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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사도행전 7:54-60)

  

     오늘 읽은 본문은 신약 성경 최초의 순교자가 탄생하는 장면입니다. 

스데반은 예수님의 12제자는 아닌 일곱 집사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열정이나 결단은 12제자들 보다 월등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의 죽음은 초기 기독교에 상당한 손실이었고 

그 후에 주어진 핍박은 기독교에 위기로 작용했습니다. 그런데 그 핍박은 

기독교의 확장으로 기독교가 세계화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고 성령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면 이런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기독교는 고난과 더불어 확장되는 종교라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날 고난을 통해서 기도하는 체질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국교회가 형성되던 시기는 일제의 침략기였습니다. 

일제 침략이 우리나라로 하여금 기도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처음부터 민족교회로 출발하였습니다. 

우리 민족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눈물로 기도하면서 이 어려운 난국과 

역사의 굴곡을 헤쳐 나왔습니다. 이것이 우리 한국교회의 전통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전통이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국가나 민족을 생각하는 것 보다 개인을 먼저 생각합니다. 

이제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라를 위한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모세의 기도를 들으셨고, 

느헤미야와 에스더와 다니엘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한국기독교는 누구보다도 애국심을 가지고 현실에 참여한 종교입니다. 

그 대표적 예가 바로 1919년 3.1운동입니다.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 1919년 

자주 독립을 외치며 우리 조선 민족이 모두 궐기했던 날입니다.  

 

일본은 1905년 을사보호조약으로 우리나라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1910년에는 조선총독부를 설치하고, 한일합방으로 나라를 빼앗아 갔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국제적인 관심은 한반도가 일본에 귀속된다 할지라도 일본이 남하해 오는 러시아의 세력을 막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한다는 입장이었기에 한일합방에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은 나라를 빼앗기고 자유를 잃었음에도 호소할 데가 없는 불행한 민족이 되었습니다. 3.1운동은 이러한 우리 민족이 민족적 자주생존권을 주장함과 동시에 자유를 선언한 운동입니다.

 

최남선, 이상재 누구 누구 하지만 3·1절을 대표하는 인물은 유관순입니다.

그를 가리켜 한국의 잔 다르크라고 합니다. 

일본은 만세시위에 가담했던 사람들을 돈으로 매수하거나 회유하였지만 

유관순은 매수도 회유도 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고 일본의 갖은 잔악한 술책에 저항하다 마침내 1920년 10월 12일 18살의 

꽃다운 생을 마쳤습니다. 

유관순은 비석이 없어 무덤을 찾을 수 없고, 유품하나 남겨 두지 않은 채, 오직 수의를 입은 사진 한 장만을 남겨두고 우리 곁을 떠나갔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애국과 신앙을 하나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살기 힘든 나라였지만 기독교가 들어와서 많은 복을 받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경제대국이 되었고 교육 강국이 되었습니다. 

반만년 역사에서 이렇게 잘 산 적이 없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나만 잘되면 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크리스천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잘 나가던 복음의 흐름이 갑자기 스데반의 순교로 주춤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몹시 당황하고 앞날이 캄캄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역사는 그 환란을 통해서 복음을 퍼지게 하셨습니다. 시간이 지난 후에 보면 그 환란은 축복의 기회였습니다. 그 결과로 사울이 회개하고 복음이 유럽으로 신속하게 퍼져나가게 되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하나님은 늘 평안만 주시지 않고 환란과 핍박과 고난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고 탄식하기도 하였습니다. 

우리는 오늘 현실만 보고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 주어진 현실의 암담함에 낙심하고 실망하기도 하지만 하나님은 주어진 암담한 현실을 사용하여 미래를 여십니다.

한국교회는 고난과 더불어 성장하였습니다. 앞으로도 주님은 어떤 모습으로 우리와 이 나라의 앞날을 이끌어주실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섭리 속에 나와 우리 민족의 운명도 들어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느 선교사가 전 세계에 한국 상황을 타전하기 위해서 당시 조선을 영문으로 쓰고 나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조선을 영문으로 써 놓으니 “초슨”(Chosen)이 되었습니다. 그 말은 “선택받음”이라는 말입니다. 선택이라는 “초슨”이라는 말의 어원은 한국말 조선에서 시작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나라입니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기적적인 성장의 원인을 세 가지로 정의합니다. 

첫째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믿음이고 두 번째는 뜨겁게 기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믿으면 반드시 전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대로 믿는 것, 순전하게 받아 들이는 것.

목회를 하면서 교인들과 교회가 같이 공멸할 때 많이 쓰는 말들이 

은혜로 하자, 융통성있게 라는 말이었습니다. 

사사기 21:25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융통성이 있어서는 절대로 하지 못하는 것이 순교입니다. 

순교자란 yes, no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사회에서도 융통성있게 사시면 크리스찬들은 망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37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부터 나느니라” 저는 우리 교인들이 세상에 나가서도 예, 아니오를 분명하게 밝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스데반은 짧은 생애를 마쳤습니다마는 성령 충만함의 속성과 그 상태가 

어떤 것인가를 몸으로 말씀해 주시는 분이셨기 때문입니다.  

‘성령 충만’의 충만을 뜻하는 헬라어 단어는 ‘플로레스’라고 하는데 이 말은 곧 감동있는 체험적 신앙을 이야기 합니다. 모든 복잡한 문제를 다 넘어설 만큼 감동, 큰 감격이 있는 것이 성령 충만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능력에 사로잡힌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스데반의 이 순교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충만함의 뜻이 무엇인지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스데반을 향해서 이를 갈았다, 합니다. 이를 갈며 성 밖으로 내치고 돌을 던졌다 합니다. 

여러분! 이 대목을 잘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왜 예수님의 수제자 사도 베드로가 아닌 스데반입니까? 왜 사도도 아닌 집사 스데반이 먼저 죽느냐, 순교하느냐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바로 이 사람이 특별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저 ‘갈릴리 촌사람’이 아니고 헬라파 유대인이요 지성인, 당시로 말하면 세계문물을 두루 꿰고 있는 사람입니다. 식자층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 믿고 복음을 전할 때 같은 동료, 왕년에 같은 친구였던 헬라파 유대인들이 여기서 용납하지 못한 것입니다. 저들이 배신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때려 죽이는 순간입니다. 

말하자면 지금 스데반을 죽이는 사람들이 바로 엊그제까지도 친구였던 사람들입니다. 같은 헬라파 유대인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돌을 던집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사울이라는 사람이 있어 뒤에 사도 바울이 됩니다. 그는 스데반을 죽이는데 한 몫을 합니다. 죽이는 일에 가담했습니다마는 거기서 큰 감동을 받습니다. 스데반이 죽어가면서 사도 바울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의 회심의 시작을 스데반의 순교에서 시작한 것으로 해석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데반을 향하여 돌을 던지는데 이에 대한 스데반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본문에 보는 대로 그는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성령 충만한 자는 땅을 보지 않고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그 옛날 로마 황제 시저가 암살 당할 때 칼로 자기를 찌르는 양자, 부르트스를 향하여 뭐라 합니까? ‘부르트스 너 마저도’ 아닙니까? 

그런데 스데반은 자기를 죽이는 자를 보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사건 어떤 상황에서든지 먼저 위를 보십시오. 

위를 보는 것,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기본자세입니다. 

위의 것입니다. 먼저 눈을 들어 위를 보고, 하나님의 세계를 보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합니다. 그것이 성령 충만한 자의 모습입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보라’

 

또한 ‘주목하였다’ 합니다.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습니다. 집중해서 보았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안 보았다는 뜻입니다. 

concentrate, 집중적으로 주목해서 하늘을 쳐다봅니다.

그리할 때 하늘이 열리는 것을 보았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나를 기다리고 계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어서 오너라, 하고 서서 기다리고 계신 그리스도를 뵈었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볼 때, 집중적으로 볼 때 주님을 만나게 되고 주님을 뵙게 됩니다. 

 

죽음을 앞두고 스데반은 주님을 우러러 봅니다. 

자기를 기다리는 주님을 쳐다보면서 그에게 생명을 위탁합니다. 

그러면서 죽음의 문제를 깨끗이 해결합니다. 죄의 문제, 불안과 공포의 문제, 세상에 대한 미련, 다 접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totally commitment, 자기 자신을 완전히 위탁해 버렸습니다. 

여기서 그는 영혼의 자유함을 얻게 됩니다. 평안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 자기를 죽이는 사람들, 그 원수들을 용서합니다. 용서할 뿐 아니라 원수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가끔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 할 때 ‘원수를 사랑하다니, 원수를 어떻게 사랑해? 그건 특별한 성현들이나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나 할 수 있는 일이지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이 어떻게 원수를 사랑한단 말인가?’하고 말하기 쉽습니다마는 그렇지를 않습니다. 

공산주의가 망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들에게는 사랑과 용서가 없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 이론에는 오로지 투쟁만이, 쟁취만이 혁명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런 공산주의는 결국 몰락하고 말았습니다. 

왜? 그 미워하는 마음, 저주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원수를 사랑하고야 내가 살 수 있음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누구를 미워합니까?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나’라는 생명을 내가 미워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 빼앗기고 있는 것입니다. 

빨리 벗어나십시오. 거기에 매여 있으면 그 저주에서 헤어 나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을 사랑하고야 내가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6:15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우리는 천사를 본 일이 없지마는 천사의 얼굴이 어떠할지 짐작은 합니다. 

바로 그것이 변화된 모습입니다. 위를 보는 사람, 천사의 얼굴과 같습니다. 

확실히 젊었을 때는 예쁜 것이 있습니다. 더 예쁘고 덜 예쁘고 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고 보니 다들 그 사람이 그 사람입니다. 다 비슷합니다.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밝은 얼굴과 어두운 얼굴입니다. 

이것은 성형외과와 피무과가 아무리 많아도 손을 못 대는 부분입니다. 

왜? 이것은 내면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결국은 밝은 얼굴이 필요합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자유하면 마음이 

천사가 되고 얼굴도 천사가 되는 것입니다. 밝아지는 것입니다.  

전도가 딴 것입니까? 밝은 얼굴이 전도입니다. 

 

욥기 23:10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같이 되어 나오리라”

욥은 고백합니다. ‘그가 아시나니’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 내가 왜 이 고난을 당해야 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나는 모르고 살지만 그는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아신 바 된 그 속에 내가 있는 것입니다.

나는 잘 모르겠지만 다만 그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때로 어린아이들이 아버지 어머니의 손목을 잡고 길에 나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어린아이는 자기 부모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릅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잘 인도할 줄로, 어머니가 좋은 길로 인도할 줄로 알고 

마냥 좋아하며 손목을 잡고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이 뭘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이 있을 뿐입니다. 

내 엄마와 아빠가 잘 인도해 주시겠지. 그런 믿음입니다. 

욥은 이어서 이 고난을 통해서 이 모든 사건을 통해서 단련받고 훈련받아서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고, 여기에 내가 생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그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도 유익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이해가 되지 않으나 내가 이해되지 않더라도 이것은 유익함에 틀림없다고 그는 수용했습니다. 

 

지난 날을 생각해 봅시다. 그때 그 사건, 내가 억울하게 당했던 그때 그 사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그 때 그 사건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날 내가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찬이란 오늘도 내가 납득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지만 이것이 다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모르나 그분은 아시고, 나 또한 언젠가는 지금 겪는 이 고통의 뜻을 

확연하게 그것이 유익했다고 하는 것을 간증할 때가 올 것입니다. 

왜? 나에게 당한 고난 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하나님의 지혜가 있고, 

하나님의 나만을 향한 특별한 사랑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당하는 길을, 내 운명을 그가 아십니다. 

그래서 내가 이 고난을 겪은 다음에 순금같이 나올 것입니다. 

그 아침을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가는 것이 크리스찬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십자가를 생각할 때, 나를 위하여 대신 지신 십자가를 생각할 때 큰 감격이 있습니까? 십자가의 은혜를 깨닫는 사람, 성령 충만한 사람, 그에게 하늘이 열립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십니다. 

여러분, 오늘 스데반의 저 장엄한 순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천사의 얼굴을 하고 주님의 영접을 받는 저 스데반을 보십시오. 

성령 충만합니다. 그에게는 원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어두운 그림자가 없습니다. 오직 밝은 마음과 소망과 영광과 천사의 얼굴이 있을 뿐입니다. 

순교자 스데반 집사와 같이 순전한 마음으로 여호와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기뻐하며 나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전서 5장 ~ 베드로후서 3장, 요한이서, 요한삼서

 

베드로전서 5장

1-11절 고난에 직면한 교회에 대한 권면, 2-3절  8-9절

12-14절 마지막 당부와 문안 인사

12절 실루아노는 실라와 동일인물 13절 바벨론은 로마의 상징적 별명

 

베드로후서 1장

1-2절 문안 인사

3-11절 경건과 성결의 삶 권면, 10절

12-15절 본서 집필 동기, 12절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5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21절 그리스도 재림의 확실성에 대한 변증

16절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20절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요,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으로 풀어야

21절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2장

1-3절 거짓 교사의 정체 및 속성

거짓 교사는 도덕적 탈선과 그리스도 재림에 대해서 부인.

4-10a 거짓 교사에 대한 심판의 확실성

10b-19 거짓 교사의 불의

15절 발람은 모압 왕 발락으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저주해 달라는 부탁을 받았으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저주하지 못하다가 발락의 재물에 넘어가

20-22절 거짓 교사의 미혹에 대한 경계

 

3장

1-7절 그리스도 재림 부인설에 대한 비판

8-13절 그리스도 재림 지체 이유 해명과 재림 대망 권면

8절 시편   90편 4절,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9절

14-18절 결론적 권면과 송영  18절

 

요한이서

성육신을 부인하고 성도들을 도덕적 방종으로 미혹하는 이단 사상을 경계

 

1-3절 시작하는 말

1절과 13절 택하심을 받은 부녀는 교회에 대한 상징적 표현

4-6절 하나님의 계명에의 순종 권고

7-11절 적그리스도에 대한 경계

7절 가현설에 대한 부정, 성육신

12-13절 맺음말

 

요한삼서

1-4절 시작하는 말

가이오의 선하고 신실한 행위를 칭잔하며 디오드레베의 악한 행위를 책망

5-8절 가이오를 향한 칭찬과 격려

9-12절 디오드레베에 대한 경계 11절

13-15절 맺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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