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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받으리라(마태복음 21:18-22)

   

 

     예레미야 7-13장

 

다 받으리라, 마태복음 21:18-22, 235장

 

신앙생활은 어떤 면에서 상을 기다리는 경주자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상을 받아 보지 못하신 분들이 하시는 말씀, 신앙 생활은 마음의 평안,

죽어서 하늘 나라, 그러신 분들은 신앙 생활의 반밖에 모르시는 겁니다.

저는 우리 새하늘 교회 교우 모든 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상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 교향인 나사렛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고을에서는 큰 기적을 행하셨던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소수의 병자만 고치실 뿐 큰 권능을 행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이 나사렛에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었을까요? 

나사렛은 예수님이 자라난 고향마을입니다. 나사렛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과 직업에 비추어 예수님을 바라보며 존경하지 않았습니다. 

존중하는 마음이 없는 그들 앞에서는 예수님도 권능을 행하실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 누가 손해입니까? 예수님입니까? 고향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은 존중의 법칙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무엘상 2:30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 원리는 오늘도 변함없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하세요? 상을 받기 원하세요? 

그렇다면 먼저 예수님을 존중하시기 바랍니다. 

 

No pain, no gain. 만고의 진리의 말씀입니다. 

희생없이 되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것은 신앙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목회를 하면서 점점 더 확신을 갖게 되는 것은 투자 중에 가장 좋은 투자는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9장 이하를 보면 부자 청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의 대답은 선한 일이 아니라 우선순위에 관한 문제. 

더 나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희생을 감수해야 합니다. best, second level의 삶

그러할 때 비로소 새로운 생명의 역사, 은혜의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부자 청년은 많은 재물 때문에 그냥 돌아갑니다.

재물만이 아닙니다. 오늘은 사업상 꼭 만나야 할 사람, 빠지면 안될 학원.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시다가 시장하시어 

무화과 나무를 보고 열매를 먹으려고 갔지만 아무런 열매도 없는 것을 보시고는 저주를 하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19절 말씀을 보세요. “길 가에서 한 무화과 나무를 보시고 그리로 가사 잎사귀 밖에 아무 것도 찾지 못하시고 나무에게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네게 열매가 맺지 못하리라 하시니 무화과나무가 곧 마른지라.” 

주님의 저주로, 그 자리에서 그 무화과 나무는 말라 버렸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하신 일을 보게 되면, 어떤 면에서는, 좀 너무하신 것 아니냐? 라는 생각이 듭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이 이렇게 극단적인 반응을 보인 예가 두 군데 나옵니다.  공교롭게도 이 두 번의 모습을 이 마태복음 21장에서 다 발견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건은 12절 이하에 나타난 성전 정화 사건입니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성전 정화 사건은 공생애 말기, 고난 주간 중 월요일에 행해진 사건입니다. 

시대마다 그 사회를 지배하는 정신적 가치체계가 있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두 가지 정신적 가치체계는 

자유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 당시 유대인의 삶을 지배하는 두 가지 기둥은 모세오경으로 대표되는 율법과 성전 중심의 삶이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의 삶의 근간이 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삶의 원리가 모두 율법으로부터 나왔습니다. 613가지.

 

그리고 성전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집입니다.

성전은 천막으로 지었든지, 아니면 돌이나 황금으로 지었든지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으로 지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전 안에 하나님께서 계시느냐 아니 계시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과의 만남의 장소요, 속죄 받는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삶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어도 일 년에 한 차례 이상은 성전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전이, 장사치들이 모이는 시장터가 되어 있었습니다. 

소를 팔고, 양을 팔고, 비둘기를 팔고, 또 이런 거래를 하기 위해 환전을 

하는 등, 성전에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처음에는 좋은 의도로 하였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흠없고 정결한 짐승을 희생 제물로 바쳐야 했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에서 오는 자들이 그런 짐승을 가져 오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불편을 덜어 주기 위하여 성전에서 짐승을 팔고 사게 되었습니다. 

또한 만 20세 이상의 유대 남자들은 반세겔의 성전세를 납부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이를 위하여 로마나 헬라의 화폐를 세겔로 환전해 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선의의 목적에서 비롯된 관행이 점차 부패하고 말았는데, 

제사장들이 특혜를 주어서 특정 장사치들에게만 허락해 주었습니다.

더 나아가 바친 제물들을 다시 파는 행위까지 서슴지 않고 행했다고 합니다.

사람들의 편의를 위해서 행하여지던 것들이 필요가 본질을 삼켜버려, 

경제적 이윤 추구가 주된 목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항상 묻고 또 물어야만 합니다.

나는 지금 바로 가고 있는가? 내가 지금 하나님 앞에서 옳은가?

만일 그리스도인에게 매일 이런 질문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세상의 방법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에 대해서, 공동체에 대해서, 끊임없이 지금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질문해야만 합니다. 

 

이때 주님의 반응은 진노하셨다는 겁니다. 

환전상을 둘러엎으시고, 소와 양과 비둘기들을 채찍으로 때리며 다 쫒아내셨습니다. 평소의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평소에는 온유하시고, 인자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으로 비춰졌는데, 성전에서 보여 준 주님의 모습은, 이와는 정 반대의 모습이었다는 겁니다. 

그러면 왜 주님은 이처럼 성전에서 진노하셨던 것입니까? 

성전의 기능을 상실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장사하는 집’이 되어버렸고, ‘강도의 굴혈’이 되어 버렸습니다. 

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으로 유지되는 곳. 그런 면에서 한국의 교회는 모범

 

그리고 두 번째 진노하셨던 사건이 바로 오늘 본문에 나타난 무화과 나무의 저주 사건입니다. 주님이 시장하셔서 그 나무에게 열매를 구했지만 열매를 얻을 수 없었습니다. 마땅히 있어야 할 열매가 없을 때, 그 나무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아 말라 죽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런 사건을 동시에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고, 그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우리 또한 주님으로부터 이런 진노하심을 당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 무화과나무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주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는 교회는, 반드시 성도들이 축복을 받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린 것과 주님이 말씀하신 기도에 대한 교훈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성도들의 축복에 대한 열쇠가, 바로 이 말씀 속에 나타나 있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가 곧 모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축복의 열쇠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냥 기도가 아니지요? 어떤 기도입니까? 믿음의 기도입니다.  

누구를 믿는 믿음입니까? 주를 믿는 믿음입니다. 

주를 믿되, 확실히 믿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의 기도, 바로 이것이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과 예루살렘 교회와사도들의 차이점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은 어떤 기도를 드렸습니까? 

회당 문에 서서 남들에게 보이기 위한 외식적인 기도를 했습니다.

결국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아니한 채로 무너지고 말았지 않았습니까? 

인생도 결국 그와 같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새롭게 시작된 예루살렘 교회는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섬겼던 제자들이나 사도들의 기도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었고, 또 골방에서 기도할 때마다 성령님과의 교통함이 있었습니다. 

교회 내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누구랄 것도 없이 무조건 엎드려 기도했습니다. 온 성도들이 합심해서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정말 예루살렘 교회에 어떤 역사들이 나타났습니까?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던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게 나타나는 

교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질병이 나았습니다. 귀머거리가 듣게 되고, 소경이 눈을 뜨게 되며, 앉은뱅이가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걷게 되었습니다. 

인생에 나타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이, 다 기도로 해결되어지는 놀라운 역사가, 예루살렘 초대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었다는 겁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저는 우리 교회가 바로 이런 기도의 응답이 일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모든 능력의 시작은 기도입니다. 

다니엘 9:23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오늘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이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힘써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기도와 전도를 통해 이 아름다운 성전이 채워지고 

삶 속에서도 말할 수 없는 놀라운 축복의 역사가 나타나게 되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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