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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의 소명(이사야 6:1-8)

 

 

     이사야 45-51장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 6:1-8, 183장

 

내일 월요일, 10월 9일은 577번째 맞이하는 한글날입니다.  

우리는 조상을 잘 둔 덕분에 한글이라는 독특한 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이렇게 순수한 자기 문자를 가지고 있는 나라들이 많지는 않습니다. 

브라질이 축구는 잘하지만 포르투칼어를 쓰고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를 씁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은 페니키아 문자의 근간인 알파벳을 약간씩 변형시켜서 자기 나라 말을 만들었습니다. 

영어, 프랑스어, 이태리어, 스페인어, 러시아어

이슬람은 아랍어로 통일

그런데 우리 나라는 세종대왕께서 한글이라는 아주 우수한 문자 체계를 

만들어서 우리에게 전해 준 것입니다. 

그 기본이 잘 나타난 곳이 훈민정음 언해본입니다. 

 

나랏 말쌈이 뒹국에 달아 문자와로 서로 사맛디 아니할 새

이런 전차로 어린 백성이 니르고저 할 배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시러펴디 못할 놈이 하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 여덟 자를 맹가노니

 

이런 훌륭한 한글이 사대주의자들에 의하여 언문이라고 불리면서 무시받고 잘 쓰임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1893년 1월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모든 문서는 한문을 섞지 않고 순전히 한글로 인쇄한다”는 방침을 정했습니다. 그후 1911년 신구약 전체가 한글로 번역돼 ‘성경젼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이듬해 6월 영국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열린 세계 선교사 대회에서의 

보고서 내용 “아마 한국어 이외의 어떤 언어도 그렇게 짧은 기간에 기독교적 사상과 용어를 쉽게 옮겨 적을 수 있었던 언어는 없었을 것이다”

당시 한글의 보급 전파의 일등공신은 외국인 선교사들과 국내의 기독인 학자들이었습니다. 조선총독부는 1940년 이후 교회에서도 일본어로 설교하도록 지시했지만 교인들은 계속 한글 성경과 찬송가를 사용해 예배들 드렸다고 합니다. 참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게다가 한국 사람들은 모이면 먼저 교회가 세워집니다. 

참으로 복받은 민족입니다. 

 

복하면 우리는 보통 좋은 집, 좋은 옷, 좋은 차 같은 복된 여건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복이라는 것이 어떠한 여건이 주어지기만 하면 다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관심은 그런 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복된 사람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복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고 즐길 줄 아는 사람입니다. 

복된 사람은 어떠한 여건에서도 어디서든지 스스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예들 들어서 말씀드리자면 좋은 음식이 주어지는 것과 좋은 입맛, 이 둘 중에서 하나를 택하라면 저는 입맛 쪽을 택하겠습니다. 입맛만 있으면 어떤 음식도 좋은 음식으로 바꾸어버립니다. 

없어서 못 먹는 사람보다 있어도 못 먹는 사람이 정말 불쌍한 사람입니다.

고급 음식을 앞에 놓고도 소화가 되지 않아 빈 수저만 올렸다 내렸다하고 있으면 그보다 더 딱한 일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의 입맛이 좋겠습니까? 일하는 사람이라야 입맛이 좋습니다. 노동을 하는 사람, 열심히 일한 사람만이 음식을 즐길 수 있습니다. 

건강해서 일합니까? 아닙니다. 일해서 건강한 것입니다.

공짜로 얻어지는 것은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합니다. 

가지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벌어야지요. 땀 흘려서 내 손에 넣을 때, 거기에 뿌듯한 즐거움이 있는 것입니다. 

재벌 아버지가 자식에게 많은 돈을 물려줄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돈을 벌면서 얻은 행복만은 물려줄 수가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알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까? 공부해야 합니다. 스스로 공부하면서 깨닫고 즐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해 놓으신 복이 있고, 복된 길로 향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이 과정을 통과하지 않고는 그 복을 즐길 수도 없고 복의 가치를 지켜나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40일 동안을 금식하신 후에 사단이 와서 시험을 합니다. 그 시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돌로 떡을 만들어라,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천하만국과 그 영광을 줄 테니 내게 절을 해 보아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시험에서 사단이 애써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쉽게 얻으라는 말입니다. 뭐 힘들게 수고할 필요 없다, 쉽게 얻어라. 

우리도 쉽게 가라고 하는 시험을 얼마나 많이 받습니까?

그러나 성공에는 지름길이 없습니다. 공부에도 왕도가 없습니다.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행복으로 통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영국의 일간지 ‘런던 타임지’가 ‘어떤 사람이 가장 행복한 사람일까?’라는 

제목으로 현상공모한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저마다 이런 사람이 행복할거다, 저런 사람은 행복할거다 하고 나름대로 행복의 정의를 내려보았습니다마는 세 가지가 제일 많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모래성을 완성한 아이들의 기쁨이라고 합니다. 

바닷가에서 나름대로 모래를 가지고 성을 만들어 놓고 다 만들어 놓았을 때 환호를 하면서 기뻐하는 그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이제 물이 들어오면 다 없어지고 말 것이지만 아이들은 그 순간만은 천하를 얻은 것 같은 행복을 느끼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기 아이를 목욕시키고 난 어머니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목욕을 시켜 놓고 그 깨끗하고 티없는 아이들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면서 기뻐하는 흐뭇한 행복이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어려운 수술을 성공하고 막 생명을 구했다고 하는 기쁨을 느끼는 의사가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행복이란 보람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무엇인가를 완성했을 때, 보람있는 일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한 일을 성취했을 때 그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행복입니다. 

그 행복이 순간적이고, 오래 가는 것이 아닐찌라도 인간이 누릴 수 있는 행복이 바로 이런 것들에 있다 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과거형이 아닙니다. 행복했었다, 불행한 일입니다. 

행복은 또한 미래를 지향하면서 언젠가는 행복해 질 거다 하는 것, 또한 행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현재형입니다. 

현재를 즐기는 것입니다. Here & Now, 지금 바로 여기, 내가 하고 있는 이것, 내가 만나는 이 사람, 거기에 행복이 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은 이사야 소명장으로 유명합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소명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시야 왕의 죽던 해에...’ 

그 웃시야 왕에 대해서는 생각을 좀 해 보셔야 합니다. 

이스라엘, 유대의 왕들 가운데는 좋은 왕, 나쁜 왕, 하나님을 잘 섬긴 왕,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 변질된 왕, 하나님을 욕되게 한 왕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웃시야 왕은 하나님을 잘 섬긴 왕에 속합니다. 중간에 제사장의 일을 대신 하려다 문둥병에 걸리기도 하였으나 이 웃시야 왕은 유대 왕이 되어서 무려 52년 동안을 통치했습니다. 반면에 북이스라엘은 무려 5명의 왕(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 베가)이 교체되었습니다. 52년 동안을 왕위에 있으면서 나라를 평정함으로 나라 안팎이 조용하고 평화로왔습니다. 

그런 웃시야 왕이 이제 죽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 합니다. 

이 다음은 또 어떤 왕이 나와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릴 것인가? 걱정이 많았습니다. 바로 이 순간 이사야는 이 문제를 가지고 성전에 들어갑니다. 저는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상당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어디로 가십니까? 누구한테 이야기 합니까?

오늘 이사야는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좀 좋지 않은 이야기입니다만 텔레비전에 나오는 우리 나라 드라마들을 가끔 보면 뭐 실연을 당한데든지 회사에서 상사와 부딪히는 그런 좋지 않은 일들이 생기면 으레 술마시는데로, 포장마차로 갑니다. 

포장마차에 가서 맘껏 퍼마시고 마지막에 업혀 나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습니다. 고민이 있을 때 고민을 푸는 방법이 이것밖에 없나요? 이것이 우리의 문화입니까?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사노라면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사업상이든 개인적이든 어떤 문제든 문제가 있습니다. 그런 때에 먼저 예배당으로 나옵시다. 혹 몸이 아파서 병원에 수술하러 가는 길입니까? 수술 받으러 가기 전에 먼저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시험을 치러가기 전입니까? 꼭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중요한 계약을 앞두고 계십니까? 꼭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가시기 바랍니다.  

이사야가 국가적으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다는 것 자체가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사야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보고 그 다음에는 자기가 무엇을 하여야 할지 자기에게 주어지는 사명을 보게 됩니다. 

이 세 가지를 인지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야 이사야는 이제 깨닫습니다. 

‘내가 죄인이구나, 내 입술이 더럽다, 하나님의 영광 앞에 비춰보니 나는 죄인이구나’

세상에서는 남보다 더 낫고 깨끗하고 의롭다고 했는데 하나님 앞에 딱 서보니 그게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5절과 같이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특별히 그가 죄 됨을 말씀하는 중에도 입술이 부정하다는 말씀을 합니다. 

 

민수기 20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원망할 때 이 원망하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모세가 실수를 합니다.  

시편 106:33 “이는 그들이 그의 뜻을 거역함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그의 입술로 망령되이 말하였음이로다”

모세가 망령되이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말했는가 하면 ‘반역한 너희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말로 쉽게 번역하면 ‘망할 자식들아’쯤 됩니다. 

이 한 마디로 인하여 ‘너는 가나안에 못들어간다’ 하시는 심판이 내려집니다. 말 한 마디가 참으로 무섭습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말조심해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고도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이란 그 마음 속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잠재의식 깊은 곳에 있다가 쑥 나오는 것이란 말입니다. 

나도 모르게 쑥 나오는 말, 그것이 바로 나의 본심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나는 입술이 부정합니다. 그런고로 망하게 되었습니다.’ 천사가 그 제단에 있는 숯불을 입술에 댑니다. 쉽게 말하자면 입을 지져버린 것입니다. 

제단에서 지져진다는 의미는 제단에서 내가 죽는 것을 의미합니다. 

입술을 대는 동안 입술이 지져지면서 내 못난 자아가 죽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자아가 죽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초대교회에 오순절 성령강림 후 있었던 첫 번째 사건이 언어의 변화입니다. 말이 바뀌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언어가 다릅니다. 

언어의 변화가 우선되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죽어지고 나니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이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이사야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보내소서’

입술이 부정할 때에는 쓸모가 없었지만 입술이 정하게 되었기에 이제는 

주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 내가 쓰인다는 말씀입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모든 문제가 복잡합니다. 그러나 모든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는, 해결되는 습관을 들이셔야 합니다. 그리고 경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올 때 비로소 우리의 더러운 입술이 정한 입술이 되고 

또 정한 심령이 될 때 비로서 하나님의 사명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성결한 심령으로 하나님이 우리 각자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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