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왜 의심하였느냐?(마태복음 14:22-33)

   

 

     2-48장

 

 왜 의심하였느냐?, 마태복음 14:22-33, 370장.

 

어릴 때 볼록렌즈로 종이를 태워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그냥 태양빛은 

종이를 태울 수 없지만 볼록렌즈를 통해 집중되면 종이를 태웁니다. 

화살촉이 무디면 그 화살은 과녁을 뚫을 수 없습니다. 

집중력을 잃어버린 운동선수는 경기장에서 퇴출되고 맙니다.  

어떤 현직 교사가 쓴 “넌 죽어라고 공부하니? 난 집중해서 공부한다!”라는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공부 잘하는 학생과 못하는 학생을 비교할 때 가장 큰 차이는 바로 집중력의 차이라고 말합니다. 

대한민국 아줌마의 힘도 바로 집중력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목표에 집중하기 때문에 아줌마에게 다른 것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외에는 다른 것이 보여서는 안 됩니다. 혹시 다른 것이 보이시는 분은 이 시간 이후에는 진실로 진실로 예수에만 집중하시기를 바랍니다. 

 

한 여성이 20대 초반에 결혼을 했습니다. 그런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그만 남편이 죽고 말았습니다. 그 당신 임신 중이었던 여인은 유복자로 딸을 낳았습니다. 

청상과부가 된 여인은 혼자 시장에서 온갖 장사를 해가며 딸을 길렀습니다. 

그 어머니의 희생 덕분에 딸은 대학을 나오고 유학까지 다녀오게 되어 마침내 어느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딸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짜증스러운 일이 생기면 모든 것을 어머니에게 다 쏟아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는 말없이 딸의 이런 투정을 모두 받아주었습니다. 희생과 인고의 세월을 산 어머니의 모습이었습니다. 

딸도 나이를 먹고 가정을 이루고 40을 훌쩍 넘겼습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문득 늙은 어머니를 보고 있던 딸의 마음에 어머니에 대한 감사의 정이 치솟았습니다.

‘만일 어머니가 없었다면, 오늘의 나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찌기 홀로 된 어머니가 허리띠를 졸라매고 장사하여 입히고 먹이고 키워주셨는데, 어머니가 어렵게 학비를 대주셔서 유학도 하고 공부를 마칠 수 있었는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온 몸을 던져가며 문제를 해결해주셨는데…’

갑자기 어머니 없는 자신의 인생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을 깨달은 딸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니,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다 사 드릴께요.”

“나는 네가 잘 되는 것이 큰 기쁨이야.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치 않단다.”

어머니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딸이 계속해서 물어보자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주일에 교회 가는 것이 쉽지 않구나. 나를 교회까지 태워다주지 않으련? 돌아올 때도 문제가 되니깐 나와 같이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면 좋겠다.”

형편이 넉넉해지자 강남으로 이사해서 자연히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에서 

멀어졌고 교통편도 불편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 않아 딸은 그렇게 하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까지 딸도 그 교회를 다녔습니다. 

그런데 공부를 핑계로 그 후 교회에 다니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 나가자 많은 사람들이 모녀를 환영했습니다. 

“권사님의 오랜 기도가 드디어 이루어졌군요”라고 인사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목사님도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권사님의 따님이 오늘 이 예배에 나오셨습니다. 환영합니다.”

예배를 마치고 휴게실에서 잠시 쉬고 있을 때 딸과 동년배쯤 되어 보이는 여성들이 옆에서 수다를 떨기 시작했습니다. 듣고 싶지 않았지만 너무 크게 떠드는 바람에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모두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서로 헐뜯는 내용이었습니다. ‘믿는 것들도 별 수 없군.’

불쾌한 기분으로 자리를 뜬 딸은 2층 통로 쪽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 장로라는 사람이 그녀를 찾아와 자기 아들의 기부 입학을 청탁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녀는 화가 치밀었습니다. 

평소에 적어도 대학만큼은 공정하게 실력으로 가야한다는 소신을 가진 그녀로서는 돈 있는 자들이 더하다는 생각에 치가 떨려왔습니다. 심지어 예수를 믿노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싶었지만 그녀는 체면상 화를 참고 또 참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옆 회의실에서 싸우는 소리가 바깥까지 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회의를 하는 모양인데, 생각이 어찌나 다른지 꽤 심각한 싸움이 되는 것 같았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입에 담는 말들이 세상 사람들도 잘 쓰지 않는 심한 욕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습니다.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간신히 억누르고 어머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의 손을 잡아끌고 나오려고 했습니다.

“어머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마세요. 일요일이면 내가 더 좋은 곳으로 모시고 다닐 테니, 다시는 교회에 오지 맙시다.”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가 물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머니는 화를 내거나 딸을 혼내는 일이 거의 없었는데 그때만큼은 어머니의 태도와 표정에 예전에 보지 못했던 단호함이 서려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단호함에 주눅이 든 딸은 지금까지 있었던 자초지종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평생 교회를 다니면서 예수님만 봤는데, 너는 교회에 딱 하루 나와서 참 많은 것을 보았구나.”

이 말에 딸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무식한 어머니가 아무 의미도 목적도 없이 그저 교회에 다닌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입니다. 

소위 복만 비는 기복 신앙의 소유자인 줄만 알았던 어머니의 말과 태도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자기와 비교할 수 없는 높은 수준의 신앙심이 느껴졌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처럼 문제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만을 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오른쪽을 보는 사람은 오른쪽으로 갑니다. 그리고 왼쪽을 보는 사람은 왼쪽으로 갑니다.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습니까? 지금 현재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곳이 자신의 미래입니다. 보는 것이 여러분들의 미래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오병이어 이후에 “갈릴리 바다”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벳새다 언덕에서 말씀을 마치고 모였던 군중들을 돌려보내려고 하는데 배가 고플 것 같아서 어린아이가 가지고 온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거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시는 기적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곳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아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저들을 보내는 동안에 너희는 먼저 배를 타고 가버나움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제자들이 풍랑을 만나 고생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이 찾아오셔서 풍랑을 잔잔케 해 주셨다는 말씀이 오늘 본문의 말씀입니다. 이 일은 2000여 년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있었던 사건이지만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영적인 진리, 하나님의 교훈이 무엇인가를 생각 하면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그런데 24절 “물결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더라”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예수님이 지시한 곳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입니다.

이들이 이렇게 풍랑을 만나 고생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잘못된 길을 가다가, 하나님을 저버리고 딴 길로 가다가 풍랑을 만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에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을 따라가도 이런 어려움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지시하신 곳으로 가다가도 풍랑을 만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런 풍랑을 통해서 저들을 더욱 강하게 하시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경건의 훈련을 시키고 계심을 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게 살아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세상입니까?

연약해서는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풍랑을 통해서. 여러 가지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온전하게, 부족함이 없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바람을 통해서. 때로는 풍랑을 통해서 믿음이 자라고 영력이 자라게 하심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체력도 마찬 가지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체력이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 육체의 힘을 기르기 위해서도 많은 땀을 흘려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식을 갖기 위해서는 책과 씨름을 해야 

지식을 향상 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지 않고서는 신앙이 자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최고의 조각가입니다. 그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바위 안에 아름다운 천사가 갇혀 있거든요. 그 천사를 밖으로 꺼내려고 애쓰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바위에서 천사의 모습이 드러날 때까지 우리를 빚고 계십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은 한결 같이 이런 훈련들을 통해서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셔서 하나님이 쓰셨던 것을 봅니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하나님께 부름받자 마자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많은 실패와 연단을 통해서 최종적으로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상에서 하나님께 올림으로 하나님이 그를 인정해 주셨습니다.

요셉도 그랬습니다. 집안에서 사랑만 받고 살았다면 그는 꿈을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고,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게도 되는 여러 가지 훈련을 통해서 요셉을 믿음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마침내 

국무총리의 자리에 서게 하셔서 그 아버지와 형제들을 구원케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풍랑을 만나게 하시는 것도 고생하라고 풍랑을 만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모든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영적인 믿음을 소유하게 하시기 위해서 풍랑을 허용하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2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1:4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나를 하나님이 쓰시기에 온전하게 만드시기 위해서. 구비하여 부족함이 없게 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나를 훈련시키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주님은 찾아 오셔서 위로와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오늘 본문 25절에 보면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라고 했습니다. 밤 사경은 우리 시간으로 새벽 3시에서 6시입니다.

가장 어두운 때가 바로 이때입니다. 동트기 전이 가장 어두운 법입니다. 

그들은 초저녁부터 풍랑에 시달렸으니 아마 지칠 대로 지쳤을 것입니다. 

죽을 것만 같은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 오십니다.  

그리고는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말 한 마디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이렇게 세상에 여러 가지일로 씨름하고 있는 우리 곁에 찾아 오셔서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위기 속에서 물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제자들이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인가하면서 놀랐다고 했습니다. 

이게 참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몇 년을 같이 다녔고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과 함께 먹고 마셨던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쉽게 이해가 됩니까? 

그러나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또한 극한 상황에 서 있을 때 주님이 오시면 우리는 그 주님을 알아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는 문제입니다. 

극한의 위기 앞에서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에는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폭풍 속에 있을 때, 실망과 좌절 속에 있을 때, 고난을 당할 때 믿음이 없으면 예수님이 오시는 것도 모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우리들의 믿음의 한계인지도 모릅니다. 어쩔 때는 대단한 것 같은데, 자기의 목숨까지도 내어 놓는 믿음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때는 어린아이같이 연약한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본문 29-32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자기도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걷겠다는 것은 믿음이었습니다.

믿음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1: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믿음은 때로 엉뚱한 발상입니다. 믿음은 물리적 현상과 자연적 현상을 뛰어 넘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계산하지 않고 하늘 계산법에 맞추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이라야 기적을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믿음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베드로는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그만 바다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믿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내 의심으로 바뀐 것입니다.

여기 아주 중요한 포인트가 있습니다. 기적은 믿음으로 일어납니다. 그런데 기적을 겪으면서도 믿지 못하고 의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물에 빠져서 무서웠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지기 전에 이미 바람을 무서워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할 때는 바람을 무시했습니다. 물위를 걷는데 바람은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 베드로가 예수님을 바라보고 걸을 때는 물 위를 걸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바람이 부니까 예수님을 보지 않고 밑을 봤습니다. 그러자 주님의 능력이 아닌 자기의 능력을 본 것입니다. 

물위를 걷는 자신을 발견한 것입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을 의심했습니다.

이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사단은 우리의 믿음을 무력화시키기 위해서 나 자신을 보게 만듭니다. 끝까지 주님을 봐야 합니다. 

우리가 기적을 체험하는 믿음과 의심은 종이 한 장 차이입니다. 

눈을 주님께 맞추다가 아래를 내려 보는 것은 잠간입니다. 아래를 보지 마십시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십시오. 끝까지 주님만 바라봅시다.

어떤 바람이 불어도, 좌우에서 별 소리가 들려도 주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거두면 안 됩니다. 끝까지 주님만을 바라보는 자가 승리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만을 바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환경을 본다거나 사람을 보면 자기도 모르게 믿음이 떠나가고 시험이 들고 두려움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져서 배에 오르셨고, 예수님이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습니다. 이와 같이 주님과 동행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다. 

주님께 시선을 고정하면 홍해가 갈라지고, 눈먼 자가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듣게 되는 놀라운 일들을 목도하시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을 바라봄으로 

슬픔 많은 이 세상을 천국으로 바꾸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