어요, 어리석은 자들의 체질입니다.

 

셋째는 초월적 인간형입니다. 일이 잘된다고 교만하지 않고, 억울함을 당해도 노하지 않으며, 야단스럽게 떠드는 자리에 가서도 고요함을 유지합니다. .

진정한 ‘주체의식’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한 존재가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격자가 됩니다. 이렇게 초월할 때에 개혁하고 창조하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 길은 가고, 버릴 것은 버립니다. 엄연히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는 인격, 바로 이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41절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에 나타난 바와 같이 풍랑을 잔잔케 하시는 예수님의 능력과 그 능력에 놀라는 제자들의 반응으로 많이 알려진 말씀입니다.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놀랐읍니다마는 참으로 놀라야 할 것은 그 능력이 아닙니다. 풍랑 때문에 놀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풍랑을 고요케 하시는 능력, 단순히 그 능력 때문에 놀라는 것 역시 유치한 반응입니다. 

풍랑 속에서도 고요하게 주무시는 바로 그 모습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풍랑과는 아무 상관없이 초연하신 예수님의 그 놀라운 샬롬, 평강 이것을 

보고 놀라야 합니다.

 

평생 칼빈을 연구한 어느 신학자가 말했습니다. “칼빈은 하나님을 어찌나 두려워했든지 다른 것은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이제 무서울 것이 없습니다. 두려워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어 사는 사람들은 세상일에 그다지 놀라지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습니다. 반대로 세상일에 깜짝깜짝 놀라는 사람들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삶 속에서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보이지를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본문은 35절로 시작합니다. “그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우선 35절에서 생각해 볼 문제는 두 가지입니다.

저물 때에, 밤에 항해하는 게 맞지 않습니다. 

순종해서 갔는데 풍랑을 만납니다. 자신이 자초한 것은 풍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더니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았더니 손해보더라, 주일 성수했더니 사업상 어려운 일이 생기더라

40년의 대장정이 끝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 하는데 요단강이 가로막고, 난공불락의 성 여리고, 믿음으로 뚫고 갑니다.

풍랑을 통하여 우리들의 믿음은 자라갑니다.

 

생각해 볼 두 번째 문제는 예수께서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건너가라고 말씀한 것도 아니고 내가 건너가리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고 우리가 건너가자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서 믿음의 아주 중요한 속성이 나타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공동의 작업이에요. 파트너십입니다.  

한쪽만을 강조하다가 실수합니다. 

그러므로 내 인생 내 신앙을 나만의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하는 사람은 자기의 인생에 나만 관심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것이 하나님이 승리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람의 공포 중에서 가장 큰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가 죽을까봐 걱정이고 둘째가 지옥갈까 봐 아닙니까? 

사실이지 비행기 여행만큼 신나는 것도 드물지 않습니까? 

저는 탈 때마다 즐거운 마음으로 탑니다. 옛날에 태어났다면 하늘을 난다는 것을 어디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비행기 덕분에 하늘 높이 날 수 있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뿐만 아니라 시간마다 음식 잘 주니 좋고, 승무원들이 이모저모 신경 써주니 불편한데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비행기 타고 가다 사고 나면 하늘나라로 직행할 것 아닙니까? 

비행기 타고 많이 올라 왔으니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됩니다.

하나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40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십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워하고 믿음이 없기 때문에 평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8:26을 보면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꾸짖고 계십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문제이지 환경이 문제인 것이 아닙니다.

세상 문제도, 격동하는 사회 문제도 아니고 우리 자신의 믿음의 문제라고 오늘 본문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내 운명을 좌지우지 하시고 나와 함께 계심을 믿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기듯이 이 풍랑 속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을 찾아간다는 말입니다. 

 

영어에서 보통 큰 것을 big 혹은 great 라고 하는데 아주 큰 것을 나타낼 때는 mega라는 말을 씁니다. 이 mega라고 하는 단어가 ‘메갈레’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주, 굉장히 크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성경 본문을 원어 성경으로 보면 ‘메갈레’라는 말이 대구적으로 두 번 나옵니다. 37절의 ‘큰 광풍이 일어나며’에서 광풍의 크기를 말할 때에 쓰였습니다. 원문을 보면 ‘메갈레 아네무’라 했습니다.

광풍 중에서도 아주 메가톤급 광풍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바람에게 명령하여 바다가 고요해진 장면에서 쓰였습니다. 39절의 ‘아주 잔잔하여지더라’에서 역시 메갈레가 쓰였습니다.

‘갈레네 메갈레’ 아주 큰 메가톤급의 고요함이라는 뜻입니다. 

큰 광풍이 메가톤급이라면, 고요함 또한 메가톤급입니다. 

 

사도 바울이 죄수의 몸으로 쇠고랑을 차고 로마로 가는 중입니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들이 배를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습니다. 

이리 구르고 저리 구르며 사나운 풍랑에 속수무책으로 끌려가는 형편입니다.

짐은 다 풀어서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모두가 열나흘을 굶었습니다.

이제는 아무 희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비참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믿음을 가지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27:24-25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내게 주셨다 하셨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나님의 경륜을 믿는 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다 이루어질 것이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 사도 바울의 마음은 고요했습니다. 

여기에 위대한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당황합니다. 쫓아오는 사람이 없어도 괜히 불안합니다. 잠언 28:1 “악인은 쫓아오는 자가 없어도 도망하나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니라”

 

믿지 못하는 분들의 특징은 변명과 남에 대한 핑계가 많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믿고 바라보기에, 내 생각이나 내 지혜와는 다르지만 이 풍랑을 통하여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큰 뜻이 이루어지리라고 믿기 때문에 안심하는 것입니다. 

오늘 나에게 일어나는 그 많은 사건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편에서 보면 오직 하나, 헛된 믿음을 다 버리게, 그리고 참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손해 보았다면 내 잘못된 믿음 고쳐주시느라고 있는 일입니다. 

못 믿을 것을 믿고 있고, 믿어서는 안될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바른 믿음의 세계로 인도하시기 위하여 사건은 터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풍랑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십니까?

지금 여러분들이 겪는 이 풍랑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경륜을 결코 무너뜨릴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 이것을 믿는 한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의 마음은 언제나 고요합니다.

그러나 불신앙의 사람들은 격동합니다. 벌벌 떱니다. 소란을 피웁니다. 

떠든다고 해결이 됩니까? 밑으로 내리달을 뿐입니다. 

이 풍랑, 이 격랑 속에서 우리는 조용히 주님의 음성을 들어야 하겠고, 주님의 뜻을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이 이 일을 통하여 무엇을 이루려고 하시는지 조용히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425장

 

오늘의 성경 본문 39절을 봅시다.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꾸짖는다는 말을 원문에서 찾아보면 ‘에피티메센’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 단어는 귀신을 내어 쫓을 때 사용된 단어인데 이것은 비타협적인 용어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풍랑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습니다.

명령합니다. “잠잠하라, 고요하라”

내가 풍랑 속으로 휘말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고요함으로 격랑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격랑을 밀어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초연한 모습입니다. 

 

초기 기독교 신학자 터툴리안은 말했습니다. 

“교회는 배요, 세상은 격랑하는 바다이다.” 

항해 중에 배는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친히 세우신 교회는 절대고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귀한 뜻이 그 배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의 힘은 고요에 있고, 그 속에서 확증이 됩니다. 

이제 주님은 우리들에게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믿음을 가지고 다가오는 풍랑을 고요함 가운데 맞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이 평화, 이 고요함 속에 능력이 깃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고요한 중에 고요가 아니라 풍랑 속의 고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풍랑 속에서도 조용함을 찾아 쉬시던 주님의 그 위대한 능력을 찾아야 합니다. 

고요함 속에 고요함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때에 고요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은 어디에나 고요함이 있습니다. 

풍랑 속에도 그리스도가 계시면 고요하고, 고요한 바다에도 그리스도가 계시지 않으면 전쟁과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세상을 이기신 예수와 동행함으로 풍랑이는 이 세상 속에서도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shalom, 평강을 누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에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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