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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지팡이 (출애굽기 4:1-2)

목사님 0 749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행복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자신의 힘과 존재를  겸허하게 평가하는 것이 행복의 근본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항상 자기 성공에 놀란다고 합니다. ‘아 나는 이만한 사람이 못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어떻게 이런 복이...’ 자기 앞에 이루어지는 그 일에 대해서 스스로가 놀라면서 산다고 합니다. 배우자를 바라볼 때도 ‘내 실력으로는 이렇게 좋은 남편, 아내를 만날 수가 없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좋은 남편, 아내를 만나게 해 주시다니’ 감격입니다. 

그런가하면 자기를 스스로 높이며 사는 사람은 자기의 환경에 대해서 놀라며 산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살 사람이 아닌데, 내게 어찌 이런 불행이...’

그래서 배우자를 바라볼 때에도 ‘하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내가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났단 말인가. 내가 저런 인간하고 살 사람이 아닌데... 이거 하나님이 실수했나 내가 실수했나?’ 이러고 산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현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원하는 것, 가지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갑니다. 다시 말해서 욕망지향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불행의 원인이고 병의 원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것만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해질 것이다” 이렇게들 말합니다. 그런데 그 ‘이것만’이라고 하는 것이 이루어지고 보면 이번에는 또 방향을 바꿉니다. “저것만 이루어지면...” 

‘이것만 이루어지면, 이 하나의 소원만 이루어지면’ 이 사고방식이 바로 불행의 씨앗인 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그전에 갖추어야 할 요건들이 많습니다. 

건강도 있어야 하고, 지식도 있어야 하고, 얼마간의 경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 더 근본적인 것은 믿음입니다. 

어려서는 부모를 믿어야 합니다. 만일 부모를 전적으로 믿지 못한다면 

그 아이는 참으로 불행한 아이일 것입니다. 

‘엄마가 크다고 하면 큰 것이고, 작다고 하면 작은 것이다, 엄마가 좋다고 하면 좋은 것이고, 나쁘다고 하면 나쁜 것이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하는데 반대로 ‘엄마가 달다고 하는 것은 쓰고, 맛없다는 것은 맛있더라’ 이렇게 되면 곤란한 것입니다.

부모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 있을 때 그 아이가 정상적으로 자라나 행복한 아이가 되는 것입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고, 목회자, 대통령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에 바로 그 믿음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는 사건이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같은 값이면 모세가 좀 더 나이 젊었을 때에 부르셨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한 40세쯤 되었을 때 즉 바로의 궁전에서 공부도 많이 하고, 공주의 아들로서 권세를 행사하고 있을 그때에 불러서 쓰셨더라면 어땠을까? 왜 하필이면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 처갓집 더부살이하며 양치기로 살아가는 80세의 무기력한 목동 모세를 부르셨을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력도 없고, 의욕도 없는 양치는 현장에서 모세를 부르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을 쓰시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의 힘이 빠져야 쓰십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하시고자 하는 일은 너무나도 엄청난 일입니다. 430년 동안 노예생활에 길들여진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으로부터 건져내는 일입니다. 노예로 태어나, 노예생활에 익숙하고, 노예적인 사고 방식에 젖어 버린 사람들, 이 무기력한 사람들을 건지라는 것입니다.

그것도 건져서 바로 이웃으로 옮겨 놓으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홍해를 건너, 시내 광야를 지나, 저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라, 

인간적인 상식이나 능력으로는 전혀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하십니다. 

게다가 그것이 된다고 쳐도 모세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나를 통해서 될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모세는 너무 부족한 것이 많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너무 나이 많아 늙었고, 애굽에서 사람을 죽인 살인자입니다. 다혈질이라서 성미가 급하고 불같습니다. 허점투성이의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엄청난 역사가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나를 통해서 될 일은 아니라고 모세는 거듭거듭 사양을 되풀이 합니다. 

그래서 변명하는 말이 백성들이 나를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그럴 수 밖에요, 내가 나를 못 믿는데 누가 나를 믿어 주겠습니까?

게다가 10절 이하를 보면 모세는 말을 할 줄 모른다는 핑계까지 댑니다. 

학자들은 그가 아마 말더듬이었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일언지하에 나무라십니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도대체 누구 앞에서 그따위 변명을 늘어놓느냐는 겁니다. 

12절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6절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되리라” 엄청난 말씀을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할 말을 다 가르쳐 주시고, 또 그의 형 아론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를 하나님처럼 보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신앙인의 궁극적 관심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는가 하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그 무엇도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그 분은 인간의 부족과 허물을 묻지 않고 부르십니다. 

이미 다 알고 부르시기 때문입니다. 나보다도 더 나를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나의 약한 것 부족한 것을 다 알고 부르시는데 그 앞에서 감히 어떻게 사양할 말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오묘한 섭리 중에 사람을 부르십니다. 

사실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나은 점이 얼마나 됩니까? 다 거기서 거기입니다. 정말 오십보 백보입니다. 전쟁터에서 오십 보 달아난 사람이 백 보 달아난 사람을 보며 비겁하다고 나무라는 격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인생에 대해서 함부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초라해보여도 나중에 어떤 사람이 될지 누가 압니까? 

전반전은 실패했지만 그 실패를 교훈 삼아 후반전을 멋지게 살아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과거를 묻지만 하나님은 미래를 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하시리라는 뜻 안에서 모세를 이 땅에 내셨습니다. 그리고 그 경륜 안에서 이제 모세를 들어 쓰시고자 하십니다. 모세가 있고나서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포함된 하나의 도구일 뿐입니다. 

부족하든 말든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니 쓰임 받을 뿐입니다. 

이제 모세는 아무 말도, 아무 변명도 할 수 없는 처지가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모세가 마지막으로 하나님께 이런 부탁을 합니다. 

1절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의 뜻은 이런 것입니다. ‘그렇다면 제게 굉장하고 깜짝 놀랄만한 능력과 표적을 주세요’ 

굉장한 것, 초자연적인 것, 기적적인 무엇을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뜻밖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야기가 그렇게 돌아갈 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기대하고 있던 바와는 너무나도 어긋나는 것입니다. 

아마도 모세는 적이 실망하며 대답했을 겁니다. “지팡이니이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팡이니이다” 

이 말씀을 추리해보면 성경에는 없습니다마는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요지는 아마도 이것이었을 것입니다. “지팡이면 됐지 뭐?” 

지팡이 그 이상의 것을 주시려고 하지 않으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알라는 말씀입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 내게 있는 것, 

이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와 경륜 속에서 모세에게 주신 것임을 모세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사와 이적을 행하실 때에는 멀리 있는 것을 가지고 이적을 행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네가 평소에 잘 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습니다.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서 다윗이 사용한 무기는 평소에 사용하던 물매돌 다섯 개.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을 보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능력은 크나 작으나 별 

차이 없습니다. 모세가 능력이 많아서 출애굽의 대역사를 이루었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룬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능력”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신명기 28장 1절을 보면 복된 사람이 되는 조건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가 복되리라,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고 너뿐만 아니라 네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 모든 짐승까지도 복을 받으리라.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복받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삼가 듣고’ 무슨 말씀입니까? 행여 놓칠세라 조심스럽게 듣습니다. 

사람은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보통 사람들이 성공하는 비결로 지능, 지식, 기술, 자세를 듭니다. 그런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능도 지식도 기술도 아닌 삶의 자세인 것입니다. attitude,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듣는 자세, 예배하는 자세, 기도하는 자세, 공부하는 자세...

거기에 운명이 달려 있는 것입니다. 듣는 자세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듣는 자세가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내 몸과 마음을 삼가면서 집중적으로 들어야 합니다. 

그러할 때 말씀의 능력이 나를 사로잡아 여호와의 지혜가 내 지혜가 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나의 권능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듣고 나서 그 들은 것이 다 내 마음에 들 수는 없습니다. 내 마음에 드는 것도 있고, 안 드는 것도 있고, 이해되는 것도 있고 이해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명령입니다. 

내 이성적 비판을 누르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그의 뜻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된 길입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똑똑한 것 같지만 병든 이성이라 제대로 작용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내 경험과 내 지식이 내 결단을 어지럽히는 것입니다. 

다 버립시다. 그리고 순수한 마음으로 받아들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할 때 귀한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 이하를 보면 두 아들의 비유가 나오는데

“28절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9절 대답하여 이르되 아버지 가겠나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30절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그와 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이르되 싫소이다 하였다가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31절 그 둘 중의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이르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하나님이 도저히 할 수도 없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을 모세에게 맡기십니다. 그리고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역사하실 때에 내 믿음과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잡으라면 잡고 건너라면 건너는 것입니다. ‘지팡이로 홍해를 내리쳐라’ 내리 쳤습니다. ‘건너가라’ 건너갔습니다. 

그 말씀에 대한 순종 자체가 모세의 능력이요, 지혜요, 용기였던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에게는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그 선택도 때를 놓치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됩니다. 아무 때나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사단과 싸우는 일도 이길 수 있을 때에 이겨야 합니다. 간단하게 이길 수 있는 것도 한번 때를 놓치고 나면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운동이 좋다고 해도 그것은 건강한 사람의 이야기지, 병든 사람에게 운동하라고 하면 그 사람 운동하다 죽습니다. 될 일이 아닙니다. 

다 소용없는 것입니다. 할 수 있을 때에 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말씀에서 재미있는 특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던지라, 잡으라, 취하라, 치라, 건너라...’

아주 간단한 문장들입니다. 던지라 하시면 던지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지팡이를 던지라 하십니다. 모세는 두 말 않고 던집니다. 그랬더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시 잡으라 하셔서 잡으니 도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마술 같은 일입니다. 

보십시오. 손에서 놓으니 지팡이가 뱀이 되었습니다. 다스리지 못하고 놓으면 뱀이 됩니다. 그러나 4절에 그 꼬리를 잡으니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무서워도 잡으라 하실 때에는 잡아야 합니다. 

잡으면 나를 돕는 지팡이가 됩니다. 

평범한 지팡이지만 모세는 그 지팡이로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알았고, 그 지팡이로 홍해를 갈랐고, 그 지팡이로 반석에서 물을 내었습니다. 

 

나는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나는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내게 있는 것을 물으십니다. 

그것을 통하여 역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말씀에 따라 믿음으로 쓰이면 엄청난 역사를 이루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물고기 잡는 어부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셨습니다. 

핍박자 사울을 불러서 사도 바울을 만드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내게 있는 것을 그대로 내어 놓는 것 뿐입니다. 

던지라 할 때 던지고 바치라 할 때에 바칠 뿐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잡으라 할 때 잡는 것이요, 가라 할 때 가는 것 뿐입니다. 그러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을 경험하고 전파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월 9일 

시편 26 ~ 36편

 

26편 다윗의 시로서 평소 최선을 다한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하나님 앞에서 주장하며 부당히 받는 고난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것을 간절히 호소하는 비탄시. 압살롬의 반역과 같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썼을 것으로 추정.

 

27편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용사로서 대적을 눈앞에 두고도 담대하게 

여호와 신앙을 선언하며 구원과 승리에 대한 확신을 선포.

1절, 3절, 10절

 

28편 다윗이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피하던 중에 지은 비탄시.

1-5절 절박한 위기에 처한 다윗이 하나님의 구원을 간구.

6-9절 의인의 궁극적인 승리를 확신하며 찬양.

 

29편 여호와의 소리로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을 보여주는 시.

 

30편 성전 낙성가라는 표제가 붙어 있지만 다윗은 성전 건축을 준비하기는 하였으나 그 낙성은 보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쓴 찬양시.

포로 귀환 후에 재건된 성전 봉헌식에서 쓰임받았기 때문에 낙성가라고 제목이 붙어 있을 것이라 추정. 11절

 

31편 일생동안 풍운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원수들로 인해 야기된 절박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께 호소하는 비탄시. 19절, 24절

 

32편 본시는 다윗이 자신의 일생 일대의 실책인 밧세바 간음 사건에서 체험한 회개와 죄사함 받은 기쁨을 배경으로 지은 회고적 참회시. 

1절, 2절

 

33편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금과 비파, 새 노래로써 온 땅이 진동할 정도로 열광적으로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권면하는 

환희에 찬 분위기를 띠고 있는 시. 12절 

 

34편 아비멜렉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파라오와 같은 의미.

다윗이 사울을 피해 블레셋의 가드왕 아기스에게 갔다가 광인으로 가장하여 극적으로 탈출한 후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는 반드시 보호해 준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지은 시. 8절, 

20절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 다리를 꺽이우지 아니한 사실에 대한 예언으로서 매우 중요(요한복음 19:31-36)

즉 예수께서 다리 뼈를 꺽이우지 아니한 사실을 그의 구속 사역을 믿는 모든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보호를 상징.

 

35편 다윗이 장인 사울과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 10년 간의 망명 시절에 

하나님을 향하여 공의의 실현을 바라며 지은 비탄시.

13절 누가복음 10:6

 

36편 악인과 의인의 상반된 결론.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생사화복은 창조주요 전우주 만물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인바 이러한 사실을 무시하고 육체의 정욕만을 좇아 임의대로 사는 자들, 어리석은 자들의 결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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