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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와 같이 하라(누가복음 10:25-37)

  

 

     ‘방관자 효과’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 구경꾼이 많으면 많을수록 방관자의 모습을 보인다고 하는데 이것을 ‘방관자 효과’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어 오셨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했는데 오직 베드로만이 용감하게 말합니다. 

“주여! 나를 명하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예수님께서 “오라”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물 위를 걷는 기적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있던 다른 제자들은 방관자였습니다. 

그들은 될 수 있을까? 생각하고 구경만 하였습니다. 

그래서 물 위를 걸어가는 기적을 직접 맛보지 못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방관자가 되기보다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사단의 전략 중의 하나가 시작을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시작하는데 준비가 많이 필요하신 분들은 잘 들으십시오.

그냥 있는 그 자리에서 시작하십시오. 

이것만 끝내고, 저것만 끝내고...  

여러분의 인생에 내가 기도하면 주님이 일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발걸음을 내디딜 때에 다른 사람이 맛보지 못하는 기적들을 맛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라도 방관자가 되어서는 역사의 주인공이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에 방관자 효과가 나타나면 교회는 제대로 설수 없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가 하겠지 생각하면서 서로 미룬다면 결국 교회는 

아무도 주인의식을 갖지 못함으로 발전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나 하나쯤 오늘 교회에 안 나가도 되겠지 생각하고 안 나왔는데 

그날따라 모두들 나 하나쯤이야 괜찮겠지 생각하고 안 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교회는 텅 비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라도 지켜야지 나만이라도 더 열심을 내야지 하기 시작하면 그곳에 부흥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주인의식이 필요합니다. 

내가 먼저 해야지 하는 솔선수범의 모습이 있는 교회가 바로 발전적인 교회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방관자들이 나옵니다. 

본문의 강도 만난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성전이 계신 곳입니다.  

성도인 우리들은 언제나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고 그곳을 사모하고 

그 곳이 우리들 삶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죄악과 향락이 가득한 곳이며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사는 도시입니다. 세상의 삶, 죄악의 삶, 육적인 삶을 사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강도 만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갔다는 것은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떠나 세상 중심, 죄악과 타락을 향한 삶으로 향하여 갔다는 것이 됩니다. 

예루살렘의 삶일 때에는 어려움이 와도 성령의 도우심이 있어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리고를 향하여 가는 길에서는 강도를 만날 수 밖에 없고 강도를 만나도 속수무책 당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서 세상중심의 삶으로 내려가면 

우리도 어김없이 강도를 만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즈음은 강도를 만나도 자기에만 피해가 오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나든지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옆집에 도둑이 들어와서 “도둑이야!” 소리치면 내 집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가 버리는 것입니다. 방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마저도 이렇게 문을 잠그고 남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교회는 교회의 사명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의 담임목사입니다.

답답하고 갈 곳이 없을 때 전화 주시기 바랍니다. 010-2762-7746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하신 명령의 말씀은 ‘하라’는 것과 ‘하지 말라’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와 같은 ‘하라’의 계명과 

“우상숭배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와 같이 ‘하지 말라’의 계명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지 말라’와 ‘하라’의 말씀은 모두 중요하되, ‘하라’는 말씀이 앞서가야 합니다.

‘하라’는 말씀에 적극적이 되어 보십시오. 

그러면 ‘하지 말라’는 이 모든 말씀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쓰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더 적극적인 태도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죄와 무관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다 보면, 이웃의 것을 탐내지 않게 되고, 

도적질하지 않게 되고, 간음하지 않게 됩니다. 

미워하지 않으려고 고민하며 애쓰는 것보다 용서하라는 말씀대로 용서하면 미워하지 않게 됩니다. 

교만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겸손하라는 말씀대로 겸손하면 교만하지 않게 됩니다. 

불평하는 자가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감사하면 불평하지 않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는 그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찾아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하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율법교사에게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하였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고 되물으셨습니다. 

율법교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율법교사는 유대인들만이 나의 이웃일 것이라고 당연히 생각하고는 ‘자신만만하게’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라고 다시 질문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싫어하는 당시에 천대받던 한 사마리아 사람이 베푼 선행 이야기를 하십니다. 사마리아인은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사람들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두드려 맞고 모든 것을 빼앗겨 거의 죽어가고 있는 상태에서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 때 세 사람이 지나가게 되었는데 한 사람은 제사장이었고 또 한 사람은 레위인이었고 또 한 사람은 멸시와 천대를 받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신음하며 도움을 청하는 그 사람을 목격했지만 자기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못 본체하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천대받던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아니하고 불쌍히 여겨서 가까이 가서 기름을 붓고, 싸매고, 여관주인에게 데리고 가서 돌보아주고, 그뿐 아니라 돈을 주며 돌봐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고도 부족하여 혹시 돈이 부족하면 아무 염려 없이 치료하면 내가 나중에 와서 돈을 더 낼 것이라고까지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이웃이라고 생각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율법학자는 한대 얻어맞은 사람처럼 서 있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생각과는 너무나 의외의 대답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국어 사전에 보면 이웃이란 ‘나란히 이어서 경계가 서로 접하여 있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의 이웃은 누구입니까? 

 

신학교 1학년 때는 해변에서 사람이 물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것을 보면 

옷 입은 채 물에 뛰어 들어간다고 합니다. 

그러나 2학년이 되면 튜브를 던진다는 것입니다. 

이제 졸업반이 되면 뛰어 들어가지도 않고 튜브를 던지지도 않고 밖에서 “기도할께요” 라고 한다고 합니다. 

 

남을 도우려면 자기희생이 필요합니다. 

자기의 것을 희생해야 남을 도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사람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귀찮다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혹 내가 이렇게 한다고 누가 알아주기나 할까? 하는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리아인은 죽어 가는 자를 끝까지 인도해 주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은 강도 만난자의 아픔을 보는 순간, 아무 조건 없이 불쌍히 여기는 뜨거운 가슴이 불탔습니다. 그래서 그저 말없이 행동합니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환자에게 나누어 주는, 행동하는 사랑을 하였습니다. 34절에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동사형이 계속 나옵니다. 

이것이 행동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성경도 말씀하십니다. 요한일서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마리아 사람은 자기 물질을 나누었습니다. 

참 사랑은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의 재물은 하나님이 나만을 위해서 쓰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이미 우리에게 주신 재물의 일부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한 물질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누는 사람에게 물질을 맡기시지, 나누지 않는 사람에게는 물질을 맡기지 않습니다.

전도서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어떻게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쓰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돌아보면 우리들의 도움을 기다리는 이들이 참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 많은 노숙자, 그 많은 가난한 사람, 카드 빚진 자들을 감당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최선을 다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도 최선을 다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까지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여 자기를 십자가에서 희생하셨습니다. 모든 피와 물과 살을 주셨습니다. 

그분이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내가 도울 이웃은 누구인가를 이 시간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이웃을 구체적으로 실질적으로 도우시기를 바랍니다.  

사마리아 사람처럼 불행한 이웃들의 참된 이웃이 되어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히브리서 9장 ~ 야고보서 2장

 

9장

1-10절 불완전한 첫 언약의 제사와 그 의의, 4절 

11-22절 완전한 새 언약의 피 제사, 22절

23-28절 단번에 성취된 영원한 제사, 27절

 

10장

1-18절 그리스도 피제사 효과의 영원성, 17-18절

19-25절 구속받은 자의 특권과 의무, 24-25절

26-31절 배교에 대한 경고 28절 신명기 17장 6절

32-39절 신앙 성장에 대한 권면, 37-39절

 

11장

1-3절 믿음의 본질

4-7절 믿음의 실증 1, 아브라함 이전의 믿음의 조상들

8-22절 믿음의 실증 2, 구약의 족장들

23-31절 믿음의 실증 3, 모세로부터 가나안 입성까지의 믿음의 조상들

32-40절 믿음의 실증 4, 사사시대 이후 믿음의 조상들

 

12장

1-3절 인내로써 경주해야 할 신앙인의 삶

4-13절 성도가 받는 징계의 유익 8절

14-17절 화평과 거룩함에 대한 권면

18-29절 새 언약을 거역함에 대한 경고 29절

 

13장

1-6절 선행에 대한 권면

7-17절 바른 교훈에 대한 순종 권면

18-21절 기도 요청과 축원

22-25절 마지막 권면과 축도

 

야고보서 

저자는 예수님의 형제로 나중에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 된 야고보

야고보가 로마 제국 각지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 출신 성도들에게 보낸 서한

신약의 잠언

 

1장 

1절 문안 인사

2-12절 시련 중의 성도의 신앙 자세

13-18절 사단의 유혹을 이기는 비결 14-15절

19-27절 하나님 말씀 안에 거하는 신앙 생활 권고 19-20절

 

2장

1-13절 형제 차별 책망과 형제 사랑 권면

14-26절 행함으로 입증되는 믿음 19절, 26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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