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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을 버려두고(누가복음 5:1-11)

목사님 0 861

    

 

 

       2004년 3월에 우리 새하늘교회를 개척했으니까 올해가 17년이 되네요.

그런데 17년 동안 주일 아침에 속이 안 좋아서 아침 식사를 거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끼니를 때에 맞추어서 먹는 편인데.

오늘 아침 처음으로 속이 불편해서 아침을 거르고 설교를 합니다.

생각해 보니 우리 교회는 제가 쓰러지면 그냥 끝. 

여러분들에게 담임 목사 은퇴, 2026년 전까지 건강 지켜달라고 기도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다른 부탁 하나 전교인이 성경 일독에 꼭 참여해 주세요. 그러니까 두 가지 담임목사의 건강과 성경일독에 참여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를 모르고 무작정 뜁니다. 

십중팔구는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대답입니다.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뛰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들이 하니까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열심히 살아갑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효과적인 방법 중의 하나가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심히 살기는 사는데 허탈감에 빠져서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이런 허탈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들이 익숙한 삶의 터전에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으려고 하였지만 날이 밝을 때까지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했습니다. 헛수고로 인하여 하염없이 실망하며 빈 그물을 정리하는 일밖에 더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 이와 같을지도 모릅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사업이 한 순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믿었던 자녀들이 탈선하고 대학을 나와도 원하는 대로 취직이 되지 않아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이처럼 기대했던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오랜 노력이 그만 헛수고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허무함을 느낍니다. 

이제는 살아갈 의욕도, 일어설 용기도 없습니다. 그냥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옛날에도, 지금도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로 그치는 현장에 어김없이 그 분이 찾아와 주십니다. 

 

주님 찾아오셔서 시몬 베드로의 배에 올랐습니다. 왜입니까? 

이유는 그들의 헛수고를 채워주시기 위함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의 배를 타시고자 합니다. 

왜? 우리의 실패한 부분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십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갈릴리 바다는 내가 좀 아는데...

오늘 우리는 본문 속에서 베드로의 순종이 얼마나 놀랍게 보이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놀랍지 않습니까? 

순종은 세상을 의지하지 않고 내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신명기사관에 의하면 

28:6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니라”

28:19 “네가 들어와도 저주를 받고 나가도 저주를 받으리라”

그 전제는 착한 일, 악한 일이 아니라 순종, 불순종.

여러분 구약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약에서도 똑같이 주장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장 3절 말씀같이 읽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아멘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멘으로 받는 겁니다. ‘아멘’이라는 뜻은 “진실로 진실로”라는 뜻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 하는 것은 진실하다.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말씀을 들을 때 아멘으로 말씀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들을 때 아멘을 꼭 해야 하냐고 하지만 아멘으로 화답하면서 들을 때 그것이 내 안의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암탉이 달걀을 품고 3주가 지나면 그 알이 부화가 돼서 병아리가 삐약 삐약 생명이 나타나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여러분의 마음 속에 품고 있으면 그 말씀이 언젠가는 생명으로 부활하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은 3주내에, 어떤 말씀은 6개월 내에, 어떤 말씀은 2년 만에 그 말씀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말씀을 내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말씀을 품고 있으려면 우리가 아멘으로 말씀을 받는 자세가 중요하다. accept. accept.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세 가지로 응답하십니다. 

하나는 ‘그래라,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곧 ‘그래라’하고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기다려라. 아직 미숙하니 좀더 기다려야겠다. 때를 기다려’

기다리시라는 응답인 것입니다.

세 번째는 ‘생각을 버리고 뜻을 바꾸라.’ 하시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응답을 고린도후서 12장 9절에서는 “내 은혜가 네가 족하도다”라고 말씀합니다. “My grace is sufficient for you” 

사도 바울이 자기 몸에 있는 가시를 빼달라고 세 번 간구하여 받은 응답.

그 후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존하여짐이라”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와 내가 생각하는 은혜, 이게 상반될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인 것들입니다. 

그래서 병들었다가도 나아야 우리는 은혜라고 합니다. 

벼락 부자가 되는 걸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는 철저하게 나 자신을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 되게 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에 도달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은혜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은혜를 내 은혜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네가 가진 불편한 몸, 그대로가 내 은혜다라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때로는 우리에게 시련도 주시고 실패도 주시고 고통도 주시고 아니, 더 나아가 질병까지 주십니다. 

이제는 잘 이해가 되지도 않고 때로는 납득이 가지 않더라도 은혜로 인정하여야 합니다. 그의 은혜를 나의 은혜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은혜만이 은혜입니까?

아직도 내가 생각하는 은혜에 집착하고 있습니까? 

내 뜻, 내 소원, 꼭 여기에 매달려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순종한 결과가 6,7절입니다. “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나누어 실어도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메시야를 만나니 이제 베드로가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의 특징은 내가 죄인 아닙니까?

그리고 11절입니다.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순종했더니 이제 무엇을 위해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배워 알고 있는 속담 중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공들인 탑은 안 무너진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길지는 않지만 인생을 살아보니 공든 탑도 무너집디다. 

성실하게 자기 삶을 지키려고 하는 자의 삶도 무너집디다. 

공을 들이고, 삶을 지키는 것이 다 허무하고 헛된 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위에,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믿음입니다.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하는 것입니다. 간절히.

예레미야 33:3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은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

교회 출석하는 대부분의 교인들에게 ‘우리의 삶에 있어서 가장 소중한 분은 누구십니까?’라고 물으면 대부분 하나님이라고 답하실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하나님을 종종 무시합니다. 

종종이 아니라 아주 자주 무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지적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합니다. 

필요한 물고기를 잡기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그래서 세상사는 동안 그 배로 물고기만 많이 잡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주님의 능력도 거기까지만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불교 신자가 돌부처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 무속인들이 정안수를 떠놓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본문의 초점은 예수를 따른다는 것의 가치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생업을 포기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려두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택한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가진 이 신앙의 가치가 얼마정도입니까? 정말 가치 있다고 여기시면서 살아가십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도 따를 만한 가치로 여기시느냐 말입니다.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가치 없는 것을 버릴 줄 아는 신앙이 지혜로운 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한 것도 아니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반짝하는 기분으로 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한때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신앙이 아니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여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그런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을 삶의 의욕을 상실한 시대라고 합니다마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만큼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기로 작정한 신앙이란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최우선으로 둔 가치관으로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 예비해 놓으신 

복을 들어가도 나가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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