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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주셨으니(갈라디아서 5:1-12)

    

 

 

      역대하 25-31장

 

자유를 주셨으니, 갈라디아서 5:1-12, 516장

 

 2차 세계대전 중인 1943년 11월 미국, 영국, 중국의 세 나라가 카이로에 

 모여 적당한 시기에 한국을 해방, 독립시킨다는 ‘카이로 선언’이 발표되었고 

 1945년 7월 미, 영, 소 참가의 ‘포츠담 선언’으로 한국을 독립시킨다는 것이   재확인되었습니다. 

그 후 1945년 8월 15일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 폭탄이 떨어짐으로 일본은 

무조건적으로 항복하였고 그 결과 우리나라는 36년간의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 하에서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해방이 되자 우리는 비로소 자유라는 말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78년 동안 자유를 공부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면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진정한 자유가 무엇입니까? 

이 시간 깊이 생각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누가복음 13장을 보면 18년 동안 귀신들려 살아온 여자가 있었습니다. 

귀신들린 여자, 마음대로 돌아다닙니다. 마음대로 먹고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만, 그러나 그는 자유인이 아닙니다. 정신이 자유롭지 못합니다. 

본인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도 모르는, 그러한 속박 속에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면서도, 죄의 노예가 되었다고 하는 이 사실은 까맣게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무서운 것이 이 속박입니다. 개를 보시면 압니다. 

목을 가죽 끈으로 매어 놓았는데도 개는 평화스럽게 잠을 잡니다. 

배불리만 먹여주면 목이 묶은 상태로도 아무 불편이 없습니다. 때때로 주인이 부르면 뛰어나가려다 목에 걸린 개목걸이에 탁 잡아 채입니다. 

‘아 지금 붙들려 있나보다’ 그때 가서 생각합니다. 

노예 생활에 길들여진 인간이 꼭 그렇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환경이 힘들고 어려워도 그 속에서 소망을 발견할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시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소망일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도 독립에 대한 소망을 잃지 않던 분들에 의해서 독립.

소망을 잃어버리신 분들이 친일파로 변신. 이광수, 최남선

1919년부터 1945년까지 36년 동안 일본의 다스리심을 받았을 때 처음부터 친일파들이 많이 등장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1930년 이후에 적지 않은 분들이 일본에 협조하는 방향으로 전환하였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독립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일본의 기세는 갈수록 거세지는 가운데 돌아서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올해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나 해방이 된지 78년이 

 되는 해이고, 이번 주 화요일은 광복절입니다.  

광복절은 우리 민족이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고, 

대한 민국 정부 수립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광복’(光復)이란 빛을 회복한다는 말입니다. 

어둠 속에 갇혀 있다가 다시 빛을 본다는 뜻입니다.

우리 민족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성도 빼앗기고 언어도 빼앗겼습니다. 

그 당시 우리 민족은 일본 사람들에게 무시를 받으면서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던 것이 일제 36년의 생활이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참자유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얻어지는 것인지, 

그 대가가 얼마나 큰지, 자유에 따르는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비로소 배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도 배우고 있고, 앞으로도 더 배워야 할 것입니다. 자유의 가치를 모르면 자유를 지키지 못합니다. 

참 자유는 오직 하나님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 자유하고, 진리를 따라 삶으로 자유합니다. 

요한복음 8:36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가 참으로 자유로우리라”

예수께서 자유케 하여야, 예수님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자유함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사회, 어느 제도의 틀에서가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께서 자유케 하시는 그 자유 안에 참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의 두 번째 책인 출애굽기는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다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나 시내 광야를 거쳐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가는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종노릇을 하다가 자유를 얻는 민족적 해방, 곧 정치적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일제 시대에 일본 당국이 교회 안에서도 구약을 읽는 것을 금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한 민족이 강제로 다른 민족이나 나라를 강점하고 노예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러한 민족적 해방, 곧 정치적 해방을 강하게 주장하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읽는 민족은 다른 민족, 혹은 국가에게 오랫동안 노예생활을 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자유를 쟁취하고 스스로 벗어나 독립생활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일제시대에 3.1 운동을 비롯하여 온갖 일제의 압박에 저항하는데 우리 기독교인들이 선두에 섰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성경은 민족적 내지 정치적 자유를 얻도록 가르치는 책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민족적 내지 정치적 해방만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해방된 사회 안에서 구속을 풀어주는 사회적 해방 제도가 또한 있었습니다. 그것은 곧 구약에서 우리가 보는 '희년제도'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이스라엘에서는 매 50년마다 희년을 선포하고, 모든 노예들을 석방시켜 주었고 또 부채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이 해방은 사회적 내지 경제적 해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벌써 오래 전에 이 사회적 해방의 원리를 가르쳐 준 것입니다.

실천은 주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대한 실질적 도움.

 

성경은 민족적, 정치적 해방과 사회적 해방을 가르치지만, 여기에만 그치는 것은 아닙니다. 이보다 더 깊은 의미의 해방을 선포합니다. 곧 영적 해방입니다. 이 근본적인 해방은 특별히 우리 주님께서 분명히 가르쳐 주십니다.

요한복음 8장 31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를 이러한 죄의 종의 멍에에서 해방시켜 참된 자유를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갈라디아서 1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하신 말씀은 특별히 영적, 도덕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죄의 멍에에서 벗어나 주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사도가 1차 전도 여행 도중 세운 교회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이 교회를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감격과 긍지와 자부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며 살았는데 이들의 삶에 영적인 도전이 다가 왔습니다. 

사도행전 15:1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이 일로 인하여 갈라디아교회의 믿음이 뿌리 채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먼저 얻은 자유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받은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의 소중함을 아는 일입니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인간되심은 그 자체가 사랑의 극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불완전한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셔셔 온갖 모욕과 

고난을 다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인간의 죄 값을 다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돈으로 된 것도 아니고, 노력으로 된 것도 아니고, 누구의 도움으로 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쉽게 얻었기 때문에 소홀히 여길 수 있습니다. 대개 복권당첨이나, 도박으로 얻은 재물이 헤프게 낭비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의로움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은혜입니다.   

부모의 수고, 부모의 눈물, 부모의 고독을 알 때 비로소 효도가 시작됩니다. .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알 때 우리는 감사함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유의 진리 위에 굳게 서야합니다.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속여서 선악과를 먹게 한 사단입니다.  

유대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단입니다. 

이제는 택한 자라도 넘어뜨리려고 우리를 시험하려고 교묘하게 다가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에게는 율법과 할례라는 무기를 가지고 달려들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당연히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모세를 통하여 주신 소중한 율법을 지켜야 하고 할례를 행하여야 거룩한 백성이 된다.” 이 말은 처음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혼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전한 복음의 진리에서 시작한 믿음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갈라디아 5:11에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만약에 바울 사도가 할례를 함께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전하였으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아야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오늘도 사탄은 우리를 공격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떨어지게 하고 시험에 들게 하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싸움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를 모욕합니다. 기독교인들의 추태를 들어나게 만듭니다. 

이런 자들이 있는데도 예수 믿겠냐고 다그칩니다. 

세상을 바라보면 우리를 낙심시킬 요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거룩하고 완전한 성령의 공동체이어야 하는데 현실교회는 그렇지 못하고 불완전하고 세속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십자가를 붙들고 나아가야 합니다. 인간은 누구나 죄인이기 때문에 그들의 허물을 들추어내기 시작하면 정죄를 당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교회 예배당 중심에 십자가를 세우듯, 각자 믿음의 중심에 십자가를 세워야 합니다. 사람들의 말은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해석도 상황에 따라 변합니다. 그래서 믿는 우리들은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 성경말씀만 붙들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7의 경고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누가 당신의 성장하는 믿음을 막고 있는가? 무엇이 당신의 달음박질에 걸림돌이 되고 있는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중에 유익한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내 믿음과 삶에 해를 끼치는 사람이라면 단호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5: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5: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버리기를 원하노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과거의 뼈아픈 역사를 기억하면 흥하고, 망각하면 망하는 겁니다. 

오늘 우리도 광복 86년을 보내면서 냉정한 반성과 다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투쟁으로도 아니요 경쟁으로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할 때에, 바로 거기에 자유함이 있고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광복 78주년을 맞이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하나님의 은혜에 매임으로 세상이 주지 못하는 

참 자유를 누리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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