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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자의 고백 (요한복음 3:22-30)

목사님 0 8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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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을 읽다 보면 마음 속에서 깊은 감동이 느껴지는 성경 구절이 있는데 오늘 본문 30절의 말씀이 그런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어쩌면 우리는 거꾸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줄을 잘 서야 한다’라고들 합니다. 특히 군대.

줄을 잘못 서서 낭패를 당하는 일들을 주변에서 흔하게 봅니다. 

멀리 생각할 것도 없습니다. 운전을 할 때도 차선을 잘못 들어서면 고생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선택은 자유인데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하여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선택하는 것 외의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하는 결단을 하는 동시에 버리는 결단, 포기하는 결단을 아울러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아시시의 프란시스코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제일 좋은 것을 가로 막는다’ 죄가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차선책이 최선을 가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주일날 교회에 가야 하는데 사업상 중요한 약속이 생깁니다. 그러면 고민하다가 하나님을 만나는 대신 사람을 만나는 일을 택하게 됩니다. 

차선을 선택한 사람은 결국 최선의 길을 버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굳게 결심하고 갈 때에 방해가 많습니다.  

그러나 결단이 있는 자는 우왕좌왕하지 않고 직선거리를 갑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라고 합니다. 

여기에 자유가 있고, 진정한 행복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길을 갈까? 말까? 고민하고 계신 분들 계십니까?

될 수 있으면 빨리 선택하고 그 길을 힘차게 달려갈 것입니다. 

우물쭈물하다가는 큰일 납니다. 

크리스찬이 된다는 것은 복잡하던 머리가 단순해지는 것입니다. 

가라고 하면 가고 가지 말라고 하면 안가고. 안들린다고요?

들릴 때까지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들릴 때까지 기다리셔야.

들리지 않는데 시작했다가 낭패를 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행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행복이란 소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지위에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두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합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스스로 맑은 이성으로, 자발적으로 일을 할 때 

그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하는 것, 강요되어서 하는 일은 불행한 것입니다. 

공부, 부모들은 자발적으로 할 수 있게 돕는 일.

직업,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든지, 아니면 그 일이 좋아지게 기도.

 

두 번째 조건은 내가 결정한 일을 행동으로 옮길 때 행복하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음악을 들으면서 행복합니다. 그러나 연주하는 사람이 더 행복합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 성경 말씀에 보면 “나는 이러한 기쁨이 충만하였노라”고 합니다. 

이러한 기쁨, 이것이 과연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세례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의 이름 앞에는 세례라는 별명이 붙습니다. 

그런데 오늘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던 사람들이 우 몰려서 예수님께로 가더라고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고자질을 합니다. 

요한으로서는 질투가 날 수 있는 사건인데 오늘 세례 요한은 그것을 잘 극복합니다. mind control, 아주 어려운 것입니다.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여러분의 마음 속에 평안이 없습니까? 

마음이 평안치 않은 것 중의 대부분이 질투 때문입니다. 

인간의 인격을 가장 비참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처참하게 만드는 것은 질투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이것을 제어하지 못할 때, 인간 망가됩니다. 아주 추해집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가야바가 누구입니까? 대제사장 즉 종교지도자입니다. 대제사장, 바리새인, 서기관, 당대의 유명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하나님 섬기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아닌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왜요? 자기들보다 못 배우고 무식해 보이는 예수의 말을 사람들이 더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기, 질투하는 것입니다.

이 시기 질투가 작용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예수심리학’이라는 책은 예수님의 심리를 분석한 책인데 그 책의 결론은 

예수님의 마음 속에는 시기 질투가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닮으려 하면 세 가지를 본받으라고 충고합니다. 

잘 웃고, 칭찬을 받아 들이고, 칭찬을 하라가 그것입니다.  

 

잘 웃어라, 그렇습니다. 남이 웃길 때 잘 웃어야 합니다. 

그런데 남이 웃길 때 시무룩하고 웃는 남까지 비웃습니다. ‘뭐가 우습다고’ 이런 사람들은 구제불능입니다. 

노예한테는 웃음이 없습니다. 주인은 웃지만 노예는 웃지 않습니다. 

노예이기 때문입니다. 

 

옛날 동독과 서독을 구별하는 단어가 있었다고 합니다. 

서독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말끝마다 ‘Danke schon’을 연발하는데 

동독에 가면 ‘Danke’라는 말을 들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공산주의의 기본은 혁명입니다. 혁명이란 말 자체의 개념을 상고해 보면 나 아닌 다른 사람, 나 아닌 사회에 책임이 있다는 사고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이러한 철학을 근거로 혁명을 일으키고 공산주의 사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가난한 것은 부자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가 고생하는 것은 부르조아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진 자, 높은 지위에 있는 자는 다 없애야 한다. 이것이 프로렐타리아 혁명의 철학입니다. 

그래서 공산주의에는 기쁨과 감사가 없습니다.

 

그런데 잘 웃으려면 어찌해야 됩니까? 자기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자기 고집을 버려야 웃을 수 있습니다. 자기 생각에 집착해 있으면 웃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냥 우스운 이야기가 있거든 그리로 끌려 가십시오.

 

그리고 칭찬을 잘 받아 들일 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남이 나를 칭찬하는데 잘 받아 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마음에 열등감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칭찬하면 비꼬지 말라고 합니다. 

 

또 남 칭찬을 많이 하라고 합니다. 정 칭찬하고 싶지 않거든 칭찬할 때 ‘me too’ 고거라도 하시기 바랍니다.  

남 칭찬할 때 꼭 깎아내리는 사람들 있습니다. 이건 망조입니다. 

칭찬하는 순간 내 마음이 시원해 집니다. 그때 치유가 일어나는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 세례 요한은 멋지게 해결합니다. 

27절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아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 잘 되었습니다. 그러면 ‘아 하나님께서 주셨구만’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깎아 내릴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신 일입니다. 그에게 얼마를 주었든지 하나님께서 알아서 주신 것입니다. 

누구 원망하지 맙시다. 탓하지 맙시다. 질투할 것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하늘이 내신 것입니다. 

악인의 형통함도 하나님께서 주신 바입니다. 

지금 이 순간 왜 불공평하냐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왜 저 사람에게는 주고 나는 안 주냐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다 하는 신앙적 관점에서 보면 세상에 이해 못할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이 변덕을 부리면 안됩니다. 꾸준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세례 요한의 마음은 불변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은 원래 예수님의 길을 평탄케 하기 위해서 온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인기가 높아져도 세례 요한은 이 점을 잊지 않았습니다. 

신랑의 친구가 아무리 잘났어도 친구는 친구지 신랑은 아닌 것입니다. 

내 위치가 있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할 문제입니다. 

분수를 아는 것 이거 중요합니다. 나는 요기까지다, 내가 가질 수 있는 건 요기까지다, 내 나이가 지금 얼마다, 한계입니다. 

한계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걸 넘어서려는 욕망으로부터 자유해야 합니다. 욕망은 자꾸 over하려고 합니다. 

더 할 수 있는 것처럼, 더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이 욕망이 병들 때 질투로 바뀌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에는 함께 기뻐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29절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내가 장가가는 거 아니지 않습니까? 신랑 좋은 날이지만은 내 친구인 신랑이 기뻐하니까 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마음이 소중한 것입니다.

신랑이 행복하니까 내가 행복하고 그가 출세하니까 내가 출세하는 것 같고, 그가 기뻐하는 순간 더불어 기뻐하는, 이 더불어 기뻐하는 마음이 얼마나 소중합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 잘 될 때 ‘아 잘 됐구만, 그 사람 그 동안 어려웠는데 참 잘 됐네’ 그런 마음 가져 보았습니까? 

누가 성공했다고 할 때 ‘참 잘 됐구만’ 그래 보았습니까?

대체로 그렇질 못합니다. 배가 아파진다고 합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 아퍼진다면서요. 우리 나라 사람은 이 병 때문에 다 죽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러한 기쁨’이라고 합니다. 예수님 높아지는 걸 보며 세례 요한이 기뻐하고 신랑이 장가갈 때 그 친구가 같이 기뻐하고...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쓴 편지를 옥중서신이라고 하는데 4권의 편지가 있습니다.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런데 빌립보서 속에 기뻐하라는 말씀이 열 세 번이나 있습니다. 

빌립보서 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이걸 보면 기뻐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효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효도란 무엇입니까?

부모들이 해 준 것만큼 하는 것이 효도입니까?

부모들의 마음은 자식들의 자식들이 기뻐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명령입니다. 

신앙인의 기준의 첫 번째가 바로 기뻐하는 것입니다.

저는 믿음이 좋다는 제일 기준을 기쁨에 둡니다. 

그런데 기뻐하는 것은 소유나 성취에서 말미암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과거를 은혜로 깨닫고 기뻐하며 살아갑니다. 

그 깨달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찬들은 죄사하심 받은 자의 감격에 삽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와...

그 기쁨,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시고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은혜임을 

확인하면서 매일 매일 기뻐하는 것이 바로 신앙인의 고백입니다.     

 

바로 그런 마음, 더불어 하는 기쁨에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나는 내 할 일을 다하고 물러가노라.

왜 나에게 기쁨이 없습니까? 생각의 틀을 바꾸어야 합니다. 

 

요즈음 깨끗한 물을 마셔야 된다고 해서 정수기를 다들 쓰는데 정수기가 

아무리 좋은 거다 비싼 거다 해도 제일 중요한 것은 물을 마주하고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가 제일 중요한 것입니다.

물의 정수는 필터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장수하겠다고 정수기 열심히 갈아치우는데 그럴 것이 아니라 물을 마주한 우리의 마음이 물을 생명수로 만들 수도 있고 사약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면에서 집안에서 아내, 엄마들의 마음 가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내가 기쁜 마음으로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 아기가 건강하게, 밝게 자란다고 합니다. 그런데 내가 속상한 상태에서 젖을 먹이면 아기가 부정적으로 어둡게 자란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정말 자기 자신을 극복하고 욕망을 다스리고 이제는 시기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깨끗한 마음으로 호탕하게 웃으면서 그렇게 살아갑시다. 

그 기쁨과 행복, 이것은 파동을 일으키고 파급효과를 냅니다. 

그래서 공명을 일으킵니다.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합니다. 

그 기쁨 속에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쁨을 가지고 이 험난한 세상 속에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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