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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발(로마서10:13-17)

목사님 0 570

   

 

      오늘은 인간의 신체 중에 가장 억울한 부위인 발 이야기를 좀 하려고 합니다. 가장 수고를 많이 하고 그리고 가장 험한 일을 많이 하면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발은 여러모로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손을 씻은 물로 발은 씻어도 

발을 닦은 물로 손을 씻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얼굴이나 손을 닦는 수건으로는 발을 닦지 않습니다. 발의 입장에서 보면 불평할 만합니다.

그런데 더 속상할 것 같은 것은 누구도 발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발은 늘 양말과 신발 속에 가려져 있어서 누구도 

주목하지 않고 또 누구도 아름답다고 여기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전혀 다른 차원의 아름다운 발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을 보면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이사야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한 말씀입니다. 

바울이 인용한 이사여 52:7에는 이렇게 기록되어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이 말씀은 구구절절 깊은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복음의 역사라고 하는 것, ‘유앙겔리온’이라고 하는 것에는 절대 조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첫째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둘째는 그 말씀을 전하고 받아 들이게 하는 성령의 감화입니다. 셋째는 이것을 전하는 전도자입니다. . 

이 세 가지 요소가 합쳐질 때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예수를 믿게 될 때 여러분을 위해서 전도해 준 누군가가 있었습니다. 그런 고마운 분이 있었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했고 그가 위하여 기도하는 중에 성령이 역사해서 오늘 ‘나’라고 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역사를 내게 전해준 분, 얼마나 고마운 분입니까?

 

그 옛날에는 전쟁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한 번 전쟁에 나갔다하면 1년이고 2년이고 못 돌아오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들이 전쟁터에 나갔는데 요새같은 통신수단이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전화도 없고 우편도 없고 핸드폰도 없고 그러니 후방에 앉아서는 이게 죽었는지 살았는지, 이겼는지 패했는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식이 궁금합니다. 그런데 전쟁에 이겼다면 이겼다는 소식을 후방에 전해야 할 것 아닙니까?

이겼더라도 지금 후방의 성내에서는 그걸 모르는 채 걱정과 근심으로 지내고 있거든요. 그래 이 좋은 소식을 한시바삐 전하기 위하여 승전보를 가지고 뛰는 것입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길을 달리고 

한 번 상상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에 이겼습니다. 이겼다는 소식을 가지고 먼 길을 뜁니다. 이 사람이 소식을 전할 때 성문에 올라가서 “우리나라 군대가 이겼습니다.”하고 소리를 지를 때 온 성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그를 맞고 얼마나 반가워 하겠습니까? 

승전보, 기쁜 소식을 가지고 뛰는 그 사람의 발걸음, 그 마음이 얼마나 가볍고 행복하겠습니까? 이게 바로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려면 이 복된 소식이 내 것이어야 합니다. 

이 복음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긴 병사가 뛰는 것입니다. 

승리감에 취해서 뛰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복음을 전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의 그 놀라운 영적 체험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감격을 가지고 증인이 됩니다. 증인의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옮깁니다. 이 소식을 나 혼자 가지고 있을 수 없다. 모든 사람에게 전해야겠다. 이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어야겠다 해서 달려가는 것입니다. 달려갈 때 그 사람은 이 거룩한 역사에 내가 쓰여진다고 하는데 대한 기쁨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 중에서 나를 선발하셔서 나로 하여금 이 좋은 소식을 전하게 하신데 대한 감격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해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에스더 4:14 “이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 유다인은 다른 데로 말미암아 놓임과 구원을 얻으려니와”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이 소식을 듣지 못해서 절망하고, 

이 소식을 듣지 못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뛰는 것입니다. 달려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기입니까?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리요”라고 사도 바울은 오늘 말씀합니다. 

엄청난 소식이 여기에 있지마는 전하는 자가 없다면 이를 어찌 듣겠느냐, 

듣지 못했다면 어찌 믿겠느냐, 믿지 않는다면 어찌 구원받겠느냐 여기에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 이 마음이 있을 때에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이 기쁨을 나 혼자만 누릴 수는 없습니다. 내가 누리는 이 기쁨과 감격을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더불어 기뻐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발로, 

자의적으로, 기쁜 마음으로 찾아가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흔히 이방인의 사도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사도 바울의 간절한 바람이었습니다. 로마서 10:1절에서도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자신의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는 것이 자신의 간절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거절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는 배척하였던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인정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 13절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강조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16절을 보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이 말씀은 믿음은 인간적인 수단이나 방법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의 산물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 없음을 하나님의 탓으로 돌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성적으로 핑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의 본성을 누구보다 잘 아시는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17절에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믿음은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만,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믿음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을 주시되 말씀을 수단으로 사용하셔서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우리 안에 믿음이 생기게 되고, 그 믿음이 건강하게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보고 믿는” 종교가 아니라 “듣고 믿는” 종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표적과 기적을 보여 주어도 

믿지를 않습니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의 사건이나, 오병이어의 사건을 보고도 믿지를 않았습니다. 죽은 사람이 살아나는 나사로의 사건을 보고도 믿지 않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약성경부터 하나님이 강조하신 것이 말씀입니다. 

“쉐마 이스라엘” 이 말은 “이스라엘아 들으라”는 말입니다. 들을 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문구도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즉,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을 부르짖으며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 이유도 

믿음이 성경말씀을 들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의 역사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탄은 어떻게 해서라도 우리가 말씀을 듣는 것을 방해합니다. 

사단의 방해의 요소는 여러 가지로 나타납니다.

그 중에 하나가 하나님의 말씀에 무관심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비 콕스라는 사회윤리학을 강의하는 신학자가 쓴 ‘Secular city’(세속도시)라는 유명한 책이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현대인의 특색을 요약해서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무엇인고 하니 ‘익명성’입니다. 

옛날 사람들은 한 마을이 다 알고 지냈습니다. 

모두가 다 알고 개방적으로 살았는데 요즘의 세속도시라고 하는 것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문을 닫아 놓고 삽니다. 잠그고 또 잠그고... 이렇게들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마음을 잠근 거나 똑 같습니다. 익명적입니다.

작은 교회들, 개척교회에 나오지 않으려는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익명성이 보장되지 않아서라고들 합니다. 큰 교회에 나가면 가고 싶은 날은 가고 가고 싶지 않은 날들은 가지 않아도 묻지도 않고 그거 좋더라 이겁니다.

그런데 이 개척교회는 그렇지가 않은 것입니다.

자꾸 찾아오고 뭘 물어보고 하면 귀찮다, 골치 아프다 할까요?

현대인은 자기를 폐쇄하고 삽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이 앉아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무슨 이야기 하느냐?”하면 대답을 안하거나 “알 것 없어요”합니다. 그런 세상입니다. 철저히 폐쇄적입니다. 

요즘 우리 한국에서 왜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그렇게 좋아합니까?

저는 고스톱은 여럿이 치는 걸로만 알았는데 요즈음은 혼자서도 기계하고 칩니다. 그런 세대가 된 것입니다. 전부 혼자서 놉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을 피상적으로 만납니다. 적당히 적당히...

무슨 클럽이니 모임이니 뭘 한다고 해 보아야 전부 피상적입니다. 깊은 만남이 없습니다. 고독합니다. 바로 이런 고독한 사람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복음을 들고 들판을 뛰는 게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의 이웃을 찾아가야 됩니다. 굳게 닫힌 문을 열어야 됩니다. 

자 이렇게 문을 닫아 건 사람들을 찾아 가는 것을 우리들은 업으로 삼아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닫은 사람들을 찾아가 그 마음 문을 열어야 됩니다. 

그리하여 한 사람을 구원합니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 분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자기 친구가 교회를 열심히 다니더랍니다. 그런데 그 친구가 자기한테는 교회가자는 말을 하지는 않더랍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문을 두드려야 합니다. 익명성을 해체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내가 전도했다고 하는 것 자체가 교만입니다. 한 사람이 전도 되려고 하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익은 고구마가 될 때까지, 물렁물렁 해 질 때까지 많은 사람들이 작업을 하고 내가 마지막으로 finish blow를 넣은 것입니다. 

우리는 폐쇄적인 사람들을 찾아 들어가서 복음을 전해야 됩니다. 그 문을 열어야 합니다. 거룩한 사랑으로 폐쇄된 인간을 개방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하는 발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구원을 받았을 때 나로 인하여 구원을 받았을 때 나도 행복해지고 저도 행복해 지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을, 종착역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어떤 걸음을 걷고 있습니까? 언젠가는 마지막에, 종착역에 도달합니다. 그때를 생각하며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히브리서 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이 증인들이 지금도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먼저 가신 우리 믿음의 조상들이 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구름과 같이 허다한 증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습니다.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종착역을 바라보며 결승점을 바라보며 마지막 코스를 달리는 사도 바울의 모습과 같이 바르고 복되고 신바람나게 가장 행복한 발걸음으로 달려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50장 – 출애굽기 6장

 

창세기 50장 야곱의 장례식과 열 두 아들의 결속 및 요셉의 죽음

19-21절

 

출애굽기 1장 

애굽으로 이주한 야곱의 후손들의 번성과 바로의 히브리인 말살 정책

7절 

8절 요셉을 알지 못하느 새 왕, 

요셉이 애굽 총리로 재임할 당시의 왕조였던 힉소스 왕조를 무너뜨리고 

새롭게 등장한 제 18 왕조의 세 번째 왕인 투트모스 1세. 

17절 

 

2장 모세의 출생과 바로의 딸이 기르게 된 사건 및 모세의 미디안으로 피신.

1절 아므람과 요게벳

5절 바로의 딸, 투트모스 1세의 딸, 하셉수트. 

15절 투트모스 3세

18절 르우엘, 사람 이름 이드로, 신분을 나타내는 용어

호밥, 르우엘의 아들로 모세의 처남

21절 십보라

 

3장 하나님께 부름 받은 모세와 출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계시

1절 하나님의 산 호렙, 

호렙은 그 산 전체를 지칭하고 시내는 가장 높은 봉우리

2절,  4절 모세야 모세야

21절

 

4장 표적으로써 모세를 독려하는 하나님, 

출애굽을 위해 애굽으로 보내진 모세

10절 

18절 이드로

24절 모세가 그의 아들에게 난지 8일 만에 행하여 할 할례를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25절 피남편, 아들의 피로 인하여 모세가 족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에 피로 산 남편이라는 뜻.

 

5장 모세와 바로의 1차 접견과 가중된 고역으로 인한 백성들의 불만. 

21절 백성들은 이 고난의 원인을 하나님의 뜻을 거억하는 완악한 바로에게 돌리기보다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돌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음.

 

6장 하나님이 모세에게 확신을 주시고, 모세와 아론의 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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