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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되는 길 (빌립보서 4:1-3)

목사님 0 289

   

 

     오늘은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 설날입니다. 이러한 설날의 어원에 대해서는 ‘낯설다’라는 말의 어근인 “설”에서 그 어원을 찾습니다. 

그래서 설날은 ‘새해에 대한 낯 설음’ 또는 ‘아직 익숙하지 않는 날’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고들 합니다. 세상은 살면서 낯 설었던 것들에 익숙해 져야. 

믿는 우리들은 먼저 하나님의 언어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기업이 성공하려면 소비자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상품을 내놓아도 소비자들의 생각을 읽는 데 실패하면 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누구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하느냐? 

교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가 되기를 원하시는지,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수 있는지 그것을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읽는 방법은 무엇인가? 성경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생각과 뜻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를 부흥시키려면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만한 행사도 해야 하겠지만 그냥 말씀으로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갈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이고, 이것이 교회가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설날은 흩어진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조상에게 차례지내고 

어른에게 인사하고 서로 덕담을 주고받는 날입니다. 

그래서 설날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새해에 입는 새 옷인 ‘설빔’을 입고, 

예수 믿지 않는 가정에서는 ‘차례’를 지내고, 믿는 가정에서는 조상들을 기리는 예배를 드립니다. 

그 후에 집안의 어른들에게 절을 하고 새해의 첫인사를 드리게 되는데, 이를 ‘세배’라 합니다. 세배를 할 때에는 새해 첫날을 맞아서 축복해 주는 ‘덕담’을 주고받습니다. 그리고 답례로 세뱃돈을 주는데, 세뱃돈 풍습은 조선시대에 세배하러 온 아이들에게 떡이나 과일 등을 내주기도 하던 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돈을 주는 것으로 바뀌어졌습니다. 

지금 불경기라서 3만원짜리 지폐도 있었으면 좋겠다고.

기준 초등학생 3만원, 중학생 5만원, 고등학생, 대학생 10만원

차례와 세배 후 먹는 음식, 떡국을 세찬이라고 하며, 또한 이에 곁들인 술을 세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중국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지 않던 복음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받아 들였습니다. 

그 영향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렇게 잘 살게 되었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나라가 이만큼 잘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자원이 많습니까? 인간성이 좋습니까? 칭찬을 잘 합니까?

그래도 우리 민족이 전 세계적으로 잘하는 것은 예수 믿는 것.

우리나라도 기독교가 들어와 여성이 해방되었고 교육 기관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고맙게도 기독교를 받아들인 우리 나라는 잘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정작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하는 일입니다. 그것만이 우리나라의 미래가 밝아질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자녀들에게 물려 줄 것도 신앙 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자식들에게 다른 것 물려 줄 생각하지 마시고, 신앙의 유산을 물려 주셔야 합니다.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러려면 먼저 본을 보이셔야 합니다. ‘신앙의 본’

오늘 나의 삶도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던 우리 후손들에게 유산으로 남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살아야 됩니다. 

내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후손에게 영향을 주기 때문에,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할 것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에는 어떻게 신앙 생활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 보고 신앙생활이 나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고민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된 빌립보 교회는 사도 바울이 제2차 전도 여행 중에 세운 유럽 최초의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마게도냐의 첫 성인 빌립보에 들어가서 안식일을 맞이하여 예배드릴 회당을 찾았는데 회당이 없어 조용히 기도하려고 강가로 나갔다가 거기서 루디아를 만나 전도하게 되고, 그러자 루디아가 마음 문을 열어 예수님을 영접하고, 자기 집을 개방하여 그 가정에서 교회가 시작됩니다. 요새말로 하면 가정교회인 셈입니다. 

유럽 최초의 교회는 이렇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건물을 세우고 시설을 갖추어서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이 빌립보 교회가 위치한 마게도냐 지방은 여인들의 위치가 좀 특별했던 것이 역사적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선 마게도냐 지방은 모계사회이었다고 합니다. 

지금 대부분의 나라들은 자녀가 아버지의 성을 따르는 이른바 부계사회인데 마게도냐는 어머니의 성을 따르는 모계사회였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부인이 사회적으로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남편들이 기념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열녀비는 있으나 부인이 사회를 위해 큰일을 했다고 공덕비를 세워주는 예는 없습니다. 그런 문화권에 있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역시 여성들이 주도적으로 활동했다고 합니다.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된 빌립보 교회는 모름지기 여성 주도적인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전체 교인 가운데서 소위 지도자급에 속한 분들이 여성입니다. 

따라서 그에 따른 장점이 있는 반면 단점도 있었습니다. 

우선 여성 특유의 장점인 사랑이 넘쳤다는 것은 무엇보다 큰 장점이라 하겠습니다. 상부상조가 잘되고 봉사정신이 두드러졌습니다. 

바울이 옥에 갇히자 다른 교회에서는 ‘또 갇혔나 보다’ 생각하고 기도만 했지만 빌립보 교회는 여성 특유의 그 따뜻한 모성애를 발휘합니다. 

사도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소식을 듣자 ‘얼마나 춥고 배고플까, 얼마나 불편할까’ 이런 생각을 하면서 헌금을 모아 한 겨우내 바울을 잘 돌보아 달라고 위로금을 로마로 보냅니다. 

이렇게 사랑을 베푸는 것이 빌립보 교회의 장점입니다. 

그러나 시기와 질투가 승했다는 것은 큰 단점이었습니다. 

이 시기와 질투가 분쟁의 씨앗이 되어 파벌이 생기고 서로 양보없이 맞서 서로 주도권 싸움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빌립보 교회의 가장 큰 문제거리는 바로 이런 점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사탄 마귀는 갈라 놓는 영입니다. 어떠하든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부도 가정도 교회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시기와 질투는 선한 일에까지 찾아드는 죄입니다. 악한 세계에만 시기와 질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데도 있고 믿는 사람에게도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이 모여서 좋은 일을 하고자 하는 거기에도 시기, 질투는 따라 다닙니다. 이 시기와 질투는 마귀가 시험하는 것 중에 레벨이 높은 시험에 속하는 것입니다. 혹시 생각하시기를 세상이 문제가 많으니까 ‘그러면 내가 첩첩산중에 가서 살아야지, 하거나 기도원에 가서 기도만 하면서 살면 좋겠다’라고 생각하실 줄 모르지만 거기에도 시기와 질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보면 “내가 유오디게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합니다. 

지금 빌립보 교회의 문제점은 시기와 질투요 거기 따르는 분쟁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어쩌면 이 편지에서 ‘너희들 그러면 못쓴다’라고 하고 싶었을 것이지만 굳이 아픈 데를 찔러서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는 것은 그렇게 좋은 방법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대하여 높은 차원에서 그들에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왜들 싸우고 야단이냐, 그러면 못쓴다’라거나 누구는 잘했다 누구는 못했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한 마디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말합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분명히 누군가가 잘못했고 누구는 조금 더 잘했겠지만 이것을 전혀 가리지 않고 사도 바울은 다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하나되라’ 이렇게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에는 두 여인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들이 교회 분쟁의 양대 세력이었던 모양입니다. 

이 둘이 버티고 있는데 이제 사도 바울은 조심스럽게 충고하고 있습니다. 

충고 가운데 하나 되는 비결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주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생활을 같이 하라, 사업을 같이 하라는 등의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하나 되라고 합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하면서 ‘주 안에서’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마음의 문제요 신앙의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같은 마음을 가지려 한다고 해서 같은 마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두 사람을 하나 되게 할 수 있는 구심점이 있어야 합니다. 

수평적인 관계에 앞서 수직적인 일치부터 있어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남편이 주님을 사랑하고 부인도 주님을 사랑한다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함께 앉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고, 다 같이 교회에 나가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어떻게 하나가 되지 않겠습니까? 

반대로, 아무리 같이 살고 별일을 다 한다 해도 신앙적으로 하나 되지 못하면 이것은 하나가 아닙니다. 거듭 말하거니와 주님의 사랑 안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 안에서만 진정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수직적인 사랑을 떠나서는 일치가 불가능한 것입니다. 

사실이지 성도의 교제라는 것이 얼마나 좋은 것입니까?

만날 때마다 반갑습니다. 가까이 지내다보면 부모형제보다 더 밀착됩니다. 

여러분이 오늘이라도 무슨 어려운 일을 당한다면 진정으로 기도해 줄 사람이 누구입니까? 진심으로 당신의 영혼을 위하여 기도해 줄 사람은 집사님들과 셀리더들 아니겠습니까?

왜? 성도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맺어진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사업 관계니 이해 관계니 동창 관계와 같은 세상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고 내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신앙적인 고백에 기초한 이러한 관계야말로 가장 절실하고 강한 유대 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 합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 되고, 이 구원받은 간증 안에서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나와 멍에를 같이 한 자’라고 합니다. 

농사를 지을 때 소 두 마리가 같은 멍에를 메고 같이 끌고 갑니다. 

따라서 두 마리는 보조가 맞아야 합니다. 

그래서 두 마리가 똑같이 발을 맞추어서 앞으로 나가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멍에를 같이 했다는 말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멍에를 같이 했다’는 말은 본디 부부간을 이야기할 때에 쓰는 말입니다. 적당히 협력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똑같이 균형을 잡을 동반자이며, 책임도 똑같이 지는 것입니다. 

이쪽이 무너지면 저쪽도 무너집니다. 이쪽이 갈 때에는 저쪽도 가야 합니다. 이것이 동반자의 걸음입니다. 같이 살고 같이 죽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회 초기에 교회 설립을 위해 모두가 많은 수고를 하였습니다.

감옥에도 가게 되고 매도 맞고 그러다 보니 기도도 많이 하고 헌신도 아낌없이 하였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지난 날 협력하여 이루어 놓은 거룩한 사업과 업적을 생각할 때 오늘의 사소한 문제들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직 지난 날 함께 멍에를 메었고 복음 전파에 한 마음으로 힘썼다는 그런 각성과 인식을 가질 때에 자연히 하나 될 수 있다고 바울은 그 비결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3절을 보면 ‘도우라’고 두 번이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협력하는 자세로, 적극적인 자세로 도와야 합니다. 

대체로 분쟁하고 시비를 벌일 때면 사람들은 대부분 소극적이 됩니다. 

나쁜 말로 하면 ‘될대로 되라’는 자세입니다. 

깨질테면 깨져라, 망할테면 망해라 하고 관망합니다. 

교회에도 적극적인 참여자가 많을 때 서로가 은혜를 받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교회에는 소망이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 일독에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새하늘 교회 단체카톡방에 매일 성경을 읽고 다 같이 참여를 합니다.

굉장히 좋은 징조라고 생각합니다.

교회가 부흥하려면 이탈자가 없어야 합니다. 

좋은 계획을 세웠다가도 이탈자가 생기면 풍선에 바늘로 찌르는 것과 같이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런 면에서 올해에는 우리 교회 모두가 적극적으로 교회 일에 참여하고 같이 이끌어 주어서 부흥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모두가 다 이것이 과연 덕이 되는가? 이것이 과연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가? 우리 교회를 위해서 유익한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인식입니다. 믿는 우리들은 천당 가면 서로 만나야 할 사이요, 오늘 보고 그만 둘 사람이 아닙니다. 이것은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생명의 면류관은 나만이 아니라 너희에게도 주실 것이니 그때 만나자는 종말론적인 친교관계를 말합니다. 우리 성도의 교제란 이래서 중요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사랑하는 자라도 예수를 믿지 않으면 그 사람과는 이 세상에서 끝이 납니다. 그러나 성도는 하늘나라에서 만납니다.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그러니 지금 내 기분에 맞느니 맞지 않느니, 네 의견이 나쁘다느니 틀리다느니 그런 이야기 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 함께 생명책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먼저 간 믿음의 조상도 만나야 되겠고 그리고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도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하늘나라에 가서 또 만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합니까? 멍에를 같이 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식하고, 종말론적인 친교의 의미를 재확인할 때에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기쁘게 자발적으로 참여케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5장, 데살로니가후서 1-3장, 디모데전서 1장

 

데살로니가전서 3장

1-5절 디모데를 파송한 동기와 목적

6-10절 디모데의 보고와 바울의 기쁨, 7,8절

11-13절 바울의 중보 기도

 

4장

1-12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활, 성결과 근면, 11-12절

13-18절 재림과 성도의 부활에 대한 교훈, 13절

 

5장

1-11절 재림을 맞는 성도의 자세에 관한 교훈, 2절과 4절의 모순?

깨어있으면 강도도 손님.

12-22절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의 일상 생활에 대한 교훈, 14절

23-24절 바울의 마지막 기도, 24절

25-28절 끝맺는 말

 

데살로니가후서 

데살로니가전서는 디모데로부터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굳건한 신앙 상태에 대한 보고를 들은 바울이 기쁜 마음으로 쓴 것인 반면

데살로니가후서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재림이 임박한 것으로 오해하여 규

모없는 삶을 산다는 소식을 접한 후 기록한 것으로 살전 이후 2-3개월 후.

 

1장

1-2절 문안 인사

3-10절 교회에 대한 감사와 격려, 6, 7절

11-12절 교회를 위한 간구

 

2장 

멸망하는 자들

1-2절 종말 교훈에 대한 바른 자세

3-4절 배도하는 사람의 출현 예언

5-8절 불법한 사람의 활동과 멸망

9-12절 불의한 자에게 임하는 종말의 심판

13-17절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에 대한 권면과 기도

 

3장 

1-5절 기도의 요청과 바울의 기도  2절

6-15절 규모있는 생활에 대한 권면, 게으름  10절

16-18절 맺음말

 

디모데전서

바울이 당시 에베소 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보낸 첫 번째 편지

로마 1차 투옥에서 풀려난 바울이 마게도냐 여행 중에 당시 에베소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여런 현안들에 대한 목회 지침을 주고자 써 보낸 서신

유대주의적 율법주의와 영지주의의 위협.

 

1장

1-2절 문안 인사

3-11절 이단에 대한 경계

12-20절 바울의 신앙 간증과 디모데에 대한 복음의 진리 수호 권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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