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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함을 채우려(빌립보서 2:25-30)

   

 

      역대상 19-25장

 

19장

1-5절 다윗의 사신을 모욕한 암몬

6-15절 암몬, 아람 연합군에 대한 승리

6-7절 암몬이 아람의 원병을 청함

8-15절 요압의 승리

16-19절 아람에 대한 승리     이스라엘이 암몬과 아람의 연합군을 격파하자 아람은 다시 대규모의 군대를 파견. 

 

20장

1-3절 암몬 원정에서의 승리

4-8절 블레셋 정복의 용사들

블레셋 족속에 대한 3차례 전쟁

 

21장

1-8절 다윗의 인구 조사와 회개

인구 조사의 목적이 세금 징수와 병역 대상자의 확보에 있기 때문에 

결국 이러한 행위는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다 자신의 군사력을 더 의지

9-17절 하나님의 징계와 다윗의 회개 기도

13절 사람의 손에 빠지지 않기를 기도함 15절

18-30절 타작 마당에서 드린 제사

26, 27절

 

22장

1-5절 성전 건축을 위한 다윗의 준비

6-16절 솔로몬에게 성전 건축을 부탁

17-19절 방백들을 향한 다윗의 부탁

 

23장

1-5절 레위인의 총계수 및 직무분담

1절 다윗은 30세에 왕위에 올라 7년 6개월 동안 헤브론에서 다스렸고

33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다스렸으므로 70세

6-23절 성전 봉사 24,000명 레위인의 24반열

24-32절 성전 봉사 레위인의 직무

레위인의 직무는 제사장을 도와 하나님의 전에서 수종드는 것

성전의 안팎에서의 궂은 일, 성전 기물의 관리, 진설병 만드는 일, 

찬송하는 일

 

24장

1-19절 제사장의 24반열

나답, 아비후, 엘르아살, 이다말

20-31절 성전 봉사 레위인의 반열, 23장의 반복

 

25장

1-7절 찬양대의 직무와 조직

아삽과 헤만과 여두둔의 자손 중에서 

8-31절 찬양대 직무의 순서

 

빌립보서 2:25-30, 부족함을 채우려, 369장

 

초등학생 아이가 주일날 교회 가려고 아침 집을 나섭니다. 

그때 엄마가 500원 짜리 동전 두 개를 주면서 말합니다. “얘, 한 개는 헌금으로 드리고, 한 개는 용돈이니까 갖고 있다가 나중에 네가 써라.” 

아이는 기분이 좋아서 교회로 갑니다. 교회 근처에 갔는데, 저기 친구를 보고는 반가운 마음에 뛰어 가다가 그만 돌에 걸려 넘어졌습니다. 

손에 쥐고 있던 동전 두 개가 떨어져 때굴때굴 굴러가다가 그 중 한 개가 하수구에 빠졌습니다. 그 때 아이가 소리칩니다. 

“아이고! 하나님께 드릴 헌금이 빠졌네.” 

 

한 인간의 사람됨은 그 사람의 관심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정해집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은 우리가 세운 가치관에 의해서 결정이 됩니다.

여러분들은 인생의 궁극적 관심을 어디에 두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순간순간 현실적으로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내가 추구하는 그것만큼 내 인생은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것을 추구하면 그는 세속적인 사람이요, 거룩한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면 그는 거룩한 사람이고, 영원한 가치의 것을 생각하고 살아가면 

그 사람은 영생을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오늘의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중심적 세계관이 문제입니다.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산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주의로 살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기적으로 산다고 잘 살 것 같습니까? 채워지지 않습니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나도 남도 자꾸자꾸 불행하게만 만들 따름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이기주의를 ‘인류 최대의 재앙’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재앙입니다. 

이기적으로 사는 길은 남도 죽이고 자기 자신도 죽는 길입니다. 

이기주의의 또 다른 표현으로 편법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편법으로 통하고 이 편법이 능력으로 통하는 사회는 망하는 사회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있게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몸이 자람과 함께 지식도 자라고 영도 자라가야 합니다. 

겉과 속이 함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는 자랐는데 내면의 인격과 도덕성, 즉 내적 존재가 여전히 미숙아로 남아 있다면 그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어린아이에게 자동차 운전을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미친 사람에게 총을 주는 것과 같습니다. 

누구든지 어릴 때에는 다분히 이기적이고 자기본위적입니다. 

구심점이 나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알게 됩니다. 흔히 철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있고 부모님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이 있고야 내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저 사람의 취향은 어떠한가, 저 사람은 무엇을 필요로 하는가에 생각이 미칩니다. 

곧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어른입니다. 

 

인도의 간디가 지방에 갔다가 기차를 타는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이 길어져 기차가 막 떠날 때에 기차를 타게 되었다고 합니다. 

간신히 올라타면서 그만 신발 한 짝이 벗겨지면서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한 짝만 신고 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즉시 남은 한짝의 신발을 벗어서 한짝 떨어져 있는 저 쪽을 향해서 던집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왜냐고 묻습니다.

신발을 주워 갖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현대사회를 가리켜 ‘충동적 행위의 시대’라고 합니다.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이 갑자기 감정이 복받쳐 올라 사람을 죽입니다. 그 순간을 이기지 못한 것입니다. 충동적 살인입니다. 그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합니다. 나이만 들었다고 어른이 아닙니다. 생각하는 것이 충동적이고 즉흥적인데 어떻게 어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가끔 주위에서 한심한 사람들을 봅니다. ‘내 감정, 내 기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감정은 무방비상태입니까? 기분은 이렇게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감정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기분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입니다. 

마음대로 사랑하고, 마음대로 미워하고, 그래서는 어른이랄 수 없습니다. 

모름지기 성숙한 인격은 먼저 자기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사업, 직장, 배우자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솔직히 꽤 고민이 됩니다. 

믿음대로 하려니, 신앙적인 기준을 따르려니 손해 볼 것 같고,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괴테는 유명한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 고민 없이 가뿐하게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다가도 결국 신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진짜 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알아서 선택하겠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는 삶’입니다. 

반대로 나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빌립보서입니다. 바울 서신에는 옥중서신이 넷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옥중서신이란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쓴 네 개의 편지를 말하는데, 빌립보서는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빌립보 교인들에게 쓴 편지를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지하 감옥에 갇혀 그 외로움과 불편함과 답답함과 고통스러움과 부자유함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바울에게 더 높은 차원의 근심이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자 빌립보 교인들은 급히 헌금을 모아서 에바브로디도 편에 보내게 됩니다. 

그리고 에바브로디도에게 헌금을 전달할 뿐만 아니라 로마에 남아서 감옥에 갇힌 바울을 돕도록 합니다. 바울에게 요샛말로 사식과 담요를 넣어주며 여러 가지로 시중을 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시중들던 에바브로디도가 병이 들어서 그 자신은 물론 빌립보 교회와 사도 바울에게까지 큰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나름 걱정을 합니다. 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얼마나 걱정을 할까, 바울은 얼마나 괴로워할까?

바울도 걱정을 합니다. 에바브로디도가 시중들다 병을 얻게 돼서 미안해 할 까봐 걱정합니다. 이렇듯 모두가 자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남을 걱정합니다. 근심 위에 근심의 뜻은 이것입니다.

내 마음만 편하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근심할까봐 더 큰 근심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타적인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내일 아침 죽게 된다는 것을 아시면서도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위로를 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십자가를 지시는 그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아픔과 괴로움과 억울함을 생각하시기보다 십자가를 지우는 사람들을 걱정하셨습니다.

누가복음 23:34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걱정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 받을 심판과 그 운명을 생각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심성입니다. 

 

455장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어디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까?

 

누가복음에 보면 여러분들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있습니다. 

이 이야기를 놓고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란 분이 그의 저서 ‘Responsible Self’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오직 자기 밖에 모르는 강도라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공동체에 충실하게 살겠다고 하는 레위 사람, 제사장 같은 사람도 있고, 마지막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책임적인 인간이 있다고 합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여기에 강도 만난 사람이 누워있습니다. 이대로 두면 죽습니다. 외딴 곳입니다. 그런데 레위인, 제사장들이 지나가다 보았지만 이 사람들은 자기공동체에 충실해서 자기 일이 아니라하고 그냥 지나갑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지나가다가 이 사람을 봅니다. 이때 사마리아 사람이 ‘지금 강도가 이 근처에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사람을 돕는다고 어물어물하다가는 내가 죽게 될지도 모른다. 저 사람은 어차피 죽을 사람이다. 죽을 사람 돕다가 나 죽을 것 없잖은가?’ 이렇게 합리적으로 생각한다면 도망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 사마리아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의 중심이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손해를 감수하면서 이웃을 돕게 됩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기주의를 극복하는 길은 남을 섬기는 데에 있습니다. 

생각을 바꾸어 남을 기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옛날에는 남자 나이 12-16 정도면 장가를 가지 않았습니까?

자기보다 무려 열 살이나 많은 여자와 결혼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습니다. 신랑 노릇도 못하는 어린 신랑이 자꾸만 업어달라고 조르니까 짜증이 난 신부가 신랑을 지붕 위로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골탕을 먹이느라고, 내려달라고 졸라도 안 내려줍니다. 그 때에 마침 출타 중이던 시부모님이 돌아옵니다. 그런데 보니 자기 아들이 지붕 위에 있지 않습니까?

며느리는 어쩔줄 몰라하며 서 있고, 기가 막혀 ‘너 거기 왜 올라가 있느냐?’

‘큰 호박을 딸까, 작은 호박을 딸까?’하더랍니다. 

어떻습니까? 요즈음 아이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없습니다. 

게임하는 데는 도가 텄지만 이렇듯 남을 위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내 행동으로 인한 파급효과는 어떠할까, 다른 사람의 마음은 어떠할까?

이것을 생각할 줄 모르는 것이 바로 이기주의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위하여 진심으로 기도하자 그의 병이 낫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그를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냅니다. 

지금처럼 전화가 있으면 ‘에바브로디도가 다 나아서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하겠지만 그 당시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랫동안 그를 데리고 있고 싶었지만 급히 보내는 것은 빌립보 교인들의 걱정을 빨리 덜어 주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28절 내게 필요한 사람이지만 너희들의 기쁨을 위해서 빨리 보낸다고.

근심 위에 근심, 남의 마음을 또 한 번 걱정하는 여기에 

참된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있고 아름다운 삶의 길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 마음 속에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주의를 넘어서서 타인을 향한 이타주의의 마음으로 이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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