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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디모데후서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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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목요일은 우리 민족의 명절, 추석입니다.
추석은 음력 8월 15일로 한가위라고도 부르는데 ‘한’이라는 말은 크다는
뜻이고 ‘가위’라는 말은 가운데라는 뜻을 가진 옛말로
8월 15일인 한가위는 8월의 한가운데에 있는 큰 날이라는 뜻입니다.
추석은 아주 오래 전부터 조상 대대로 지켜 온 우리의 큰 명절로 햇곡식과 햇과일로 조상들에게 차례를 지내고, 이웃들과 서로 나눠 먹었다고 합니다.
한가위는 설날과 더불어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예수님의 윤리가 가장 분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대목이 바로 누가복음 10장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게 논리적으로 철학적으로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간단한 사건을 들어 이야기 해 주시면서 그 속에 귀중한 해답을 주고 계십니다.
‘여기에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다. 제사장은 그를 보고 그대로 지나갔다. 레위사람도 그를 외면하고 지나갔다. 그러나 너희가 업신여기는, 상종하기도 꺼리는 저 천한 사마리아 사람이 길을 멈추고 그를 보아주었느니라’
그러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사람다운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누가 하나님의 사람이냐고 물으십니다.
그리고 그 결론은 예수님께서는 행함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 또 불쌍한 사람에 대한 뜨거운 눈물, 감정...
이런 것이 네 마음에 있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됐다고 생각하고, 불쌍하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대체 무슨 소용이란 말입니까? 손을 펴서 이 사람을 구제한 바로 그 사람만이 주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간디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굶주린 배를 안고 잠자리에 들 수밖에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을 납득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빵을 주는 일 밖에 없다’ 배고파 죽어가는 사람에게 구구한 논리가 필요 없습니다.
아무 설명도 따로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마지막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그런 면에서 오늘 특별감사헌금에 한 분도 빠짐없이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불가리아 김영중 선교사님.

감사 찬양, 봉헌, 한가위 감사헌금.

창세기 32장 9절을 보면 “내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 내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 내게 명하시기를 네 고향, 네 족속에게로 돌아가라.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리라 하셨나이다”라는 야곱의 기도가 나옵니다.
그는 형 에서의 노여움을 샀기에 외삼촌 집에서 살다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되어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며, 그 고향으로 돌아가기를 소원합니다. 이번 추석에도 많은 사람들이 귀성길에 오를 것입니다.
우리 교회의 특징, 명절에도 별로 영향을 안 받아.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고향에는 사랑하는 부모 형제와 내 민족들이 살기 때문에 주는 편안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미국 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와 보니 그렇게 마음이 편할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 있듯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우리들이 사모해야 할 곳은 바로 영원한 안식처요, 우리 영혼의 고향인 저 천국 하늘 나라입니다.
우리의 참된 고향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나라입니다. ㄴㅁ그래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20에서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고 했던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에게 물어 보았습니다. 아들이 목사인데.

오늘 본문은 로마에 있는 바울 참수 교회에 적혀 있는 본문입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의 죽음의 날이 임박해 왔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의 떠날 시강이 가까웠도다 라는 말로 자신의 죽음이 순식간에 다가 왔음을 말합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증거 하다가 로마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그곳에서 바울은 자신에게 죽음의 때가 다가옴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제자인 디모데에게 마지막으로 서신을 보낸 것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는 바울에게서 전혀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인생에 대한 아쉬움을 찾아 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합니다. 바울이 죽음 앞에서도 이처럼 당당한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입니다.

하나는 믿음의 경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천국을 향한 마라톤에 최선을 다했다는 것입니다.
마라톤에서 완주를 하고도 힘이 남아 돌아 트랙을 계속 도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경주에 최선을 다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힘이 남은 사람은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마라톤 경주에 참여하지 않는 것처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천국을 향해 달려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재미있고 즐겁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많은 것을 누리며 살 수 있을까?’를 우선 순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믿는 우리들은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늘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생각이 달라야 하고, 관심이 달라야 하고, 가치관이 달라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이 세상의 가치관, 독을 빼는 작업.

오늘 우리들이 심신을 다 바쳐 추구하고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지금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있습니까? 혹시 가짜를 위해 전심전력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즉 진정한 인생의 우선순위를 점검해 볼 때입니다.
신명기 6:5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그리고 그 사랑의 표현에서 제일 중요한 부분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우리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분주하고 복잡해도 예배가 첫째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는 은혜의 통로요 축복의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집중해야 세상에 나가서 승리합니다.
세상 일에 집중해야지 인생의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이야 말로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그런데 천국을 향해 마라톤에 참여 한 사람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중도에 탈락합니다.
초반에 탈락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간 지점에 탈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목표 지점을 얼마 남겨 두지 않고 안타깝게 포기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6: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또 한 가지 바울이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는 그 경주 후에 상급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천국에서의 상급을 믿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천국을 향하여 경주하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사랑하는 새하늘 청담 교회 교우 여러분!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이제 이 사실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사람들은 자꾸만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은 것이 사람의 마음일 것입니다.
2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하나님께서는 저와 여러분들에게 바로 이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늘 나라를 바라보며 사는 자들답게
이 땅에서 죽어가는 많은 영혼들에게 복음을 담대히 전하여
의로우신 재판장 앞에 당당하게 서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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