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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리를 가는 마음(마태복음 5:38-42)

   

 

    마태복음 5:38-42, 십리를 가는 마음, 218장

 

다니엘 2-8장

 

현대인으로서 성공을 하려면 몇 가지 조건이 있어야 하는데 먼저 지능이 좋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머리로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좋은 지식을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이 있어야 합니다.

자동차를 예로 들면 아무리 좋은 자동차가 있고 차에 대한 지식이 있어도 차를 운전하는 기술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운전기술이 없으면 사실 그 차와 나는 아무 관계도 없는 고철덩어리에 지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능, 지식, 기술 이 세 가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세입니다. 

태도와 자세 곧 마음가짐이 문제입니다. 

목적도 중요합니다마는 그 목적에 따르는 내 삶의 자세가 중요합니다. 

같은 환경, 같은 처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직업, 같은 모양으로 사는 것 같으나 전혀 다릅니다. 

마음가짐에 따라 한 사람은 낙원에 살고 한 사람은 지옥에 삽니다.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하겠습니다. 

 

첫째는 죽지 못해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흔히 말해서 팔자려니, 운명이려니 하고 하루하루 억지로 살아갑니다. 

그 아까운 시간들을. 그 많은 시간들을 그렇게 흘려보내며 살아갑니다. 

똑같은 생을 사는데도 이렇듯 억지로, 부득이해서, 할 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딱한 인생들입니다. 

그런가하면 형벌의식에 매여서, 매맞을까봐, 벌받을까봐, 두려워서 덜덜 떨면서 삽니다. 이런 분들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도 그 다정한 하나님을 무서워하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보상을 바라고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아이들 잘 키워 놓으면 효도하겠지, 좋은 일 하면 좋은 일이 오겠지, 사랑을 하면 사랑해 주겠지, 하고 항상 투자의식을 가지고, 상 받을 마음으로, 보상받을 마음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랬다가 보상이 주어지지 않으면 원망하고 불평하고 투덜댑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상대방의 반응에 민감합니다.

 

세 번째는 존경과 사랑과 감사로 살아가는 자세입니다. 

오늘도 일할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일이 주어졌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 나로 하여금 이만한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회사에도 감사하고, 그래서 아무튼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가가 얼마냐고도 따지지 않습니다.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일이 있는 것 자체가 그냥 기쁩니다.

그 일이 나에게 소중한 일이므로 즐거운 마음으로 일을 해 나가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이란 죽지 못해 살아가던 사람이 사랑과 감사로 살아가게 되는 과정이어야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그 유명한 산상수훈입니다. 

기독교인의 윤리, 기독교인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 들을 때, 저는 이런 높은 윤리적 규범은 사람들은 지킬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은 지키지는 못해도 이 정도 윤리의식은 

가지고 살아야 한다, 이렇게 이해했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냥 우리들에게 높은 기준만을 제시했다고 생각했던 

이 말씀이 신앙생활의 연륜이 쌓여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현실적이고 확실한 율법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크리스찬들이 지켜야 할 윤리의 스탠다드입니다. 

 

우리 나라 속담 중에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속담이 있는데 이 말 아주 잘못된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쳐다 보기라도 해야 올라갈 때가 있지 않겠습니까? 

못 올라갈 나무라 해도 쳐다는 보아야 언젠가는 올라갈 수가 있는 것이지 쳐다보지도 않는 사람에게 어떻게 올라가는 오겠습니까? 

 

보십시오. 속옷을 달라고 하거든 속옷만이 아니라 겉옷까지 내 주어라, 

내가 길을 모르니 오리만 좀 가주세요, 하거든 십리를 같이 가주어라. 

이거 통하는 이야기입니까? 요즈음 세상은 내 것 빼앗기지 않으려고 기를 쓰고,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더 나아가 남의 것도 그저 할 수만 있으면 갈취하려고 듭니다. 이렇듯 무서운 세상인데 어떻게 달라고 하지도 않은 것까지 남을 주라 하십니까?

그러나 오늘 들은 이 윤리적 계명을 지키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우리들의 삶의 책임져 주시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자유를 주시는 것입니다. 제가 그걸 깨달았습니다. 아하, 이 윤리적 명령을 우리가 지키면 자유를 얻고 세상이 주지 못하는 평강을 누리게 되는 거구나. 

 

야고보서 1장 25절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말을 씁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해석입니다. 

이 구절을 길게 풀이하면 로마서가 되고 갈라디아서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법이라 하면 ‘속박’을 의미합니다. 

법이 싫은 것입니다. 귀찮고 괴로운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개념이 그러했습니다. 

이유야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튼 그들은 율법을 ‘속박’으로 느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율법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사람을 자유케 하는 것이다.’는 획기적인 발언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옭아매려는 것이 아니라 참자유를 주시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지키는 자에게는 자유를 선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참된 그리스도인의 해석입니다. 

 

보십시오.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까지 가라. 무슨 말씀입니까?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을 잘 모르는데 좀 같이 가주세요, 하는데 이거 거절하기가 마땅치 않습니다. 그래도 내가 가야 할 당위성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잘 대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그래 갑시다’, 하고 가주었습니다.

우선 일의 발단은 자발적으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리까지 가서 보니 이 사람, 이제부터는 내가 찾아가겠습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길을 잃어버리기 쉽겠어요. 그래서 이 사람이 말하기를.

좋습니다. 당신이 나에게 요청한 것은 오리까지지만 십리까지 가드리겠소, 

이제부터는 내가, 내 마음으로 가겠소. 합니다. 

바로 이 마음입니다. 처음에는 억지로 수동적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자발적으로 능동적으로 내가 선택해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자 분을 보니까 좌우간 삼년 동안이나 남자가 따라다니면서 결혼해 달라고 조르는 통에 지금의 남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결혼하고부터는 좌우간 남편한테 일생동안 그 말미를 우려먹는 것입니다.

말끝마다 ‘당신이 하도 쫓아다녀서 결혼해 주었더니 이게 뭐예요?’합니다.

저는 이런 말하시는 분들 참 불쌍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 결혼을 그렇게 끌려서 하는 겁니까? 

누가 뭐라 해도 그 처신은 노예적입니다.

시작은 그렇게 했다 치더라도 결혼한 날 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제는 내가 당신을 선택한 것이요. 이러고 살아야지.

처음 시작이 어떻든지간에 이제부터는 자발적으로 동기전환을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자세를 바꾸어야 합니다. 

시작은 억지로 했지마는 이제는 자발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고, 이 자유함에 행복이 깃들고, 능률이 솟아오르는 것입니다. 

그 뿐 아니라 처음 오리 가는 동안에는 그것은 남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 다음 자진해서 십리까지 갈 때에는 이것은 나의 일이 됩니다. 

거기에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시골에 가면 품앗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품앗이’라는 것은 우리 밭에 씨를 뿌리거나 김을 매야겠는데 나 혼자서 따로 하기에는 너무 힘이 드니까 이웃사람들을 불러서 같이 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와서 우리 집 일을 거들어 주었으면 나는 또 그 집에 일이 있을 때 가서 품을 갚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로 품을 지고 갚고 하는 것을 품앗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하는 것이 내 집 일 할 때 다르고, 남의 집 일할 때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집 일이나 남의 집 일이나 똑같은 마음으로 하느냐 다른 마음으로 하느냐, 에 따라 인생이 달라집니다. 

남의 밭 일이든 내 밭 일이든 똑같이 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기독교인의 기본자세입니다. 골로새서 3: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시작은 억지로 할 수 있지만 마침내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바꾸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떤 기업이 성공할까, 어떤 사람이 성공할까, 어떤 기술이 좋을까,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합니다마는 앞으로도 창의적인 사람이 성공합니다. 

남 흉내나 내고, 뒤꽁무니나 쫓아가고, 억지로 끌려가서는 살아남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창의력이 아니고는 미래에는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행복한 마음으로 일할 때 창의력이 생깁니다. 

음식 한 가지를 먹어도 먹는다는 형식은 같지만 맛있게 먹는 사람과 억지로 먹는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똑 같은 일을 같은 장소에서 하는 것 같으나 그 마음의 자세가 어떠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리 가자고 하지만 나는 십리까지 간다, 바로 이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살다보면 강요된 현실과 맞닥뜨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는 강요당한 일로 여기지 맙시다. 

내 마음의 변화가 먼저입니다.

오리를 가자고 부탁합니까? 십리를 가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속옷을 달라고 합니까? 겉옷까지 주는 마음으로 삽시다. 

십자가란 기쁨으로 진 자에게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억지로 지는 십자가는 더 이상 십자가가 아닙니다. 

순교자는 죽을 때 기뻐하고 감사해야지 순교자지, 죽음에 대해서 원망하거나 ‘속았다’하고 죽는다면 그것은 순교가 아닙니다. 

우리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리를 가자 하는데 십리까지 가는 바로 그 마음이라야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십리를 가는 그 마음으로 주님 주시는 그 엄청난 자유와 창조적 능력을 얻어 주님 주시는 복락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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