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너는 나를 따르라! (마태복음 8:18-22)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대서양을 건너던 배가 높은 풍랑과 파도를 만나 침몰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한 젊은 선원이 널빤지를 타고 용케 표류되어 무인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는 모래밭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사람들 다 죽는 때에 저 하나를 살려 주신 은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섬을 돌아 보았는데, 무인도라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짐승들을 돌로 때려 잡고, 돌을 갈아서 불씨를 만들어 구워 먹기도 하고, 이렇게 생존하면서 누군가 나타나 구출해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배가 지나가면 기다란 장대 끝에 옷을 찢어 매달아 하루 종일 흔듭니다. 그러나 배는 그냥 지나갑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와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필사의 노력으로 오두막집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갔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불씨가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에 기껏 지어놓았던 움막집이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 앞에 원망기도를 드립니다.
“사람들 죽을 때 저도 죽게 내버려 두시지 왜 저를 살려 두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십니까? 겨울 나려고 집 하나 만들어 놓은 것까지 이렇게 홀랑 태워버릴 수 있는 겁니까? 하나님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원망, 원망 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기도를 드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부웅’ 뱃고동 소리가 들려옵니다. 깜짝 놀라 뛰쳐 일어나 달려가 보니 큰 배가 가까이 옵니다.
드디어 그는 구출받게 됩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우리가 당신이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불길이 오르고 연기가 나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왔지요” 내가 지어 놓은 이 움막집이 불타버리고 없어져야 살 길이 생긴다는 것을 이 사람은 몰랐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들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마주 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간적인 것, 찰라적인 것을 달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것, 물질적인 것에 매여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받았느니, 또 때로는 저주받았느니 하면서 변덕을 부립니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일대학교 교수 ‘야로슬라브 펠리칸’이란 분이 쓰신 ‘예수의 역사 2000년’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결정되는 것이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또 예수를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그 가정, 그 나라의 흥망성쇄가 달려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새해를 맞았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더 짚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2016년’이라고 말하는데 그 근거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서기 2016년 곧 주후 2016년인 것입니다.
기원전, 즉 B.C는 ‘before christ’ ‘예수 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주후를 말할 때는 ‘after christ’가 아니고 A.D입니다.
A.D는 ‘Anno Domini’입니다. ‘Anno’는 해, 년이고, ‘Domini’는 ‘우리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A.D는 ‘우리 주의 해’, 영어로는 ‘in the year of our Lord’입니다. 이것이 A.D입니다.
그러니까 A.D의 정확한 뜻은 ‘주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똑바로 알고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야말로 아멘, 할렐루야입니다.

말씀 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표현한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은 ‘깊은 관찰력’입니다.
같이 한평생 따라다닌다고 그것만으로는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줄레줄레 따라다닌다고 제자입니까? 그의 뜻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하는 일을 깊이 관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저 분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는지, 저렇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그 뜻, 그 깊은 의미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스승의 뜻을 알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번째 이름이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을 왕으로 모시고 살다가 이제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면서 구별된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습니다.
지극히 교회론적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이름이 ‘크리스찬’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새 술에 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 초이성적입니다. 술에 취해도 이성을 잃지만 새 술에 취해도 이성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전적으로 주님께 삶을 위탁하여 사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린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서 그 영이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몸을 지배하고, 내 감성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이끌리어 사는 그 사람, 그 사람을 크리스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중심을 얼마나 잘 보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하자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면 출세할 것 같고, 화려한 미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예수님을 따르겠다 하는 것으로 저의 마음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나는 집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난하다, 나를 따라오면 고생할 것이다,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자야할 지 그것도 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엉뚱하지요, 자 이 말씀 끝에 그 서기관이 “주여,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만 말이 없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입으로는 따르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를 관찰하지 못해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그 이적, 기적, 능력만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서기관은 값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따르는데 대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마땅한 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이 값을 지불함이 없이, 이 각오가 없이 주를 따르겠다는 것이니 문제인 것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싸구려 은혜를 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16장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이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따르기는 따르겠는데 부친을 장례하고 따르겠다 합니다.
조금 연기해달라는 신청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엄청난 진리의 말씀입니다. priority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물론 선을 따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같은 선 중에서는 무엇이 더 우선적인 선이냐,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우선, 그것이 문제입니다. 절대우선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는 부득불 그 차선, 그 다음의 일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은 차선책입니다.
절대 우선, 예수님 따르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고 나서 따르겠다,
한 번 미루어 놓으면 미룬 일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일을 미루다 보면 그 일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 하겠다, 얼마 후에 하겠다, 하면서 한 일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돈 벌어서 헌금 하겠다는 사람 대체로 헌금 하는 것 못 보았습니다.
얼마가 되었든지 지금 딱 잘라서 낼 테면 내고 말려면 말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하셔야 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지금 당장, 이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내가 할 일이요,
예수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당하고, 더 많이 고난당하고, 더 철저하게 고난당하는 것, 이것만 내가 할 일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대서양을 건너던 배가 높은 풍랑과 파도를 만나 침몰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죽었는데 한 젊은 선원이 널빤지를 타고 용케 표류되어 무인도에 다다르게 됩니다. 그는 모래밭에 엎드려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사람들 다 죽는 때에 저 하나를 살려 주신 은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리고 섬을 돌아 보았는데, 무인도라 아무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살기 위해서 짐승들을 돌로 때려 잡고, 돌을 갈아서 불씨를 만들어 구워 먹기도 하고, 이렇게 생존하면서 누군가 나타나 구출해 주기만을 기다렸습니다. 배가 지나가면 기다란 장대 끝에 옷을 찢어 매달아 하루 종일 흔듭니다. 그러나 배는 그냥 지나갑니다.
어느덧 겨울이 다가와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필사의 노력으로 오두막집을 완성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사냥갔다가 저녁 즈음에 집에 돌아와 보니 불씨가 바람을 일으키는 바람에 기껏 지어놓았던 움막집이 불에 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 앞에 원망기도를 드립니다.
“사람들 죽을 때 저도 죽게 내버려 두시지 왜 저를 살려 두어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십니까? 겨울 나려고 집 하나 만들어 놓은 것까지 이렇게 홀랑 태워버릴 수 있는 겁니까? 하나님 이러실 수 있는 겁니까?”
원망, 원망 하면서 하나님 앞에 불평하는 기도를 드리다가 지쳐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잠결에 ‘부웅’ 뱃고동 소리가 들려옵니다. 깜짝 놀라 뛰쳐 일어나 달려가 보니 큰 배가 가까이 옵니다.
드디어 그는 구출받게 됩니다. “어떻게 알고 이렇게 오셨습니까?”
“우리가 당신이 여기에 있는 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불길이 오르고 연기가 나기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고 왔지요” 내가 지어 놓은 이 움막집이 불타버리고 없어져야 살 길이 생긴다는 것을 이 사람은 몰랐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들도 이런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내 뜻이 서로 마주 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간적인 것, 찰라적인 것을 달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현재의 것, 물질적인 것에 매여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때로는 복받았느니, 또 때로는 저주받았느니 하면서 변덕을 부립니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예일대학교 교수 ‘야로슬라브 펠리칸’이란 분이 쓰신 ‘예수의 역사 2000년’이란 책이 있습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서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서 역사의 방향은 결정되는 것이다, 라고 갈파했습니다.
예수를 받아들이느냐 거절하느냐, 또 예수를 받아들이면 어느 정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 그 가정, 그 나라의 흥망성쇄가 달려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미 새해를 맞았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더 짚고 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2016년’이라고 말하는데 그 근거와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습니다. 서기 2016년 곧 주후 2016년인 것입니다.
기원전, 즉 B.C는 ‘before christ’ ‘예수 전’을 뜻합니다.
그런데 이제 주후를 말할 때는 ‘after christ’가 아니고 A.D입니다.
A.D는 ‘Anno Domini’입니다. ‘Anno’는 해, 년이고, ‘Domini’는 ‘우리 주’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A.D는 ‘우리 주의 해’, 영어로는 ‘in the year of our Lord’입니다. 이것이 A.D입니다.
그러니까 A.D의 정확한 뜻은 ‘주님이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똑바로 알고 새해를 맞이한다면 그야말로 아멘, 할렐루야입니다.

말씀 수여

예수 믿는 사람들을 표현한 단어가 몇 가지 있는데 그 첫 번째가 ‘제자’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들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제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자에게 요구되는 첫 번째 덕목은 ‘깊은 관찰력’입니다.
같이 한평생 따라다닌다고 그것만으로는 제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줄레줄레 따라다닌다고 제자입니까? 그의 뜻을 알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자는 스승이 하는 일을 깊이 관찰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저 분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하는지, 저렇게 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그 뜻, 그 깊은 의미에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먼저 스승의 뜻을 알고 함께 할 때 비로소 제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두 번째 이름이 ‘성도’입니다.
‘거룩한 무리’입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나 재물을 왕으로 모시고 살다가 이제는 예수를 믿고 그리스도를 왕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모시면서 구별된 공동체의 일원이 될 때 우리는 성도라고 하는 이름을 얻습니다.
지극히 교회론적 의미가 있는 이름입니다.

그 다음에 또 하나의 이름이 ‘크리스찬’입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사람들입니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새 술에 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새 술에 취했다, 초이성적입니다. 술에 취해도 이성을 잃지만 새 술에 취해도 이성을 잃고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전적으로 주님께 삶을 위탁하여 사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에 이끌린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장 9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있어서 그 영이 내 이성을 지배하고, 내 몸을 지배하고, 내 감성을 지배하고, 그리고 그리스도의 생명력에 이끌리어 사는 그 사람, 그 사람을 크리스찬,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우리들의 중심을 얼마나 잘 보는지를 보여줍니다.

오늘 본문에서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하자 예수님께서 이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시지 않으시고 엉뚱한 말씀을 하십니다.
무슨 말씀인고 하면 아마도 예수님께서는 이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가면 출세할 것 같고, 화려한 미래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서 청운의 꿈을 안고 예수님을 따르겠다 하는 것으로 저의 마음을 읽으신 것 같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나는 집도 없는 사람이다, 나는 가난하다, 나를 따라오면 고생할 것이다, 오늘 밤 당장 어디에서 자야할 지 그것도 정하지 못한 사람이다.
엉뚱하지요, 자 이 말씀 끝에 그 서기관이 “주여,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겠습니다.”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마는 그만 말이 없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입으로는 따르겠다고 하지만 예수님이 누구신지, 그가 어디로 가고 계시는지를 관찰하지 못해 제대로 알지를 못했습니다.
그 서기관은 예수님의 그 이적, 기적, 능력만 보고 감탄하여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제자가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서기관은 값싼 은혜를 생각했습니다. 예수님 따르는데 대한 대가를 지불할 생각을 못했습니다. 마땅한 값을 지불해야 되는데, 이 값을 지불함이 없이, 이 각오가 없이 주를 따르겠다는 것이니 문제인 것입니다.
요즈음도 보면 예수를 믿으면서 싸구려 은혜를 구하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됩니다.
16장 24절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또 한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나섭니다. 이 사람은 조금 다릅니다.
따르기는 따르겠는데 부친을 장례하고 따르겠다 합니다.
조금 연기해달라는 신청입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하십니까?
“죽은 자들이 그들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엄청난 진리의 말씀입니다. priority의 문제입니다.
무엇이 더 중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앞에 있는 여러 가지 일 중에는 선과 악이 있습니다. 물론 선을 따라야 하겠지요, 그런데 같은 선 중에서는 무엇이 더 우선적인 선이냐, 이게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절대우선, 그것이 문제입니다. 절대우선적인 것을 위해서 우리는 부득불 그 차선, 그 다음의 일은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을 발전시키지 못하는 것은 차선책입니다.
절대 우선, 예수님 따르는 것은 모든 것에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고 나서 따르겠다,
한 번 미루어 놓으면 미룬 일은 실천하기가 어렵습니다.
오늘 당장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일을 미루다 보면 그 일 못하게 됩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내일 하겠다, 얼마 후에 하겠다, 하면서 한 일 있으십니까? 지금 당장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돈 벌어서 헌금 하겠다는 사람 대체로 헌금 하는 것 못 보았습니다.
얼마가 되었든지 지금 딱 잘라서 낼 테면 내고 말려면 말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것을 하셔야 합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 지금 당장, 이런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깊이 생각하셔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받는 것은 내가 할 일이요,
예수와 함께 영광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시는 은사입니다.
예수와 함께 고난당하고, 더 많이 고난당하고, 더 철저하게 고난당하는 것, 이것만 내가 할 일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께 맡길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지금 나를 따르라”
다같이 기도하시겠습니다.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