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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 열쇠(마태복음 16:13-20)

목사님 0 552

   

 

 

      여러분들 스스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이라면 옆에 있는 분에게 어느 성경 구절을 읽어달라고 부탁하시겠습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읽으며 외우며 들으며 세상을 떠난 성경은 시편 23편이라고 합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우리는 이 구절을 다신 한 번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로 시작합니다.

“우리의 목자”가 아닙니다. 나의 하나님이지 우리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여호아께서 나의 목자시니 나는 아무 것도 바랄 것이 없습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그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바라는 것이 많은지요. 기도만 했다 하면 끝이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가정을 이루어 살아가면 만날 때마다 새로워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은 현재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부 생활이 의무로 바뀌는 순간 그 인생 힘들어지는 것입니다.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녀가 귀하고 아름다워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녀를 뒷바라지 해야지, 이것을 어떻게 하나, 낳았으니 키워야지 하는 마음이라면, 이렇게 의무로 바뀐다면 이것처럼 무거운 십자가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직장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장에서 삶의 보람을 얻고 기쁨을 얻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일해야지 하고 의무적으로 하는 직장생활이 되어진다면 그것은 직장이 아니라 감옥으로 변하고 말 것입니다.

베이징에서 2022년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선수들을 보면 누가 시켜서 시합에 참여한 선수는 없어 보입니다. . 

그들은 의무감이 아니라 진짜 기쁨으로 참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 교회 오실 때 잔치에 오는 마음으로 오셨습니까?

아니면 의무감으로 마지못해서 오셨습니까?

 

복과 행복은 비슷한 것 같지만 뜻이 같지 않습니다.

어떤 분이 병원에 있으면서 쓴 글에 이런 내용을 본 적이 있습니다.

몸이 아파지면서 특히 위장이 나빠지면서 남들이 다 맛있다고 하는 음식도 그 냄새조차 맡기 싫어지더랍니다. 살기 위해서 먹긴 먹어야 하는데 먹는다는 것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더랍니다.

그래서 그 분이 깨달았답니다. 좋은 음식은 복이지만 입맛은 행복이다. 그렇습니다. 좋은 집은 복이지만 행복한 집은 그 의미가 조금은 다른 것입니다.  

쇼펜하우어 “누구의 인생이든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느끼고,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그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초가 든든해야 잘 받아들이는 법입니다. 

 

우리가 이번 광주 현대 아파트 붕괴 사태를 보아서 알 수 있듯이 기초가 

튼튼하지 못한 건물은 쉽게 무너지고 부서집니다. 

우리의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기초를 잘못 세운 사람들은 어려움이 다가올 때 곧 무너져 버립니다. 

그러나 기초를 튼튼히 세운 사람들은 어려움이 올 때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고 오히려 더 아름답게 빛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의 기초, 교회의 기초도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인간 구원에 있어서 가장 효과적이고 훌륭한 제도적 장치가 있다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입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전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과 교회만 건강하면 사회도, 국가도 다 잘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병들고, 교회가 바로 서지 못하면 사회도 국가도 다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앙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바른 교회관의 정립입니다.

 

“어떻게 제가 훌륭한 신앙생활을 해갈 수 있겠습니까?”라고 저에게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좋은 교회를 선택하시고 충성하십시오.” 

고린도전서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좋은 교회의 기준은 내 신앙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개인의 신앙생활의 강조점은 각 개인마다 다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에 기준도 다 다르게 정해집니다. 

어떤 분들은 교회를 정할 때 설교에 강조점을 두어서 말씀이 와 닿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어떤 분들은 내가 그 교회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사역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사역을 잘 할 수 있는 교회를 선택합니다. 

어떤 분들은 프로그램이 좋은 교회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아버지 학교, 어머니 학교, 

이렇게 각자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교회는 예수를 주라고 명확하게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분명한 사람들의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사랑의 고백입니다. 고백은 마음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외로 고백에 인색합니다. 고백하는 것을 쑥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평생 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못 듣는 부부도 많이 있습니다. 

“말을 해야 아나?” 그런데 말을 해야 아는 것입니다. 

고백하는데 비용이 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백에 대한 보상은 놀라우리만치 큽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고백을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신앙고백을 받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2년 반을 함께 지내셨습니다. 

이제 6개월 뒤면 주님은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맡기시고 이 세상을 떠나야 할 즈음에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제자들을 데리고 올라가서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 

그때 제자들이 앞을 다투어 얘기합니다.

“세례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합니다. 예레미야라고 합니다.” 

사람들의 고백은 단지 예수를 선지자 정도로 생각하는 고백뿐입니다.

메시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어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이 질문은 주님께서 오늘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묻고 계십니다. ‘너희가 교회에 와서 예배드리고 찬송하고 헌금하는 이 모든 것의 기초가 어디에 있느냐?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느냐?’ 오늘 주님께서 우리에게 물으십니다. 

 

제자들도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뭐라고 하는지 대답할 때는 쉬웠습니다. 모든 소문을 들은 대로 옮겼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실 때는 당황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순발력 있게 대답했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는 이 고백으로 로마 카돌릭의 초대 교황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베드로가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칭찬을 하십니다. 

17절에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베드로는 생각보다는 행동이 앞서는 덜렁대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다에서 고기를 잡는 어부였습니다. 공부하는 학자 타입이 아닙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하나님의 영감이 임해, 베드로의 그 입술에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을 담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고백이 혈육이 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의 지식이나 지혜로 알게 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십자가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설명을 해줘도 논리적으로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는 설득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전도할 때 쉽게 설명해 주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복음은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와 당신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부활하셨습니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하나님과 그 사람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이 신앙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최상의 것이 바로 이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그 고백은 반드시 입술로 해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믿는데 입으로 내놓지 못한다면 유감스럽지만 그것으로는 구원에 이르지 못합니다.

로마서 10:10 말씀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반드시 입술의 고백이 필요합니다. 

사실 인간 모든 문제의 해결은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발견하고 인정하여 모셔 들이는 것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는

그 신앙의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십니다. 

 

솔로몬 성전에 두 기둥이 있었습니다. 

우편 기둥은 ‘야긴’ 이라 불렀고 좌편 기둥은 ‘보아스’ 라고 불렀습니다. 

‘야긴은 ’저가 세우리라‘는 뜻이고 ’보아스‘는 ’그에게 능력이 있다‘는 뜻입니다. 능력있는 하나님이 세우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보통 다른 일처럼 우리들끼리 잘 협력해서, 힘을 잘 모아서 잘 해보자, 이래서 교회가 세워지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인간의 계획, 생각대로 착착 성장해가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교회는 사람의 힘과 지혜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세워 가십니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on this rock I will build my church” 교회는 예수님의 것이고 예수님이 세워 가십니다. 

그래서 교회가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고, 따르는 것이 

관건입니다. 그래서 부지런히 성경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에는 가정생활, 직장생활, 인간관계에 대한, 세상적 가치관과는 다른 성경적 가치관인 하나님의 지혜가 다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모신 새로운 삶은 그냥 사람의 느낌과 사람들의 상식으로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깨닫고 적용함으로써 시작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가리켜 흔히 소명장, 사명장이라고 부릅니다. 

1절 “예수께서 그의 열 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악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다음에는 그들 속에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치는 능력을 넣어주십니다. 

그리고 5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 열둘을 내보내시며” 그 다음에 보내십니다.

부르시고, 능력을 주시고, 그 다음에는 보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있습니다. 

내가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내게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를 당신 원하시는 곳으로 보내고 계십니다. 

고로 내 삶의 현장은 바로 내 선교현장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16절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

세상은 이리고 너희는 양이다, 하시면서 양을 이리 가운데 보내신다는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의 실체입니다. 

세상은 마치 이리와 같아서 서로 물고, 뜯고, 싸웁니다. 그 가운데로 양과 같은 신자들을 보냅니다. 양은 뿔도 없고, 사나운 이빨도 없고, 독도 없습니다.

그래서 목자되신 예수께서 양을 인도하는 것입니다.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리고 우리를 보내시면서 19절 “너희를 넘겨줄 때에 어떻게 또는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그 때에 너희에게 할 말을 주시리니” 하십니다. 

미리 들려주시지도 않고, 미리 알려 주시지도 않습니다. 

현장에 가서 부닥치면 그때에 들려주리라 하십니다. 

여러분, 혹시 “왜 나는 이렇게 믿음이 자라질 않나, 나는 왜 이렇게 뜨거워지질 않나?” 생각하십니까? 전도하지 않고, 봉사하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전도하고 봉사하게 되면 믿음도 얻고 지혜도 얻고 용기도 얻게 됩니다. 

전도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발한 아이디어를 주십니다. 

봉사해 보십시오. 뜨거운 가슴을 주십니다. 

머리(Murrey)라고 하는 신학자의 사도행전 연구에 이런 말이 나옵니다. 

“사도행전에는 충만 자체를 위해서 기도한 흔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들은 충만을 기다리는 잘못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충만 기다리다가 파장을 봅니다. 현장에 가야 충만이 있지, 

안방에서 충만이 있는 게 아닙니다. 

전도하는, 선교하는 그 현장에 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려고 하면 그때에 ‘팍팍’ 주시는 것입니다. 거기에 충만함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의 기초는 무엇입니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의 기초 위에 서 있어야만 내 신앙도 바로 설 수 있고, 내 인생도 바로 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신앙이 기초가 되어있는 교회를 통하여서 하나님은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부름받고, 능력받고 보내심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보내심받은 사람으로 살아가면 우리를 통하여 역사하시고 우리를 통하여 영광받으시고, 우리를 통하여 주의 크신 뜻을 이루어가시게 될 것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 라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주의 크신 뜻을 이 땅 위에 펼쳐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72-78편 

72편 공의로 평강을 실현하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

127편과 함께 솔로몬의 시. 그런데 20절 때문에 ‘솔로몬을 위한 시’로 

이해되기도. 

 

73편에서 83편까지 이르는 11편의 ‘아삽의 시’중 첫 번째 시

아삽은 다윗 시대 성가대 대장. 

본시는 절대 선이시고 절대 공의로우신 하나님이 다스리는 현 세상 속에서

어떻게 악인이 형통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로만 이러한 신앙적 갈등을 해결할 수 있다고 결론. 28절

 

74편 아삽의 후손의 시.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 멸망 사건을 배경.

14절 리워야단은 악어를 의미. 애굽을 상징.

 

75편 아삽의 후손이 지은 시로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고대하며 지은 찬양시.

 

76편 아삽의 후손이 지은 시로서 히스기야 14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이 

예루살렘을 포위했으나 하나님의 사자들에 의하여 전멸당한 사건을 배경.

2절의 살렘은 예루살렘을 의미

 

77편 아삽 자손의 시로서 절망적인 위기 상황에 처한 시인이 하나님께 

탄식하며 해결책을 간구하는 비탄시.

 

78편 본시는 출애굽으로부터 시작하여 다윗의 통치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이 과거에 경험한 하나님의 사랑과 그에 반한 자신들의 죄악상을 회고.

1-8절 이스라엘 열조의 죄악상을 회고함으로써 열조의 죄악을 답습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

9-64절 하나님께서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반역하고 불순종한 이스라엘의 지난 역사를 회고.

65-72절 이스라엘의 패역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을 당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양육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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