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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요한계시록 3:20-22)

목사님 0 501

   

 

     우리가 살아가면서 축복을 받으려면 영적전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영적세계는 철저한 전쟁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어 축복을 받는다고 쉽게 생각하지만 그것 역시 철저히 영적전쟁에서 승리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보면 축복은 다 이기는 자에게 주신다고 주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면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영적인 전쟁에서 쉽게 물러나는 것입니다. 

인생 자체가 영적 전쟁인 것을 알아야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승리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 이기게 됩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편에 서는 사람이 이깁니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 있으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공부를 하고, 사업을 해고, 직장 생활을 해도 하나님 편에 서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승리합니다. 

그런데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려면 먼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우리의 마음 문을 열고 하나님을 받아 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22절의 말씀을 보면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귀가 다 같은 귀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지난 설교에서 말씀드렸지만 기독교 신앙은 보고 믿는 종교가 아니라 듣고 믿는 종교라고 하였습니다. 

20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얼마나 우리와 교제하기를 원하시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세상에는 재미있는 것도 많고, 해야 할 것도 참으로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선으로 해야 할 것은 하나님과 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마음이라는 것이 신기해서 열려야 할 때는 잘 열리지 않고 

열리지 말아야 할 때는 잘 열리는 법입니다. 

근심과 염려, 자존심 상하는 말이 들어오면 열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들어와서 마음의 주인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다른 종교는 인간의 노력으로 구원의 경지에 이르려고 노력하지만  

기독교는 먼저 이 땅에 찾아 오신 하나님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문을 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문을 두드리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기 바랍니다. 

그리고 문은 안에서 열어야 합니다. 아무리 밖에서 두드려도 안에서 결단하지 않으면 문은 열 수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셔도 우리 스스로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으면 하나님을 내 안에 영접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마음의 문을 열고 영접하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축복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결단이 하나가 될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리 집 나간 탕자를 위해 아버지가 문 밖에서 기다리셔도 결단하는 사람은 아들 탕자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삶에 대한 회의, 신앙에 대한 부끄러움, 아버지에 대한 불효가 떠올라 견딜 수가 없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 

비로소 아버지를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정부가 중요시하는 가치는 공정과 상식이라고 합니다. 

제발 정부의 운영이 공정하고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공정함에 대한 하나님의 식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공정함에 있어서 중요한 하나님의 방법은 심판을 최대한 미루면서 어떻게 하던지 사람을 살리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잘못되었으니까 자르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여 고쳐서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저도 목사직을 내려놓아야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제가 죄인이라고 쉽게 포기하지 않으시고, 가르치시고 고치셔서 할 수 있는 대로 계속 당신의 일군으로, 당신의 종으로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우리와 하나님의 다른 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크게 귀하게 쓰셨던 사람들을 보면 다 나름대로 큰 허물이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극찬을 하셨던 다윗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간음을 했던 자이고 그것을 은폐하기 위하여 정부의 남편을 살해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와 같은 그의 과오를 생각하면 그는 절대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 될 수 없는 사람이며, 절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물론 하나님도 다윗의 죄를 경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의 그와 같은 죄에 인간으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벌을 주셨습니다. 너는 은밀한 중에 이 일을 행하였으나 너는 백주에 이와 같은 수치를 당케 되리라 하시더니 정말 그 말씀대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선지자 나단의 책망과 하나님의 벌을 통하여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한 

다윗을 하나님은 깨끗하게 용서해 주셨고, 그를 자신의 마음에 꼭 합한 사람이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다윗에게는 언제나 자신의 죄를 사해 주시고 자신을 당신의 자녀로 그리고 당신의 귀한 일군으로 사용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시편 32편 1절과 2절에서 이렇게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리우는 아브라함도 생각해 보면 비겁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기 생명을 보존하겠다고 두 번이나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였던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의 두목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이 나오는 여자들 다말과 라합과 룻 그리고 밧세바는 다 문제가 많은 여자들이었습니다. 

다말은 시아버지와 관계를 하여 자식을 낳은 여자였습니다. 라합은 기생이었습니다. 룻은 이방여자였습니다. 그리고 밧세바는 사실 이름도 없습니다. 

마태복음 6장 6절에그는 ‘우리야의 아내’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그들의 이름은 수치스러운 이름들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저들의 이름이 명예의 전당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의 조상으로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2장 20절 이하에 보면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귀한 그릇은 하나님께 쓰임 받는 그릇인데 하나님은 금과 은 혹 나무와 질그릇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깨끗한 그릇을 쓰신다는 것입니다. 

깨끗한 그릇이 귀한 그릇이라는 말씀은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아무리 금과 은같이 귀하고 유능한 사람이라고 하여도 깨끗하지 않으면 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식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어떤 대가를 치루든지 간에 그를 깨끗케 하여 그를 쓰시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깨끗한 그릇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그릇들은 있습니다. 저들은 본시 깨끗한 그릇이 아닙니다. 저들은 깨끗한 그릇이 아니라 하나님이 깨끗케 하신 그릇들입니다. 

저들은 하나님의 깨끗케 하심에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요구하고 있는 도덕적 기준은 전보다 높아진 기준입니다.

흔히 말하는 관례에 따라 허용되던 것들이 허용되지 않게 된 것들이 참으로 많아졌습니다

우리 사회의 도덕적 기준은 전에 그렇게 높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선진사회가 되면서부터 그와 같은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절대 의’이신 하나님의 눈으로 보면 우리 인간들은 감히 설 데가 없습니다. 

롬 3: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의 말씀대로 의인은 없습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하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죄인은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참 귀히 보십니다. 

 

우리의 학창시절을 돌이켜보면 앞에 칠판이 있고 그 옆에 교훈이나 급훈 같은 것이 쓰여 있었는데, 저희 중학교 급훈은 “Boys, be ambitious!" 

요즈음은 “네 성적에 잠이 오냐?”는 급훈도 있답니다. 

하여튼 재미있습니다. 우리가 함께 웃습니다만, 그들이 그러한 공부를 하는 목적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야만 합니다.  

명문대학에 가기 위해서, 좋은 남편, 멋진 아내를 만나기 위해서입니까? 

학생들에게 공부가 참으로 중요하긴 하지만, 공부하는 목적이 거기에만 있다면 분명 잘못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진지한 질문이 있다면 나는 왜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이 땅에서 먼저 발견해야 할 중요한 일이 있다면 내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자문해 보십시오. 내가 왜 오늘 존재해야 하는가? 

“당신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하십니까?” 

여러분은 어떻게 대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왜 사느냐?”고 묻거든 천국의 소망 때문이라고 고백하길 바랍니다.

소망을 잃고 우울함에 빠져 문을 굳게 닫은 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주님은 지금도 우리의 심령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자존감은 높은 수능 점수로 얻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자존감은 사랑으로, 그것도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이렇게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에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 모든 분들이 하나님의 그 높은 사랑을 깨달아 높은 자존감을 가지고 건강하게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오늘 부른 찬송은 410장 ‘아 하나님의 은혜로’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 지 난 알 수 없도다’라는 가사가 저는 너무나 좋습니다. 

저의 간증이고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죄인인 저를 하나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깨끗케 하여 주시고 하나님의 귀한 그릇으로 사용해 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사람은 도덕적으로 훌륭하고 반듯한 사람은 귀히 여기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천히 여깁니다. 

훌륭한 사람은 인격적으로 대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비인격적으로 대합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죄인인 우리를 인격적으로 대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오늘 본문의 말씀이 참 좋습니다. 하나님이 죄인인 우리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오시지 않으십니다. 

그냥 ‘나다’하시고 들어오셔도 되시련만, 하나님은 그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존중하여 우리의 결정을 기다려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문을 열면 그 때 들어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시고 변화산으로 오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게 되고,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같이 이야기하는 것이 제자들에게 보이자, 수제자인 베드로가 세상에서 궁전을 짓고 사는 것보다 그곳에서 초막을 짓고 사는 것이 더 좋겠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와 같은 제자를 데리시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리고 내려 오셔서 처음 한 일이 귀신들려 사람 구실 못하는 아이를 고쳐주신 것입니다. 귀신 들린 아이를 귀히 여기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예수를 믿는 사람입니다. 크리스찬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를 닮아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사람을 귀히 여기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귀한 사람만 귀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그렇지 못한 사람까지도 귀히 여길 줄 아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가장 필요한 것이 저는 그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인인 우리의 인격까지 존중하시어 먼저 문을 두드리시는, 

그리고 우리가 문을 열어야만 들어오셔서 

죄인인 우리와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본받아 

밝지 못한 세상도 사랑하고, 훌륭하지 못한 사람들도 귀히 여길 줄 알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애굽기 6-13장

 

6장 모세를 위한 위로

1-9절 사역을 갓 시작한 모세가 실망하여 좌절한 것을 다시 위로하시며 

힘주시는 장면

10-13절 하나님께서 다시 민족 해방자로서의 재소명을 주시는 장면

14-27절 모세와 아론의 혈통을 추적 20절 아므람과 요게벳

28-30절 언변에 미숙한 것을 염려하는 모세의 걱정

 

7장 재소명과 10대 재앙의 시작

1-13절 바로의 강력한 반발과 그에 따른 백성들의 불평으로 절망한 모세를 위로하시고 새로운 담력과 소망을 갖게 하시고 지팡이 이적을 보여주심.

14-25절 첫 번째 재앙, 피

 

8장 개구리 재앙, 이 재앙, 파리 재앙

 

9장 가축의 죽음, 악성 종기 재앙, 우박 재앙

 

10장 메뚜기 재앙, 3일 간의 어두움의 재앙

 

11장 출애굽 준비 명령과 마지막 재앙 예고

 

12장 유월절과 무교절 규례와 열 번째 최후 재앙인 장자의 죽음

그리고 43-51절 추가된 유월절 규례

 

13장 무교절과 초태생에 관한 규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가나안으로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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