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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낫고자 하느냐?(요한복음 5:1-14)

목사님 0 1,044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생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주어진 환경과 운명에 순응하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이런 분들은 뭔가 잘못되면 다 자신의 팔자소관이려니 하고 주어진 환경에 순응하고 받아들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 내가 그렇지 뭐, 엽전이... 

두 번째 부류는 자기 운명을 변화시키며 개척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인생을 삽니다. 그들은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마음속이 불꽃같은 열정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네덜란드가 그런 나라입니다. 국토의 1/4이 해수면보다 낮아 뚝을 쌓아 그곳에서 경작해서 꽃을 가꾸고, 젖소를 길러 치즈를 생산하는 나라입니다.

성경에도 운명을 바꾸고 개척해 나갔던 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만 그 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는 쌍둥이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도전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로 스스로의 운명을 바꿔 나간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인생의 변화를 원하십니까? 

원하시는 분들은 오늘 설교를 잘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은 기적의 책입니다. 그 기적 사건들이 4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도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이 많이 기록되어 있지만 

요한복음에는 상징적이고 영적인 의미가 분명한 일곱 가지 이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요한복음에 기록된 일곱 가지 이적 가운데 세 번째 나타나는 이적입니다. 

 

1절을 보면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그 후에”는 4장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갈릴리. 사마리아 사역 이후에” 

유대인의 명절, 이 명절을 신학자들은 일치하여 부림절로 보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대표적인 명절들은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 등이 있는데 부림절.

페르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이 아말렉 족속인 하만에게 몰살될 위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날로서 에스더서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절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 우리들의 명절의식은 도시에 올라와 있던 사람이 고향으로 내려가는 것인데 유대인들의 명절의식은 고향에 있던 사람들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명절을 지내는 것. 

우리의 명절이 고향중심이라면 이스라엘의 명절은 성전중심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도시 예루살렘은 인산인해를 이루어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조용히 그곳을 빠져나와 가장 외롭고 불쌍한 환자를 찾아 가십니다. 예수님이 찾아 가셨다.

신앙 생활이란 찾아 오신 예수님을 마음 문을 열고 만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3:20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를 찾아 가셨습니까? 

세상에서 버린바 된 그곳, 중환자들의 수용소를 찾아 가셨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한결같이 무기력해 보입니다. 

자기들 스스로 자기들의 병을 고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모습은 바로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뭐 좀 좋은 집에 산다고, 점 더 가졌다고 으스대고 폼 잡을지 모르지만 사실 별 것 아닙니다. 감기만 걸려도 꼼짝 못해서 누워있는 것이 인간 아닙니까? 

코로나 바이러스.

하나님이 조금만 비틀면 꼼짝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재물도 새기 시작하면 줄줄 다 새어나가는 것입니다. 십일조의 역할. 수성.

신앙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내가 별거 아닌 존재임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고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출발입니다. 

이 시간 마음의 고통과 상처를 안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인생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민하고 계시는 분이 있습니까? 

두 손 두 팔 들고 항복해서 나오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이 당신을 만나 주시고 치유해 주실 것입니다. 

 

2절 말씀에 의하면 오늘 사건은 예루살렘 양문 곁 “베데스다”라는 연못가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예수님 당시 예루살렘 성은 사방이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군데군데 출입할 수 있는 성문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 중에 양문(Sheep Gate)이라 불리는 성문이 있었는데, 이 문은 성전에 

속죄 제물로 드릴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습니다.  

바로 그 곳 양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이 있고, 그 연못가 행각(정자 비슷한 것)에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는데, 그들은 3절에 의하면 많은 병자들, 맹인, 다리 저는 사람, 혈기 마른 사람 등입니다. 한 마디로 난치병, 불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베데스다 연못에 특별한 전설이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그곳에 

모여 있는 이유를 본문 4절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3절 후반부터 보십시다. (물의 움직임을 기다리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움직이게 하는데 움직인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죠? 

성경의 괄호부분은 성경 원어에는 없는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괄호안의 말을 추가하지 않으면 본문의 의미가 잘 전달되지 않을까봐 후대 교부들이 삽입해 놓은 부분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사실이 아니고 전설이지요. 그런데 잘못 전해진 전설을 믿고 은혜의 집에 모여 있는 사람들은 난치병 환자들이었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 모여 있는 병자들은 아마 유명하다는 병원, 용하다는 의사 다 찾아다녀 보았을 겁니다. 그리고 좋다는 약은 다 써봤을 겁니다. 

거기 모인 사람들은 더 이상 인간의 의술로는 가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베데스다 연못가는 마지막으로 실오라기 같은 한 가닥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들은 이처럼 헛된 소망에 기대를 걸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헛된 소망을 갖고 사는 사람입니다. 자기는 소망이라고 붙들고 있지만, 

그 소망이 헛된 것임을 남들은 다 알아.  

우리들에게 있어서 진정한 소망은 주님 밖에 없다고 단언합니다.

 

괴로울 때 주님의 얼굴 보라

 

그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드는 것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동병상련이라는 말처럼 같은 처지끼리 서로 위로하고 격려해야 마땅한데, 

살벌한 경쟁을 벌이며 서로를 경계해야 됩니다.

세상에서 밀리고 밀려 막장과도 같은 그곳에 온 사람들인데, 거기서도 자기들끼리 경쟁을 벌여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도 ‘헛된 소망’을 위해서 말입니다. 베데스다라는 이름이 무색합니다. 

베데스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은혜의 집’, ‘자비의 집’이란 뜻인데, 자비는커녕 살벌한 경쟁만 난무하는 곳입니다. 

요즘으로 이야기한다면 병원의 ‘응급실’ 같은 분위기일 것 같습니다. 

혹시 응급실에 가보셨나요? 여기저기서 아프다고 신음하는 환자들과 안타까워 소리치는 가족들의 모습이 있습니다.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들은 누구나 같은 생각을 할 것입니다. 

지금 내가 제일 아프고, 내 병이 제일 심각하다고 말이죠. 그래서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돌봐줄 여유가 없습니다.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절박함’ 만이 있는 곳. 그곳이 바로 베데스다였습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습 아니겠습니까? 

 

또 다른 모순은 은혜는 아무 대가나 노력 없이 받는 것인데 은혜의 집에 

와서도 무언가를 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이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물이 움직일 때 재빨리 몸을 날려 들어 갈 수 있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본문이 언급하고 있는 환자는 맹인, 다리 마른 사람, 혈기 마른 사람들입니다. 

이게 베데스다의 모순이요 인생의 딜렘마입니다. 

절망, 좌절, 낙심, 포기, 낙망... 그곳이 베데스다요 인생 현장입니다. 

이 문제의 현장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예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다만 생존경쟁에 혈안이 되어 있을 뿐이었습니다. 

진정으로 은혜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는데도 아무도 예수를 바라보지 아니하고, 오직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리며 동하기만 해봐라 이번에는 내가 들어간다 하고 눈에 불을 켜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모습과 같지 않습니까? 

그 사람, 돈만 있으면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데, 한 번만 나에게 기회를 더 준다면 잘할 것 같은데. 마치 많은 사람이 로또를 사고 허망한 꿈을 꾸는 것처럼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문제에만 집중하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근원에 대하여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참 감사한 것은 세상이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주님이 친히 찾아와 관심을 보여주시고 물으셨다는 것입니다. ‘베데스다’에 찾아오셔서 말입니다. 

바로 그때 예수께서 친히 한 사람을 보았습니다. 

여기 한사람은 이천년 전 그 환자이거나 저기 저 사람이 아닙니다. 

바로 나입니다. 예수께서 나를 응시하셨단 말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주님은 불꽃같은 눈으로 내 아픔을 보십니다. 나의 문제를 살피십니다. 이 세상 누구도 해결해 주지 못하는 문제들이 우리 주님과 눈만 마주치면 그 문제는 해결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고 운명이 바뀌었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눈길과 마주치시길 축원합니다. 

 

드디어 예수님께서 가까이 걸어 오셨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얼마나 엉뚱한 질문입니까? 

자 38년 동안 앓아 누워 있던 이 환자를 보십시오.

그 눈에는 희망의 빛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몸은 거동할 힘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였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하는 물음에 이 환자는 ‘아이구 선생님 살려주세요’ 한다든지 ‘낫고싶고 말구요’ 한다든지 ‘한번만 걸어본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동문서답을 합니다. 

“주여 물이 움직일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그리고 여기 나를 못에 넣어줄 사람, 이 말을 영어로 보면 "I have no one to help me"입니다. 

나를 도와줄 그 어떤 사람, 단 한사람도 가지지 못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서 한줄기 희망마저 살아졌을 때 단 한사람의 소망마저 사라졌을 때 바로 그 순간 우리 주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한계(limitation)를 그어놓는 습성이 있습니다. 

부정적인 생각으로 자기를 고정시켜 놓습니다. 자기 조건을 따지고 환경을 따지면서 움츠러듭니다. 그러다 보면 그 심령은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차고 서서히 죽어갑니다. 그러므로 그 한계를 깨뜨려야 합니다. 그게 곧 믿음입니다. 믿음이 생길 때 심령은 살아납니다. 

예수님은 38년 된 병자의 부정적인 생각의 틀을 깨뜨려 주셨습니다. 

그러자 그의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기 시작합니다. 이게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질병이나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전에 심령을 먼저 치유해 주십니다. 

심령이 살아나니까 38년된 병자의 마음 속에 믿음이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아니, 38년 동안 누워있는 사람에게 일어나라니 도대체 말이 됩니까? 

그런데 이미 그 사람의 심령이 살아났으므로 믿음으로 순종합니다. 

9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먼저 심령이 치유되고 살아나니까 육신의 문제도 순조롭게 해결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이란 자기를 부정하고(No) 하나님을 긍정하는(Yes)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예수님은 우리들의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 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시고 그 소원의 근원자체를 들어주십니다. 

이제는 힘을 내서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38년 된 병과 같은-영적인 무기력,  패배감, 좌절감을 다 씻어내도록 합시다.  

우리들은 지금 바로 이 예배시간에 주님을 붙잡고 일어나야 합니다. 

오늘 이 예배시간에 마음의 결단을 하셔서 어떤 어려움의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붙들고 일어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붙들고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이 땅에서 펼쳐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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