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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성된 종과 게으른 종(마태복음 25:14-30)

목사님 0 1,152

   

 

      지난 주에 이번 주에는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기독교인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린다고 했더니 지난 목요일에 어떤 교인 분이 “목사님 제가 오징어 

게임을 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2명만 생각이 나요, 제가 이번 주일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니까 미리 알려주시면 안되요?”

단호히 거절하고 교회 동영상 잘 보라고 했더니 어제 밤에 

“내일 꼭 생방으로 오징어 게임 설교 듣겠습니다”

 

오징어 게임에는 기독교인 3명이 등장합니다. 

번호로 호명하기로 합니다. 244번은 유리로 된 징검다리 건너기 게임에서 

다른 사람을 밀어 떨어뜨린 뒤 자신은 살았다고 감사 기도를 드립니다.

두 번째 등장인물인 240번 지영이는 목사의 딸입니다. 

그녀의 고백에 의하면 아버지는 엄마를 항상 때리고 딸인 자신을 성폭행한 후에는 항상 우리의 죄를 사해달라 기도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학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지영이는 아버지가 엄마를 칼로 찔러 죽인 것을 발견하고는 자기도 아버지를 칼로 죽여버리고 이 게임에 

참가하게 되었다고 무표정한 얼굴로 67번, 새벽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세 번째 등장 인물은 거리 전도자입니다. 오징어 게임 최후 승자가 된 456번은 눈이 가려지고 양손이 뒤로 묶인 채 비내리는 거리에 버려집니다.

그런데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던 전도자가 주인공에게 다가가 그의 안대를 벗겨주고 한 첫 말이 ‘괜찮으세요?’가 아닌 ‘예수 믿으세요’입니다.

비뚤어진 신앙관이 낳은 괴물같은 모습의 크리스찬의 모습 아닐까요?

예수를 바로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징어 게임을 본 목회자들은 하나같이 부정적으로 묘사된 기독교인들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드러냈지만 세상이 바라보는 기독교인의 이미지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라는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습니다. 

 

어느 여작가는 어떤 주제로 글을 쓰든지 항상 글의 첫머리에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보다 못한 남편이 하루는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여보, 시작하는 글을 좀 바꿔보지 그래?” “그럼 어떻게 바꿔볼까요?”

“음, ‘옛날 옛적에’라는 말로 시작해 보면 어떨까?” “알았어요.” 

부인은 남편의 조언을 좋게 받아들여서 큰 마음을 먹고 첫 문장을 다시 썼습니다. “옛날 옛적에 어둡고도 우울한 밤이었습니다” 

그녀는 매사에 부정적이어서 아무리 좋은 환경이 주어져도 항상 모든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만일 내가 저 사람처럼 부모를 잘만났더라면. . .’‘내가 만일 저 사람 처럼 머리가 좋다면. . .’ 

‘내가 만일 . . . .’을 반복하며 삽니다. 

남의 떡이 크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의 것은 과소평가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세월은 다 지나고(허송세월) 나를 알아 줄 사람은 없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어느 사회에 가든지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각 속에 부정적인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엇이나 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들어서 일꾼으로 쓰시는 것입니다. 

본래 일 잘하는 사람들은 핑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 못하는 사람들은 핑계가 많습니다. 

일 못하는 사람들이 연장을 나무랍니다. 

사람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앞에 나서야 하는데 앞에 나서다 보면 얼굴도 드러나고 욕도 얻어 먹습니다. 사노라면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이 두려워서 나서지 못한다면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이끌어가는 일꾼이 될 수 없습니다. 

모험도 하고 실패도 하고 성공도 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실패를 두려워 하지 않는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진정한 실패란 없기 때문입니다. 실패가 아니고 경험입니다. 훈련입니다. 

그것을 통해서 배우는 사람이 참으로 성공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양말, 수영복

 

마태복음 24장을 보면 이 세상에는 종말이 있고 그 후에 예수님께서 다시 재림하실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본문 25장에서는 종말을 의식하며 성도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세 가지 비유를 통하여 말씀해 주고 계시는데 그 세 가지는 

열 처녀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 비유입니다. 

그 중에 오늘은 달란트 비유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어떤 부자가 다른 나라로 떠나면서 그의 종들에게 각각 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맡기고 떠났다가 돌아와 그 종들이 그 달란트로 

얼마나 남겼는지를 물어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각각 그 재능대로’ 주인은 종들의 능력에 따라 달란트   를 맡겼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 주인은 종들의 능력을 바르게 평가. 

 하나님께서도 능력에 맡게 일을 맡기십니다. 인간의 생각으로 이건 내 능력  

 밖인데요, 하나님이 일을 맡기실 때 모든 걸 고려, 필요한 것도 공급.

 16절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바로 가서’ 맡기자 마자 바로, 미루지 않고. 

 뒤로 미루면 기회가 없어짐. 

오늘 이 비유에서 자기 소유를 종들에게 맡기고 떠난 주인이 반드시 돌아와 종들과 계산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주인은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고 칭찬과 상을 내리지만 한 달란트 받은 종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하고 책망과 저주를 내립니다. 

충성의 반대말은 배신이 아니라 게으름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달란트 받은 종은 두 달란트 받은 종에 비하면 결과는 두 배 반 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같은 칭찬을 들었습니다. 주인이 칭찬하는데 결과에 관한 언급은 없습니다. 

“너는 남보다 더 많이 남겼기 때문에 이 상을 준다”고 하지 않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기 때문에 칭찬하고 있습니다. 21절, 23절 ‘착하고 충성된 종아’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 결과에 집중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맡기신 일에 대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까? 

그러면 된 겁니다. 

컴퍼스로 원을 그릴 때, 큰 원이든 작은 원이든 크기는 달라도 원은 원입니다. 작다고 해서 원이 아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원의 크기가 아니라 그 중심이 같은 것을 보시고 똑같이 칭찬하시고 상을 주십니다. 

비록 한 시간 밖에 일하지 못한 종이지만 하루 종일 일한 종들에 못지않은 그 충성, 신실함 때문에 주인에게서 똑같은 상급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4: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그런데 우리가 충성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일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의 사역에 헌신, 희생이 들어갔는지 안 들어갔는지를 보면 압니다. 사실 헌신, 희생이 들어가지 않은 신앙 생활은 

취미 생활이지 참된 신앙 생활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헌신, 희생

그런 면에서 스트레스는 우리 인생의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스트레스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발전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다섯 달란트를 맡았든 두 달란트를 맡았든, 하나님은 일의 결과가 아니라 여러분이 그 일에 바친 희생과 헌신을 평가하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순탄한 인생, 문제없는 인생을 살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의 것을 땅 속에 파묻어 두었습니다. 

왜 “괜히 장사한다고 시작했다가 실패하면 주인에게 꾸중이나 듣게 될 것이고, 어디 장사가 쉬운 일인가? 얼마나 많은 문제와 어려움에 부딪칠 텐데” 

그래서 주인의 꾸중도 듣지 않고 고생도 하지 않는 방법을 찾았는데, 그것은  받은 그대로 지키고 있다가 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주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 줄 알고 그것으로 만족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그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꾸짖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 생활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현상유지는 죄가 됩니다. 

안전 제일주의로 사는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능력 범위 안의 일을 합니다. 자기 힘으로 충분히 할 수 있는 일만 합니다. 늘 얕은 물가에서 물장구나 

치며 놀지 저 깊은 바다 속을 헤엄쳐 보지 못합니다. 

오직 내 능력 범위 안에서만 살아가는 것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쉽고 편안한 일, 문제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왜 믿음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도 이 세상에서 고난 없는 삶을 살지 않았습니다. 힘겨운 인생의 짐을 지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고난 없는 삶, 문제없는 인생을 한 번도 약속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지라 하시고, 그 지는 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경은 고난을 피하는 길, 희생 없이 사는 길에 대해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이란 고난이나 문제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이나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 고난과 문제 때문에 감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문제없는 곳은 어느 곳도 없습니다. 

사람이 살아 가는 곳에는 항상 문제가 있고 갈등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도 사람들의 모임이고, 사람 있는 곳에는 문제가 있는 법입니다.  

지상에 있는 모든 교회는 문제없는 교회가 아니라 문제를 믿음으로 이겨내는 교회, 문제를 은혜로 덮는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눈으로 보면 그 문제 때문에 오히려 믿음이 자라는 것을 나중에 고백하게 됩니다. 우리의 인격이 주님을 닮아갑니다. 

그래서 문제 있는 곳에 간증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탄은 열심히 문제를 만들어 내지만 롬팔이팔의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뤄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주인에 대해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24절을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을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굳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병행 구절인 누가복음 19:21에서는 ‘엄한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 함이라” 

그는 자기를 믿고 맡겨주는 주인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엄격한 기준으로 하나하나를 심판하시는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율법을 책임과 의무로만 여기고 무거운 짐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는 강박감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실 때에는 할 수 있는 만큼만 요구하십니다. 또 일을 시키실 때에는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십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할 때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이미 주신 것을 가지고 최선만 다하면 되는 것입니다. 최선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고 잘못된 생각에서 우러난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된 이미지를 갖고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아주 잘못되었고, 조금 잘못된 차이가 있을 뿐이지 온전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믿음이 자라려면 참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공부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만 잘못된 하나님의 이미지를 교정하고 진정한 하나님의 이미지를 점점 더 형성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저는 확신합니다. 만약 사람들이 자기가 만들어낸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참된 하나님을 알게 된다면,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참된 모습을 알게 된 후에는 주를 섬기는 것이 강박감이나 죄책감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감사함에서 우러나오게 될 것입니다.

사랑없이 하는 일은 무거운 짐이지만 사랑하면 기쁨으로 순종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이 종은 자신이 받은 것을 하찮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자신이 받은 것을 다른 두 종과 비교해 보고 하찮은 것으로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다르게 창조하셨습니다. 

그것은 각 사람을 어딘가 필요한 곳에 쓰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 한 사람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생을 살 때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대로의 나를 사랑하지 못하고 늘 남과 비교하고, 내가 가진 것에 대한 가치를 모르고 늘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고 그러면서 자신의 임무를 포기하고 수많은 기회를 놓치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살지는 않습니까?

그 결과를 오늘 마태복음에서는 29절로 표현을 합니다.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하나님 나라의 경제학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마지막 날 많은 성도들이 악한 일을 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 때문에 책망 받을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오십니다. 그리고 오셔서 우리와 결산하실 것입니다. 

단 한 번의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남은 생을 올 인하여 주님의 칭찬과 상급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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