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참된 그리스도인 (호세아 6:1-6)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요즈음 우리 나라 정치를 보면 참으로 심란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도 얼마나 많은 문제들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승리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지금 안고 있는 문제들을 냉정하게 바라보고 그 원인을 진단하고, 올바른 처방을 내리는 게 중요합니다. 마치 이런 것과 같습니다.
응급 환자가 피투성이가 되어 앰뷸런스에 실려 오면 제일 먼저 무엇을 합니까? 지혈을 하는 등 응급처치를 해야 되지만, 정확한 진단을 위해 각종 검사를 실시합니다. 그래서 검사의 결과에 따라 진단이 내려지고 거기에 따라
적절한 치료와 처방이 주어지게 됩니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안고 있는 개인적, 가정적인 문제들을 해결하여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런 과정이 꼭 필요한 것입니다.
막연한 낙관론자들이 모여서 만든 나라가 바보들의 나라.
그래서 호세아서를 중심으로 옛날 북 이스라엘 왕국의 시대상과
오늘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보면서 승리의 해법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눈에 비친 인간의 모습은 성경에서 표현된 여러 용어에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약하다는 표현입니다.
구약에서는 히브리어 ‘하라’라는 말이 사용되었습니다.
이 말의 뜻은 ‘지워지다’, ‘닳아빠지다’입니다.
빛바랜 초상화처럼 낡고 퇴색돼서 제 기능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신약에서는 헬라어 ‘아스테니아’라는 말이 쓰였습니다.
이 말의 뜻은 ‘힘이 빠지다’, ‘병들다’입니다.
병상에 누운 환자처럼 원래 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눈에 비친 우리 인간의 모습은 본래의 능력과 기능을 상실한 채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고, 그리고 제 힘으로 다시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사야 42:3에서 이런 연약한 인간의 실상을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상한 갈대, 꺼져가는 등불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갈대는 바람에 따라 흔들리는 들풀입니다. 그런데 그나마도 상한 갈대입니다. 꺾여져서 반쯤 부러진 갈대라는 말입니다.
이제 세찬 바람 한 번 더 불면 완전히 쓰러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유혹이 몰려오고, 시련이 닥쳐올 때 싸워 이기지 못하고 견디지 못하고 쉽게 쓰러지고, 넘어지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꺼져 가는 등불과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등불은 기름으로 불을
밝힙니다. 그런데 기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불이 꺼져가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기름을 채워주지 않으면 스스로 불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밝힐 수가 없는 존재입니다.
스스로 세우고, 스스로 회복하고,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이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신앙의 기본이 무엇입니까?
내가 뭐 좀 하는 줄 알았더니 내가 약하더라. 이게 신앙입니다.

지금은 좀비의 시대이지만 저희 때에는 강시 영화가 아주 유행을 했습니다.
‘귀타귀’ 오리알 장사가 오리알 속에 달걀을 섞어서 팝니다.
강시가 나타나면 오리알을 던지면 강시가 공격을 멈추는데 계란.
가짜로는 강시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사도행전 19장, 에베소에서 바울이 주 예수의 이름으로 악귀를 축출하자
이를 목격한 마술사들이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귀신을 쫓아내려 했지만
오히려 귀신들에게 혼이 나게 됩니다. 15절 “악귀가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오늘 설교 제목이 참된 그리스도인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주변에 영향을 미칩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BC 750년에서 북왕국이 멸망한 BC 722년경까지 북이스라엘에서 활동을 했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패역한 상황이었습니다. 호세아는 4장 1-2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뿐이요 포악하여 피가 피를 뒤이음이라”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도 드렸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만 알았지 하나님을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 머리로 교리적으로만 알았지 인격적인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도 살아가지 못했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절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옛날에는 신문 광고란에 잘 나오던 광고가 “누구 누구야 옷 고쳐 놓았다. 집으로 돌아와라, 문제 해결 되었으니”
제 친구 중에 집을 잘 나가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엄마는 용시.
“집으로 빨리 돌아오너라. 엄마가.”
그렇습니다. 더는 아무 말도 필요 없습니다. 그냥 돌아오너라.
여기에 무슨 조건이 있습니까? 그냥 어머니의 사랑만 있을 뿐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딴 것 전혀 묻지 않습니다.
돌아오는 그 것 하나만으로 충분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들을 돌아오라고 부르십니다.
우리의 바른 응답은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그저 앉아가지고 이러니 저러니, 아느니 모르느니,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그럴 것 없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로 그냥 돌아가는 것이 바른 신앙인 것입니다.

273장 교창(1절 합창, 2절 성가대, 3절 남성, 4절 여성. 5절 합창

참 지식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잠언 1장 7절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합니다.
자본이 없는 것이 아니요 기술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지식이 없어서 망하는 겁니다. 알고 보면 모든 일이 그렇습니다.
일련의 모든 도덕적인 패륜행위도 알고 보면 바로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헬라의 유명한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설파한 것입니다. 우주의 이치, 우주의 원리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는 게 많다고 자랑들 했지만 소크라테스가 볼 때에는 정말 알아야 할 자신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너 자신을 알라’ 너 자신을 모르는데 그 외에 아는 것이 무슨 소용 있느냐 함입니다.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면 머리만 복잡해지고 실제로 알아야 될 것을 모르게 되는 법입니다.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을 아는 길이 어디에 있습니까?
일평생 자성하고 반성해도 나 자신을 모릅니다.
하나님을 알 때에 비로소 나 자신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캘빈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이는 나에 대한 지식도 없다.”
자기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있고야 비로소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3절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여기의 ‘안다’는 표현은 히브리어로 ‘야다’인데 ‘체험적으로 안다’는 뜻입니다. 즉 머리로 아는 지식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지식을 의미합니다.
왜 호세아는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고 강조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무엇을 알라는 말씀입니까?
6절입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헤세드의 사랑 즉 하나님의 사랑을 알라는 것입니다. 우리도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합니다.
계속 알면서 그 깊은 세계, 더 엄청난 능력을 순간순간 확인하면서
여호와를 더 깊이 깨달아 가는 것입니다.
지금은 무엇을 아느니 모르느니 해 보았다 다 피상적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하나님의 주변적 이야기에 대해서 많이 압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을 모릅니다.
우리는 경험 한만큼 알게 됩니다. 관심이 있는 만큼 알게 됩니다.
사랑한만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무엇을 알아가야 하겠습니까? 어느 측면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알아야 하겠습니까?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진노적 사랑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성, 원죄 때문에 하나님과 우리와의 만남이 그렇게 낭만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십니다.
이 진노적 사랑을 바로 이해하셔야 합니다.
내가 지금 당하는 고통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그 애타는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이것이 그 분을 진정으로 아는 길입니다.
칼 바르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Love of God is concreted in His wrath” 하나님의 사랑은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는 것입니다.
진노 속에서 구체화된다, 듣게 해도 모르고 보게 해도 모르면 때려서 가르칠 수 밖에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때리시고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다. 때리시고 싸매주시는 그 관계 속에서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어쩌다 자식을 때려야 할 때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놓고는 밤에 잘 때 그 아픈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눈물 흘리는 것 아닙니까?
때리지 않을 수 없어서 때렸습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맞은 자식보다 때린 부모가 더 크게 경험하는 것입니다.
때리고 싸매는 그 긴장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알아가게 됩니다.
아, 이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 징계 속에서, 그 치시는 매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합니다.
회개를 촉구하시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그 음성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아는 길입니다.
지금 오늘도 많은 사건, 많은 진노적 사건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속에서 강하게 말씀하시는 주의 음성을, 그 사랑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성경은 하나님은 치유하시는,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치시고 싸매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조건이 있습니다. 회개만 하면.
역대하 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사랑하는 새하늘 청담 교회 교우 여러분!
이 세대를 ‘지식의 홍수’ 세대라고 합니다.
홍수 때 제일 필요한 것이 식수이듯이 이 지식의 세대에 사는 우리들도
세상 모든 이치에 대해서는 많이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어쩌면
그렇게도 무식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약하니까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좋으나 이것 두 가지 만은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것과 예수께서 나의 구주라는 것.
이 두 가지면 충분합니다.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만을 똑바로 알고, 일대일로 하나님의 그 놀랍고 구체적인 사랑을 확인하는 순간에 나 자신을 알고, 내 운명도 함께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살아오던 삶의 방식에서 돌이켜
그 넓게 펼쳐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6/07/24 12:07:13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