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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알의 밀 (요한복음 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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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 성자로 불리는 마하트마 간디는 사람을 파괴하는 세 가지의 큰 죄악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세 가지 죄악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원칙이 없는 정치’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라고 합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재산, 정치, 종교는 꼭 필요하고 유익한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필요하고 유익하다 하더라도 기초가 부실하고 원칙이 제대로 서 있지 않으면 그것은 도리어 인간을 파멸시키는 악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먼저 일하지 않고 얻는 재산.
하나님을 믿으면서 혹시 기적을 바라시지는 않으십니까.
혹시 하나님이 대박을 터뜨려서 사업이 하루아침에 잘 되기를 바라지는 않으십니까. 하나님을 알라딘의 마술램프나 ‘내 사랑 지니’에 나오는 지니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땀을 흘려서 적더라도 값지게 벌어들이는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관심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부를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면 저절로 인생의 문제가 해결되고 잘 살게.
남북전쟁의 아브라함 링컨.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 편에 서게 해 달라고 기도 해야겠지요”

원칙이 없는 정치, 사회
원칙이 잘 지켜지는 나라가 잘 사는 나라.
원칙이 잘 지켜지지 않는 나라가 못 사는 나라.
그런 면에서 우리나라도 선진국으로 가려면 질서가 지켜져야.
교통 법규, 담배 꽁초, 주차. 끼어들기. 일벌백계.

마지막으로 희생이 없는 종교.
세계사를 공부해 보면 전쟁 중에 가장 무섭고, 잔인한 전쟁이 종교 전쟁이었습니다. 구교와 신교는 같은 기독교지만 많이들 죽였습니다.
프랑스의 개신교. 위그노를 통하여 영국의 산업혁명이 성공을 합니다.
십자군 전쟁. 전쟁의 명분으로 하나님의 뜻을 내세웠지만 그 내면에는 인간의 욕심과 욕망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지금도 기독교와 이슬람.
이슬람 내에서도 순니파, 쉬아파.

만약에 하나님께서 힘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려 하셨다면 단번에 그리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아닌 섬김을 통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으로 지배하며 다스리는 곳이 아니라 사랑과 헌신으로 서로를 섬기는 곳입니다.
사단은 선악과를 따 먹으면 하나님처럼 높아진다고 유혹했습니다.
힘을 가지고 지배자가 되라는 사단의 유혹에 넘어져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나라인 에덴에서 영원히 쫓겨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인류를 다시 에덴동산, 즉 하나님의 나라로 구원하시기 위해 선택하신 방법은 섬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섬김으로 이뤄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섬김에는 헌신과 희생이 따릅니다.
하나님은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헌신과 희생으로 섬김으로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당신의 아들을 내어주시는 섬김에서 이뤄집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희생의 종교, 사랑의 종교라고 말합니다.

본문의 배경은 종려주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의 최대 명절인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가셨는데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이스라엘 왕이시여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다시 살리신 능력으로 로마 군대를 물리치고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시켜 주기를 갈망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열광적으로 맞이했던지 19절을 보면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바리새인들이 이제는 예수를 어쩔 수 없다고 포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 성에 올라온 몇 명의 헬라인들이었습니다.
그리스인. 이방인. 그들은 헬라인이면서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을 찾아가 예수님을 만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빌립은 자기 혼자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안드레에게 상의를 했습니다.
빌립과 안드레는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고 전했습니다.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은 예수님은 그들을 만나겠다 아니면 안 만나겠다는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는 동문서답.
한 알의 밀에 대한 교훈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백성들이 보였던 반응을 보면 곧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위기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헬라인들은 예수님께서 왕이 되면 자신들이 이방인으로 누릴 수 있는 영역을 청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런 흐름으로 본문을 읽는다면 한 알의 밀 교훈이 예수님을 통해 높아지기를 원하는 그들에게 주시는 명쾌한 답이었습니다.
24-26절의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
예수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누리고, 높아지려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헬라인들에게 너희들이 나를 믿고 섬기려면 나의 삶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땅에 떨어져 썩음으로 많은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에 비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예루살렘 성에 오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죄와 죽음의 악한 권세에 눌려 있는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나라 백성으로 거듭날 수 있도록 길을 열기 위함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그 십자가의 길은 한 알의 밀이 썩는 것처럼 자신의 헌신과 희생이 따르게 되는데 그 길을 가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프란시스코 교황은 가는 곳마다 화제를 몰고 다닙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교황과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민적인 행보를 보입니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먼저 챙깁니다.
섬기는 모습을 본으로 보입니다. 그는 방탄차를 거부하고 소형차를 타고 다닙니다. 세계가 교황에게 환호하는 것은 그가 높은 자리에서 호령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격리된 자리에 앉을 수도 있지만 그 자리에서 내려와 예수님처럼 섬김의 본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종교가 개종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대신에 종교는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개종하고 싶을 만큼 매력을 발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맞습니다. 신앙은 강요에 의해 이뤄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사람을 감동시키는 매력이 있어야 합니다.
그 매력 가운데 하나가 섬김입니다.
낮아져서 섬기는 모습은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영광의 자리를 뒤로 하고 한 알의 밀이 되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신 예수님의 삶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이유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진정한 정신이고, 힘입니다.
인생은 하루하루를 살아가지만 사실은 죽음을 향한 길입니다.
잘 죽는 연습이 될 때 그 인생이 진정으로 복됩니다.
잘 살아야 하는 이유는 잘 죽기 위함입니다.
죽어야 사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진리입니다.
내가 예수님과 함께 날마다 정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기독교는 죽음으로 기억됩니다. 우리는 생일을 기억하지만 실상은 죽는 날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떻게 죽느냐가 그 인생의 가장 화려한 절정입니다.

세상의 모든 이치도 죽어야 다시 삽니다. <김치의 법칙>이란 글이 있습니다.
우리의 식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치입니다. 그런데 맛있는 김치가 우리 입 속에 들어올 때까지 적어도 5번 이상 죽어야 한다고 합니다.
땅에서 뽑힐 때, 칼로 배추의 배를 가를 때, 소금에 절일 때, 매운 고추와 젓갈 마늘의 양념에 버무려 질 때, 그리고 입 안에서 씹힐 때입니다.
배추는 5번이나 죽음을 거쳐 비로소 우리 입 안에서 김치라는 새 생명으로 거듭납니다.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아내를 자기 입맛대로 길들이려고 하면 갈등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아내가 남편을 자기 맘대로 조정하려고 하면 분쟁이 생깁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도 서로 죽으면 삽니다. 부모는 자신의 생각과 뜻을 죽이고 자녀의 입장에서 이해하면 서로 소통이 됩니다. 행복한 관계를 이룹니다.
그러나 부모가 자녀를 자기 뜻대로 주장하거나 가르치려고만 하면 관계가 악화됩니다. 자식도 자기 생각을 내려놓고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좋은 관계가 됩니다. 그러나 불순종하고 자기 멋대로 하면 갈등이 생기고, 상처가 됩니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먼저 남을 위해 섬기고, 자신이 죽으면 결국은 인정받고, 높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항상 자기중심적인 사람, 남을 이용해서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관계도 똑같습니다. 내가 먼저 죽어야.
목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목사도 바로 김치와 같이 죽어야 행복한 목회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린도전서 15:31) 갈라디아서 5: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청담 교회 교우 여러분!
‘바보들은 항상 결심만 한다’고 합니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 알의 밀 법칙을 알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누구나 알지만 아무나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은 고통과 죽음이 없는 넓은 길로 자꾸만 가려 합니다.
그러나 그 길은 진정한 생명의 길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예외 없이 고난의 골고다 언덕을 통해서 우리한테 부활의 새 생명을 주셨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모두도 예수님처럼 기도로 힘입고
‘한 알의 밀’ 법칙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6/09/18 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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