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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험을 받으시다(누가복음 4:1-13)

목사님 0 657

   

 

      현대인이 가진 잘못된 문제의 대부분은 ‘YES’를 너무 빨리 하고 

‘NO’를 너무 늦게 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다. 우리는 ‘NO’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말을 빨리 해야 되는데 오히려 ‘NO’는 천천히 하고 ‘YES’는 너무 빨리 해 버립니다. 

그래서 유혹이 왔을 때에도 ‘NO’라고 재빨리 거절하지 않고 천천히, 이번만은 적당하게 지내려고 하다가 그만 시험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상당한 지혜가 담긴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언제나 시험은 있는 법입니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도 

공생애를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한글 성경에서는 다 시험으로 표시를 하는데 영어 성경에서는 시험을 유혹(temptation)과 시험(test) 이 두 가지로 구분해서 사용합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당하신 이 시험의 중요한 특징은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 시험은 

유혹과는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유혹에 이끌리어 가면 사단의 역사, 

오늘 우리들은 본문에서 두 가지 구절을 눈여겨 보아야 하는데 1절의 성령에 이끌리어와 13절의 얼마동안. 

우리들도 신앙이 업그레이드 되려고 하면 성령에 이끌리어 test를 반드시 받게 되고 시험이 끝나도 아주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홀로 기도하시며 밤을 지새운 것은 보통 승리의 날 직후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승리를 얻기 위해 기도하고 또한 승리를 얻은 이후에도 기도하기를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는 영적 전쟁을 위한 준비가 아니라 바로 영적 전쟁입니다.

 

시험에 대해서 우리가 하는 또 다른 오해가 있습니다.  

대개 무슨 일을 잘못해서 혹은 실수를 해서 저지르고 당하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닙니다. 

내가 돈 관리를 잘못해서 부도가 났다면, 내가 일을 태만히 해서 회사에서 쫓겨 났다면 이것은 심판이지 시험이 아닌 것입니다. 

참 시험이란 이런 것입니다. 착한 일,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 일에 앞서서 우리에게 딱 다가오는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험입니다. 

왜요? 이제 이 시험을 통해서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고, 목적을 바로 알아서 출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인의 길로 들어가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 관문을 통과해야 합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말하면서도 그 관문을 통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서 그 관문을 통과하지 아니한 사람은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첫 번째 시험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어라’하는 것입니다. 

모든 문제의 근본은 경제에 있다, 고로 넉넉하게 잘 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경제가 모든 문제의 master key다 하는 시험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돈만 있으면 행복해 지는 것입니까? 돈만 넉넉히 주어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됩니까? 

 

누가복음 18장의 부자 관원의 비유를 보면 이 부자는 선한 부자입니다. 

세상을 보면 남에게 못할 짓을 해서 돈을 모은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이 

부자는 존경받는 부자였습니다. 게다가 이 부자는 영적인 갈급함을 풀려고 다른 랍비들이 아닌 예수님께로 나아왔습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 영적인 갈급이 풀리지 않았거든요...

목이 말라본 적이 있으십니까? 목이 마를 때는 콜라나 커피 같은 것으로는 풀리지 않습니다. 오로지 생수로만 풀리는 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목마름은 돈으로도, 명예로도, 지위로도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면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이렇게 질문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겠습니까?’ 예수께서는 누가복음 이렇게 답하십니다. 

18:22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이 비유에서 우리가 깨우쳐야 할 것은 이 청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습니다. 영적인 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민하다가 결국 제 길로 갔다는 것입니다. 

포커스가 다 팔아 주었냐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 여부.

 

두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께 천하 만국의 모든 권위와 영광을 보이면서 ‘내게 한 번 절하라, 그러면 이것을 다 주리라’한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데서 한 번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만 하면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얼마나 쉽습니까? 

지금 마귀는 예수님에게 이것을 유혹하고 있는 것입니다. 

안보는데서가 중요합니다. 코람 데오, 하나님은 아십니다.

삼풍백화점의 붕괴, 세월호 사건, 현대아파트 붕괴 사건 왜 일어났습니까? 

다 법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삼풍 백화점은 설계대로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세월호도 구조변경을 멋대로 했다고 합니다.

아이 파크도 마찬가지로 빨리 하려고 매뉴얼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무사하겠습니까? 무사하다면 오히려 이상하지요.

 

또한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세 번째 시험은 마귀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워놓고 ‘뛰어내리라’하고 말한 것입니다. 

심지어 마귀는 10, 11절에서 시편의 말씀까지 인용합니다. 시편 91:11, 12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천사들을 명령하사 네 모든 길에서 너를 지키게 하심이라, 그들이 그들의 손으로 너를 붙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뛰어내리라’ 대체 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겁니까? 

걸어 내려가도 되는데 왜 뛰어내리라고 하는 겁니까? 

예수님께서는 열 두 제자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열 두 제자라는 사람들이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을 가르쳐서 전도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에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참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참으로 지루합니다. 그 과정이 답답합니다. 

그러나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은 당장에 화끈하게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당장, 우리는 이렇게 바랍니다. 시간적으로 급하게, 쉽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무서운 시험인 것입니다

터벅터벅 걸어다니면서 복음을 전해 가지고야 어느 세월에 무엇을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좀 화끈하게 이루려면 깜짝쇼를 해야지요.

그래야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고 ‘와’하게 되어야 뭐가 되는게 아니냐, 그 말입니다. 많은 사람이 모인 가운데 성전 꼭대기에서 “나를 보시오, 여러분!”하고 훌쩍 뛰어내리고, 그러고도 무사하다면 사람들이 “와! 참 굉장하다. 저 사람은 정말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다. 위대한 지도자다”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냐, 하는 유혹입니다. 뭔가 특별하게 기적의 사람으로, 초인간으로 나타나라, 그래야 큰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는 시험입니다. 

 

무슨 일에건 꼭 수고와 희생이 따릅니다. 희생과 수고 없이는 되는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마귀는 ‘수고할 것 없다. 그냥 뛰어내리라’고 합니다. 심지어는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도 똑같은 음성이 들려옵니다. 십자가에 내려오라. 왜 매달려 있느냐. 훌쩍 뛰어내리고 ‘놀랐지’하면 간단할 것 아니냐, 그러면 메시야의 나라가 올 것인데 왜 매달려 있느냐, 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대로 십자가에 돌아가십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시는 것이 기적이 아닙니다. 부활의 아침이 기적입니다. 

왜 수고하려고 하는가? 복만 받으면 되는 것 아닌가? 

기복신앙, 무속신앙이라는 것은 복은 구하지만 도덕성이 없습니다. 

무당이 도덕성을 찾는 일은 없습니다. 가령 우리 아이가 이 대학에 꼭 가야 하겠습니다 하면 ‘그러면 공부를 잘 하여야겠구만, 열심히 해’하고 말하는 

무당은 없습니다. ‘굿을 해야 돼. 아이한테 살이 끼었으니 살풀이를 해야 돼’ 이런 식으로 나갑니다. 도덕성이 없고, 윤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복만 받으면 다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속의 특징입니다. 

수천 년 이어 내린 우리네 문화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이러한 무속신앙이 뿌리 깊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어떤 분이 커다란 고층 건물을 잘 지어놓고 북어를 딱 매달아 두었습니다. 제가 그 주인한테 물어 보았습니다. ‘저것 왜 달아 놓았습니까?’

‘그래야 무사하답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북어대가리입니까?’

대답이 ‘모르겠는데요’합니다.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야 좋다니까 좋은가 보다 하는 것입니다. 성실하게 진실하게 살 생각은 아니하고, 한다는 짓이 그저 북어대가리 아니면 돼지머리나 갖다놓고 엎드리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와 우리 젊은이들 가장 유혹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무 수고 없이 무엇을 얻으려고 하고, 힘들이지 않고 누리려고 하고, 고생 없이 모든 것을 소유하고 즐기려고 하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예수님을 하나님으로가 아니라 마귀로 만들려고 하는 불신앙입니다. 반기독교적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 과학적인 신앙을 가질 것입니다. 어리석고 미신적인 사고방식에서 한시바삐 꿈을 깨어야 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는 것입니다. 

무릇 성실을 심고 번영을 거두는 것입니다. 사랑을 심고 평화를 거두는 것입니다. 거짓을 심고 진리를 거둘 수 있습니까? 

불의를 심고도, 악을 심고도 복을 바라는 것이 미신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충분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판단력도 주셨습니다. 양심도 주셨습니다. 도덕성도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미 주신 지식과, 이미 주신 지혜와 이미 주신 능력은 다 부인하고내 수고는 없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축복만 임하기를 바라는, 바로 이런 마음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마음입니다. 

예수께서 마귀에게 말씀하십니다. 12절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그렇습니다.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을 따라야 합니다. 가라 하시면 가고, 하라 하시면 하고, 희생하라 하시면 하실 것입니다. 

심지 않은데서 거두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심은대로 거두리라, 이것이 진리입니다. 

수고한대로 그 수고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과학적 신앙입니다. 

쉽게 되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이것 때문에 우리가 많은 어려움을 치러야 합니다. 뛰어내리라, 그리고 기적을 통하여 쉽게 역사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거부하십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험난한 길을 통하여 만민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장 영광을 취하라고 마귀는 시험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비록 당장에 보이지는 않지만 저 먼 훗날에 제자들을 통해서 교회가 세워지고,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기적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이루라고 마귀는 시험합니다만, 주님께서는 아니다, 나는 나의 희생, 내가 지는 십자가를 통해서 큰 역사를 이루겠다 하십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여기에 참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주님 지신 십자가를 본받아 묵묵히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한 걸음씩 뚜벅 뚜벅 이루어 나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44~51편

44편 ‘고라 자손의 마스길’이라는 표제가 붙어있는 본시는 앗수르의 산헤립의 침공으로 인해 남왕국 유다가 절대 위기에 처한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쓴 ‘민족 애가’입니다.   3절 21절 

 

45편 본시는 메시야이신 신랑 예수와 신부인 교회간의 성스러운 영적 결합을 예언하는 메시야 예언시로서 ‘시편의 아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가서가 표면적으로는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간의 사랑의 노래이지만 상징적인 의미에서는 신랑 예수와 신부인 교회간의 사랑의 노래이기 때문입니다. 

 

46편 본시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략으로 예루살렘 성이 함락될 멸망의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앗수르를 물리친 사건을 배경.

 

47편 본시는 다윗에 의해 오벳에돔의 집에 있던 법궤가 예루살렘 성소로 

안치되는 광경을 배경으로 하여 쓰여진 시.

 

48편 하나님의 보호로 인한 시온의 안정과 영광을 노래한 시. 14절

 

49편 본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인생의 참 행복을 삼는 신본주의적 인생관에서 떠나 세상의 부귀 영화로 인생의 가치 여부를 판단하는 인본주의적 인생관을 가진 자들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교훈하는 지혜시. 20절

 

50편 다윗 시대의 성가대 대장이었더 아삽이 지은 본시는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제사는 형식적인 제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의로운 삶과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에 진정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임을 교훈하는 지혜시. 15절 23절

 

51편 본시는 다윗이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탄로날 것을 두려워하여 밧세바의 남편인 우리야를 전쟁터에 내보내 죽게 함으로써 자신의 죄악을 은페했을 때 선지자 나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한 책망을 받고 그 죄를 토설하며 참회했던 심정을 노래한 시.  10절 1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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