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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하시는 일(요한복음 9:1-12)

목사님 0 959

   

 

     오늘의 본문은 어느 불행한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이 사람은 나면서부터 소경으로 태어났습니다. 세상의 온갖 귀한 것들을 바라보고 감격할 기회를 박탈당한 채로 태어났습니다. 흔히 말하는 화려함이라든지 아름다움, 기쁨 이런 것과는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나서 쭉 길가에 앉아 구걸하는 거지로 살아왔고 

지금도 그렇고 미래에도 구걸하면서 살아갈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잘못한 것인지, 어머니가 잘못한 것인지, 이유를 모릅니다.분명한 것은 자기 잘못은 없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 미래에 대한 보장도 없습니다. 

이렇게 불행하게 출발해서 한 평생을 불행하게 살아갈 뿐입니다. 

누군가가 던져주고 가는 동전 한 닢, 그 것에만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갈 수 있다” 

그렇습니다. 살 이유가 있으면 무슨 수로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철저하게 무의미한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그를 괴롭히는 일이 한 가지 더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평가입니다. 사람들이 수근거립니다. 

사람들이 그의 눈 못 뜸을 신학적 토론의 주제로 삼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는 대로 왜 이 사람은 불행해 졌습니까?’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본인입니까? 부모입니까? 까닭을 묻는 것입니다. 

자, 이 불행한 사람을 앞에 놓고 이것이 할 말입니까?

안 그래도 괴로워 죽겠는데 남들이 내 불행을 놓고 이러쿵저러쿵 추상적인 논쟁이나 벌이고 있으니 이 얼마나 참을 수 없는 모욕입니까?   

 

특별히 오늘 본문을 잘 보면 저들은 구체적인 대책은 없고 추상적인 토론만 할 뿐입니다. 무익한 논쟁을 벌입니다. 

본인의 죄라면 태어 나기 전에 무슨 죄가 있었겠는가, 부모의 죄라면 그는 억울하지 않겠느냐, 이런 추상적 토론을 끝도 없이 벌입니다. 

유대인들은 보통 고난은 죄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도 그렇게 고난당하는 욥을 괴롭게 하지 않았습니까?

대개의 종교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힌두교의 예를 들어보면 소위 ‘달마’를 지키지 못하면 ‘카르마’가 발생한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달마’는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규범을 의미하고

‘카르마’는 우리말로는 ‘업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지 못하면 ‘업보’를 통해서 갚는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는 동안에 그 ‘업보’를 다 갚지 못하면 다음 인생에 환생을 해서라도 그것을 갚아야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니까 달마와 카르마에 대한 가르침은 아주 괴로운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의 운명이 과거의 행위의 결과라는 사상은 많은 종교의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나면서부터 소경된 사람을 멀리서 보고 일단 그들이 전제한 것은 저건 정말 비극적인 일이다, 나면서부터 소경이 된 것은 정말 비극이다. 그러므로 이 비극에는 분명히 원인이 있었을 것이고 그 원인은 누군가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 이것이 누구의 죄냐? 본인의 죄냐? 아니면 부모의 죄냐?

그러니까 이 원리에 의하면 죄인은 자식을 가져도 안 된다는 얘기입니다. 

왜냐하면, ‘그 부모의 죄 때문에 자식이 고생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죄인은 자식도 가져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한 것인데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이런 생각을 했다는 것은, 이런 사상은 모든 인류의, 모든 종교와 사회에 만연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종교는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되지 않고 나쁜 소식이 됩니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죄의 문제로 괴로워했다고 했습니다. 

하루에도 네, 다섯 번씩 고해성사를 할 정도로 자신의 죄의 문제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하도 죄에 대해서 고민을 한 나머지 마틴 루터는 “차라리 하나님이 안 계셨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 

왜냐하면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이 젊은 마틴 루터에게는 기쁨이 아니고 괴로움의 이유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제자들은 예수께서 병 고치시는 것을 여러 번 목격하지 않았습니까? 예수께서 능력 있으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주여, 이 사람을 고쳐 주시옵소서. 이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해야 되겠는데 그런 말은 한 마디도 없고 토론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나 오늘이나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참으로 마음에 들지를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슨 문제가 생기면 조용히 주님 앞에 나아와 무릎 꿇고 간구해야 하는데, 

왜 그 문제에 그렇게 집중들 하십니까?

저에게도 하는 말이, 목사님, 이 문제만 해결하고 신앙생활 열심히 하겠습니다. 말이 됩니까? 교회에 왜 나오십니까?

예수님이 무덤에 그냥 머물러 계십니까? 그 분은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시고 우리들을 위해서 중보하시고 직접 돕고 계십니다. 로마서 8: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그런데 왜, 내 문제만큼은 내가 먼저 해결하려는 우를 범하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응답하고 계시는가를 살펴 봅시다. 

예수님은 이 문제를 신학적 난제가 아닌 하나님의 사역으로 보십니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 역사,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먼저 생각하십니다. 

우리들은 문제를 보고 분석하려고 하지만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경륜을 먼저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버림 받은 이 소경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보시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그의 신앙 고백 가운데서 늘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골로새서 1:25 “내게 주신 직분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예수님서도 그것을 보십니다. 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시는 일이 있다, 하십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에서 중요한 것은 이 사람의 불행의 원인을 과거에 묻지 않고 미래에서 해답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누구 때문입니까, 부모 때문입니까, 본인 탓입니까... 이것은 전부 과거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라고 말씀하십니다.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문제는 인간이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느냐가 아니라   인간이 괴로워할 때에 무엇을 잃어버리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이 고통되는 까닭은 철저한 상실에 있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잃은 것이 아니요, 

소망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당하는 이 현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소경을 보면서 과거의 원인 분석에 급급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미래적 의미를 생각하십니다. 

우리는 과거에 매입니다. 무엇 때문에, 누구 때문에 라고. 

여러분, 과거 이야기는 이제 그만합시다. 

누구 때문이었는지, 무엇 때문에 불행해졌는지 아무리 두고두고 시비해 보아야 이 추상적인 이야기는 끝이 나지 않습니다. 남편 때문에, 아내 때문에, 엄마 때문에, 아버지 때문에, 자식 때문에...

이제 쓸데없는 변론은 버리시고 미래적인 하나님의 그 신비한 경륜, 그 구속사적 의미를 깊이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이 현실을 통해서 앞으로 

무엇을 얻을 것인가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그 경륜을 깨닫는 순간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입니다. 고난이 나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고, 높은 차원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요셉이라는 사람은 형들에 의해서 팔리어 노예로 갑니다.

노예생활, 감옥생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치렀지만 그가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면서 가정을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하게 될 줄 누가 알았습니까?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가 사자굴에서 나올 때 얼마나 영광스럽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억울하게 빌립보 감옥에 갇힙니다. 그러나 그가 감옥에서 나올 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합니다.

얼마나 통쾌하고 멋진 happy ending 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닥친 역경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역사를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 속에서는 모든 형편, 모든 상황이 다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관계 안에서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로마서 8:28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리고 오늘 본문 중에서 제가 제일 은혜받은 말씀은 4절입니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를 읽을 때마다 늘 감격합니다. 우리가 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여야 합니까?

모로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그렇습니까?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하지 못합니다. 수단이 올바르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찬들의 삶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가나안 정복, 하나님의 방법으로 했을 때 승리.

절실한 기도제목을 가지고 기도하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여 주실 때가 있습니다. 응답을 받으면 보통 끝이라고 생각들 하고 샴페인을 터뜨리지만 그때부터 더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이루려면 하나님의 방법, 하나님의 지혜가 필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문제는 응답은 하나님께 받는데 문제 해결은 내 방법대로.

 

오늘 예수님은 이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특별한 기회로 만드십니다. 인생의 기회는 성공으로 오기보다 실패로 오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고난은 기회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행한 여건이라도 예수님을 만나고 나면 놀라운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만남의 관계,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속에서 창조의 기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나는 순간 예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자, 여러분들 예수께서 그를 붙잡고 오늘따라 참 이상한 일을 하십니다.

보통은 눈을 만지시며 눈을 뜨라고 하시는데 오늘은 그게 아닙니다.

침을 뱉어서 흙을 이겨서 눈에 바르십니다. 그리고는 실로암에 가서 눈을 씻으라 하십니다.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이 사람 눈에 진흙을 으깬 채로 더듬더듬 실로암까지 내려갑니다. 

마음 속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씀에 순종해서 갑니다. 저는 이 사람의 믿음을 높이 평가합니다. 눈에 진흙을 바른다고 눈이 떠지나?라고 다들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순종해서 실로암까지 내려갑니다. 

그런데 실로암까지 가서 자기 손으로 눈을 씻자 눈이 떠지게 된 것입니다.

참으로 위대한 믿음입니다. 그는 모든 불합리한 것을 참았습니다. 

모든 비난도 참았습니다. 모든 의심도 극복했습니다. 오직 조용하게 위대한 믿음으로 위대한 순종을 했습니다. 그러자 눈을 뜨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신앙생활 좀 잘하려고 하면 옆에서 얼마나들 비아냥 댑니까?

누군 안해봤나? 뭐 그렇게 유별나게 굴어.

그런 말 다 무시하시고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대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히브리서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순종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마’입니다. 이 말의 원뜻은 ‘듣는다’입니다. 

사무엘은 곧 ‘샤마엘’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이것이 사무엘입니다. 

우리도 그 사람 참 말 잘 듣는다 하면 그냥 청각으로 듣는다는 얘기가 아니지요, 그 말을 들어 행동한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 21장 28절 이하를 보면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아버지가 둘에게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큰 아들은 네 가겠습니다. 하고 가지 않고 둘째는 싫어요 했다가 뉘우치고 갔으면 누가 아버지의 말을 들은 것이냐? 묻습니다. 누가 들은겁니까?

둘째 아들이지요.말 잘 듣는다, 안 듣는다는 행동이지 귀로 듣는 것만 말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듣는 마음, 인생을 바로 사는 철학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시각장애자도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눈이 떠지는 기적을 경험케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생각지도 않은 고난을 당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있어야 하는지 그 원인을 알 수가 없을 때가 많습니다. 도대체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고난이라고 하는 현실은 여기 내 눈 앞에 지금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당하는 역경이 아무 의미 없는 고난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나는 그 의미를 모르고 있으나 하나님께는 의미가 있습니다. 

나는 목적 없는 고난을 당하는 것 같으나 하나님께는 목적이 있습니다. 

나는 대책이 없으나 하나님께는 대책이 있습니다.

주님께 이 문제를 가지고 나아갑시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이 있는 순간 우리는 다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언젠가는 다 감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바른 만남과 온전한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엄청난 역사를 경험하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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