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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들의 재물관(시편 127:1-5)

목사님 0 815

 

 

    지난 금요일 아침에 저희 집사람이 스파게티를 아주 먹음직스럽게, 

양도 많이 만들어서 아침 식사를 맛있게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 식탐이었습니다. 한 그릇만 먹고 그만두지를 못하고 나머지를 모두 먹어 버렸습니다. 그러자 하루 종일 면이 들어가 불어서 

하루 종일 배가 불러서 저녁은 거르고 잤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습니다. 많이 먹고 또 굶고,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그러면서 식탐이 많아서 하나님의 축복을 팥죽 한 그릇에 판 사람, 에서가 

떠 올랐습니다. 

 

우리는 에서와 야곱의 이야기를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날 야곱이 팥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에서가 사냥에서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허기가 져서 내려오다가 동생 야곱이 팥죽을 쑤는 것을 보고 달라하자 야곱이 엄청난 흥정을 해 옵니다. 그것은 팥죽과 장자의 명분을 

바꾸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말도 되지 않는 흥정이었습니다.

장자의 명분은 보다 많은 하나님의 축복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허기진 에서에게 하나님의 축복 즉 장자권은 정말 명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배가 고파 죽게 되었는데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며 아무런 고민없이 야곱에게 그 장자의 명분을 팔아 버립니다.

에서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축복보다는 먹는 것이 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대개 에서와 같은 사람들 입니다. 그냥 예배당에서 예배드리고 성경 공부할 때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실제의 생활에서, 먹고 사는 문제에서, 그것이 좀 꼬여서 힘들어지고 어려워질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있어서 팥죽 한 그릇의 가치도 없는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쉽게 무시당하고, 쉽게 잊혀져 버리는 그런 존재가 되고 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입으로는 예수님을 주라,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하면서도 실제의 삶은 자기 생각대로, 고집대로, 욕심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은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따라 가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지혜라, 진리라, 복음이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아무리 입으로 주여, 주여 하여도 하나님을 실제로 주로 섬기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는다면 그것은 믿음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복된 삶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행함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노력과 수고와 생각만으로 우리는 절대로 복된 삶을 영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 개선이 우선입니다. 

 

운동 선수가 되려면 기본 자세가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 

기초를 배울 때 제대로 배워야 좋은 운동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도 출발할 때 기본부터 잘 배워야 합니다. 

성경연구가들의 말을 빌리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37가지 비유 가운데 무려 17가지가 재물에 대한 비유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6:24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말 성경에 재물이라 되어있습니다만 원문에서는 맘몬, 돈 귀신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물질을 바르게 벌고 바르게 사용하는 것은 영적전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돈 버는 것은 재주만 있으면 가능합니다. 

그러나 돈을 바르게 쓰는 것은 재주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돈을 어디에 쓰느냐 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수준과 인격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호주머니를 우리가 다스리기 전까지 우리는 온전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목회자들은 교인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목회자는 힘들더라도 성도들에게  바로 가르쳐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군다나 저는 십일조에 경제적인 축복의 길이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에 

반드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처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하여 경기가 나빠지고 있는 이때에 십일조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참으로 ‘세상 물정 모르는’을 넘어서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비정한 목회자의 말같이 들릴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과 상식이 어떻든지간에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새신자반, 교회를 갈까 말까? 헌금을 할까 말까?

시험에 들지 마시기를. 

 

저는 경제를 중요시 여기는 목사입니다.

목사가 돈 이야기를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이 있지만, 경제와 돈을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위선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돈과 경제를 가볍게 보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볼 때 교만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돈과 경제에 얽매여 사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돈과 경제를 우습게 여기고 사는 것 또한 바라지 않습니다.

돈과 경제는 우리에게 소중한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은 살 수 없지만 그러나 떡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많은 사람들이 돈과 경제의 문제에 있어서 실패하는 이유가 돈과 경제에 있어서 하나님을 자꾸 배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젖혀 놓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이 말씀은 물론 돈과 경제에 대한 말씀만은 아니지만, 돈과 경제에 있어서도 구체적이고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사업을 하려고 하고 또 돈을 벌려고 할 때 하나님을 빼놓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젖혀 놓고서 사업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동업을 하여야만 집도 세워지고 성도 지켜진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사업에 성공하고자 하시면 오늘 제 설교를 잘 들으시고 그대로 해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동업을 하여 성공하고자 하시면 다음 세 성경 구절을 여러분의 지침으로 삼으시기를 바랍니다.

 

첫째가 말라기 3장 10절 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의 기원은 창세기 14:20 아브라함이 전투에서 승리하고 전리품의 1/10을 멜기세덱 제사장에게 드리는 데서부터입니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두 번째가 창세기 28:22의 야곱의 서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그 후 십일조는 모세 이후 레위기를 통하여 체계화되었습니다. 

율법시대의 모든 백성은 그들의 소산의 1/10을 드렸습니다. 

이 십일조를 ‘첫째 십일조’라고 불렀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이러한 근거에서 교회는 십일조의 생활을 지켜왔고, 이 십일조로 교회사역이 유지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십일조는 교인들의 믿음을 가늠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십일조는 우리의 경제생활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구체적 표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버리고 말았듯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 분을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의 죄를 함께 걸머지게 된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이것을 Representative “대표성의 원리”라고 합니다. 

이 대표성의 원리는 신학에서 굉장히 중요한 용어입니다. 

대표성의 원리가 여러 곳에 적용됩니다. 먼저 시간의 대표가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 이날은 대표적인 날입니다. 오늘 주일 주님 앞에 나아와 예배드리고 은혜 받고 살아가면 월화수목금토주일까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성결된 삶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권세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을 내가 함부로 즐기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구원받은 백성인가 한 번 물어봐야 합니다. 

 

십일조는 물질의 대표입니다. 내가 쓰는 모든 물질의 대표성이 되는 것입니다. 종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을 소중히 잘 지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들이 거룩해집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리고 “온전한 십일조”가 중요합니다.

십일조는 온전하게 드려야 합니다. 타협하면 안됩니다. 

내가 얼마를 드릴까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나와 있지 않습니까? 

여기 강조어가 “온전한”입니다. 타협하지 않은 십일조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는 자기 교회에다 바쳐야 합니다. 내가 꼴 먹는 그 자리에 바쳐야 합니다. 내 영혼을 위탁하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몸 된 집, 바로 그 교회에 십일조를 바치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일조로 선교헌금 하기도 하고, 이웃을 위해 구제도 하는데, 이것은 십일조의 주인이 자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제가 만일 사업을 한다면 말라기의 이 말씀을 사업 성공의 기초석으로 삼겠습니다. 돈에는 하나님의 몫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십일조입니다. 

십일조는 부자를 만들어 주겠다가 아니라 안정적인 경제 생활을 약속.

사업을 하다보면 언제나 돈에 쪼들리게 됩니다. 투자할 돈이 언제나 모자라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제일 먼저 손을 대는 것이 하나님의 몫입니다. 

우리는 사업을 하다 보니 돈에 너무 쪼들려서 할 수없이 십일조에 손을 댄다고 말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처음부터 너무 쉽게 하나님의 몫을 겁도 없이, 손을 대기 때문에 쪼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업에 뜻이 없다면 모를까, 사업에 뜻이 있다면 말라기 3장 10절 이하의 말씀에 승부를 걸겠습니다.

 

십일조가 얼마나 큰 기쁨이고 즐거움인가는 해 보신 분들만이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결단하면 깜짝 놀랄 일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처음 십일조 뗄 때에 내 살을 도려내는 것처럼 아파서 놀란답니다. 

그런데 아홉을 가지고 살아가는데 풍성한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그리고 얼마동안 하다 보면 십일조가 기쁨이 되어 교회에 달려나가고 싶어 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고 합니다. 

 

둘째는, 잠언 14장 11절의 말씀입니다.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사업과 장사에도 식이 있고 수준이 있습니다. 

사업과 장사가 후진국형을 벗어나 선진국형이 되려면 식을 바꾸어야만 합니다. 후진국에서 선진국으로 도약을 하려니 그 더러운 것들을, 부패들을 도려내어 깨끗이 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니 후진국은 깨끗하면 부자가 될 수 없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선진국은 그 반대였습니다. 선진국은 깨끗하지 않으면 부자가 되기 어려운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선진국의 문화와 철학과 식을 보니 그 바탕이 성경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법을 무시하고 함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나라는 후진국이고, 존중하고 잘 지키는 나라들은 선진국이었습니다.

장사를 하여 크게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은 장사를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방식대로 사업을 하여야 합니다.  

식이 틀리면 답이 틀립니다. 그것은 영적인 세계에서만 통하는 진리가 아니라 돈과 경제 즉 사업에 있어서도 통하는 진리입니다.

 

마지막 셋째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의 말씀입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동업하려면, 하나님이 세워주시고 지켜주시는 복을 받기를 원한다면 사업의 목적이 하나님과 같아야만 한다는 뜻입니다.

사업은 목적이 아니라 도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배제하면 도구인 사업이 목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냥 사업을 위한 사업을 하게 됩니다. 

거기에 빠지게 되면 사업과 돈의 노예가 되어 평생 거기에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사업에는 성공한 것 같아도 인생의 실패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몫을 정확히 떼고, 하나님의 식대로,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 사업을 하는데도 어려움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 테스트를 통과하고 나면 약속하신 모든 일들이 이루어져 형통하게 되고, 성공하게 되고, 약속하신 축복의 증인이 되실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를 믿는 목적은 하나님의 축복을 얻기 위함인데,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을 에서처럼 경홀히 여기며 살아가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을 경홀히 여기며 행복할 수 없습니다. 형통할 수 없습니다. 야곱처럼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기며, 하나님의 축복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거는 것이 쉽지는 않지만,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는 단호한 결심으로 예수를 믿어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인생에서 승리하고 행복해져서, 들어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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