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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이나 밤이나 (출애굽기 13:1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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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 모인 우리 가운데서 불안을 느끼지 않고 세상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태연한 것 같아도 마음 한 구석에는 이런 저런 이유로 불안을 안고 살아갑니다. 

특별히 코로나 19란 바이러스로 인하여 2020년은 전 인류가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힘들었던 시간을 보내고 2021년은 새로이 개발한 백신을 통하여 반격이 시작되었지만 집단면역이 형성되는 올해 말까지는 모두들 조심해야 한다고 합니다. 모두들 방역 당국의 지침을 잘 지키어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나가도록 합시다.

 

어떤 점에서 불안과 두려움이란 연약한 우리가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할 반갑지 않은 길동무일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불안과 염려의 거센 파도와 싸우면서 살아가는 삶, 그것이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내 뜻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 사람들, 그러니까 모든 것을 주께 맡기는 사람들은 세상이 주지 못하는 능력과 평안을 누리고 삽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간 노예살이를 하였습니다. 

할아버지도 노예, 아버지도 노예, 내 아들도 노예로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히브리 노예들이 모세의 인도에 따라 그 지긋 지긋한 노예의 사슬을 벗어 던지고 이제 새로운 세상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애굽 땅을 벗어나자마자 이들 앞에 홍해가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따라 가는 길임에도 가로막는 일이 생기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은혜 받아서 주님의 뜻대로 살아보려고 하는데 꼭 시험이 찾아옵니다. 그냥 좀 내버려 두면 잘 살아갈텐데 세상이 나를 그냥 두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일이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출옥해서 마음잡고 살아가려고 하는데 세상이 그냥 두지 않더라.

베드로전서 5: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이럴 때 나타나는 반응이 크게 두 가지인데, ‘왜’ 아니면 ‘어떻게’입니다.

건강하지 못한 신앙인이 많이 사용하는 표현은 ‘왜’ 라는 물음표입니다. 

‘왜’ 라는 질문은 생활에 있어서 유익한 면도 있기는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왜’라는 질문을 할 때에는 대부분 부정적인 질문일 때입니다. 

‘왜 하필이면 나입니까?’ ‘왜 내가 그 일을 해야 합니까?’

‘왜 내가 참아야 합니까?’ 왜 내가 먼저 손 내밀어야 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탈출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가는 과정에서 ‘왜 우리를 이곳으로 데리고 나와 고생을 시키느냐? 왜 물이 없느냐? 왜 야채와 고기가 없느냐?’고 시작부터 끝까지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가나안 땅에 간다는 희망을 가지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왜’라는 부정적인 질문을 던지며 불평하고 원망하는 가운데 

그 불평과 원망이 생활의 습관이 되고 말아 결국 그들은 결국 가나안 땅을 밟지 못하게 됩니다.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에게서 하나님의 힘과 영광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머무는 가정, 그런 사람들이 중심이 되는 공동체는 절대로 하나님의 생명력을 만들 수가 없습니다. ‘왜’라는 물음표 신앙의 사람들은 보는 사안마다 ‘안 된다. 못 한다. 힘들다’라고 말합니다. 헌신하는 일에 손과 발은 움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입은 쉬지 않고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말하며 끝없이 불평과 원망을 합니다. 그들은 부정적인 신앙을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다른 사람들까지도 부정적인 신앙으로 만들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들어 쓰시며 축복하시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왜’라는 말이 아닌 ‘어떻게’라는 단어를 즐겨 쓰는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헌신해야 하는 일 앞에서 입으로 말하는 것보다 손과 발로 헌신하며 섬깁니다. 헌신하지 못하는 핑계를 말하기보다 해야 할 이유를 먼저 찾습니다. 그러다 보니 감사와 기쁨이 삶을 지배합니다. 

 

초대교회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교회하면 고린도교회입니다. 

고린도교회는 예루살렘 교회가 어렵고, 사도 바울과 순회 선교사들이 재정적으로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고 ‘왜 우리가 그들을 도와야 하느냐?’ ‘왜 자꾸 일을 만드느냐?’고 원망과 불평을 합니다. 

반면에 빌립보교회는 ‘어떻게’라는 표현을 많이 한 교회였습니다. 

예루살렘교회와 사역자들이 어렵다는데 우리 교회가 어떻게 하면 도울 수 있을까?고 하며 인색하지 않게, 힘에 넘치도록 헌금을 모아 도왔습니다.

우리 신앙의 삶은 ‘왜’가 많습니까? ‘어떻게’가 많습니까? 

 

교회는 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고 하는데 이는 에크와 클레시아의 합성어입니다. 에크는 영어 아웃 오버(out over)로 무엇으로부터 끄집어낸다는 것이고 칼리오라 하여 영어로는 콜(call)이라는 말로 불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 속에서 영적으로 불러냈다는 것인데 불러내어 비록 몸은 세상 사람들과 세상에서 함께 산다고 할지라도 그 한 사람 한 사람에게 하늘 나라의 주소를 따로 주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삶의 모습이 다릅니다. 나도 힘들지만 다들 힘들어서 아우성칠 때 든든하게 서서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위로합니다. 

나도 모자라지만 내 주머니를 열어서 나보다 더 모자라는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사람이 바로 크리스찬입니다.  

 

흔히 우리 인생을 가리켜 여행길로 비유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살아갈 때에 중요한 것은 어떤 길을 걸어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냐에 따라 인생의 성패가 좌우됩니다. 

대부분은 아마 쉽고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Shortcut)을 원할 겁니다. 

그런데 지름길이라고 다 좋은 게 아닙니다. 때로는 지름길이 막힐 때도 있고, 엉뚱한 데로 빠질 수도 있습니다. 

잠언 14:12 보면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자기 스스로 좋다고 생각하는 길이 오히려 잘못되는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은 모두 초행길입니다. 검증된 길을 가는 게 아닙니다. 그러므로 누구라도 “바로 이 길이야!” 하고 장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길을 미리 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생각하는 지름길보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지름길이 더 좋은 겁니다. 

 

오늘 성경 본문을 보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인간 생각에는 아닌데, 하나님이 인도하는 지름길이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혹시 ‘내가 생각하는 지름길’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죄송하지만 그 길을 좋은 길이라고 보장할 수 없습니다. 결코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면 ‘하나님의 지름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본문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후 가나안 땅을 향해 출발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길을 정해 주십니다. 

그런데 좀 이상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직선 코스인 지름길로 가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엉뚱하게 이상한 길로 인도하십니다. 

먼저 본문 17절(상)을 보면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블레셋 사람의 길은 지중해 해변 길을 말합니다. 상식적으로 따져 보면 그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 직선 코스로 가장 빠르고,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하여 도로도 잘 정비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로 가는 것을 막으시고 정반대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백성을 인도하시매” 

이 길은 사막을 통과하는 시내(Sinai) 광야 방향입니다. 

그리고 홍해 바다와 마주치게 됩니다. 빙 돌아갑니다. 

인간이 생각하기에는 돌아가는 길, 먼 길, 고달픈 길입니다. 그러면 과연 하나님이 인도하신 광야 홍해 길은 우리에게 어떠한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먼저 적당한 고난이 있는 안전한 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홍해의 광야 길은 언뜻 생각하기에는 고난의 길 같은데, 오히려 적당한 고난이 있을 뿐 사실은 안전한 길이라는 겁니다.   

본문 17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의 길로 인도하지 않은 이유를 말씀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마음을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돌아가는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가장 중요한 이유가 전쟁을 보면 ‘돌이켜’ 애굽으로 돌아갈까 함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돌이켜’라는 말은 ‘마음이 변할까 하여’(CHANGE MIND)라는 뜻입니다.

그 길은 직선 코스이고 안전한 길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위험한 길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블레셋 사람들은 호전적인 민족입니다. 군사력도 대단합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어떻습니까? 

갑자기 애굽에서 나왔는데 무슨 군사력이 있겠습니까? 

장정들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노인들, 여자들, 아이들도 많았습니다. 

아마 블레셋이 싸움을 걸어오면 혼비백산 겁을 먹고 뒤 돌아서 도망할 게 뻔합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출애굽의 역사는 도루묵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체질과 형편을 아시고 다른 길로 인도하신 겁니다. 그 길은 고달픈 광야 길이지만, 시간이 더 걸리는 먼 길이지만 그래도 안전한 길입니다. 그래서 시간도 많이 걸리는 광야길 먼 길로 돌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 먼 길 가는 그 시간이 바로 우리의 영이 성숙하는 시간들입니다. 우리가 얼른 생각하면 길이 무조건 순탄하면 좋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계속 직선 코스로 만들면 너무 단조로워서 방심하다 졸게 되고 자칫 대형 사고가 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중간 중간 적당하게 곡선 코스를 만들어 놓는다고 합니다. 

건설비용이 더 들지만 안전을 위해서는 훨씬 더 좋다는 것입니다. 

현재 나에게 있는 고난에 대해 결코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마십시오! 

어쩌면 그 고난 때문에 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러다 보니까 더 안전한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고난을 가리켜 ‘변장된 축복’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고난이 올 때 원망하시면 안 됩니다. 원망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악성건망증’이 이유라고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소간에 원망이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좋은 일은 싹 잊어버리고 나쁜 일만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악성건망증’입니다.

그 숱한 좋은 일들, 그 많은 은혜스러웠던 일들은 깡그리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불리했던 일, 나뻤던 일만 잔뜩 기억하고 있습니다. 

인간 관계에서도 그렇습니다. 그 아름다웠던 일은 다 잊어버리고 섭섭했던 일만을 집중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런 사람은 원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 악성 건망증 때문에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 은혜로운 일은 다 잊어버리고, 지금 조금 섭섭한 것 한 가지만 생각했기에 결국은 원망을 하게 됩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보면서도 줄곧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참 이상합니다. 너무 고난이 커도 문제지만 너무 고난이 없어도 문제입니다. 요즘 자살 문제로 시끄러운데, 자실하는 사람들이 두 부류입니다.

너무 고난이 커서 감당하지 못해서 죽기도 하지만, 반대로 너무 고난이 없어서 삶이 지루하고 공허해서 죽기도 합니다. 완벽한 복지제도가 있는 선진국이 오히려 자살률이 높은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인생도 적당한 고난이 있을 때 오히려 행복합니다. 

 

두 번째가 하나님이 인도하신 길이 가나안 땅으로 가는 바른 길이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신 홍해 광야 길이 ‘바른 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편한 길이나 ‘빠른 길’을 좋아하는데, 사실은 ‘바른 길’이 정말 좋은 길입니다. 지름길이라도 바른 길이 아니면 가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바른 길을 수용할줄 아는 훈련인 것입니다. 이 훈련을 위해 40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성경에서 40이라는 숫자는 주로 훈련과 관련되어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노아의 홍수도 40일간 계속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한 기간도 40년이었고,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서 머무른 기간도 40일이었고,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받으신 시간도 40일간 이었습니다. .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누구나 광야를 지납니다. 

어떤 사람은 40일의 짧은 광야 체험을, 어떤 사람은 40년의 보다 긴 광야체험을 통과하기도 하지만 광야를 지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괴로운 일이 왜 없겠습니까? 

외로움과 고독이 왜 없겠습니까? 

그러나 이 길이 바른 길이기에 우리는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문을 보면 특별한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19절을 보시면 ‘요셉의 유골’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갖고 갑니다. 

옛적에 요셉이 임종 시에 유언을 합니다(창 50:24~25 참조). 언젠가 하나님이 약속대로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땅에 이르게 할 텐데, 그때가 되면 유골을 꼭 가져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유골은 약속의 땅 가나안에 반드시 들어간다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길로 가면 반드시 가나안 땅에 도착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하지 말고 한눈 팔지 말고 묵묵히 가라는 겁니다. 

저희 새하늘 교인들은 한 분도 빠짐없이 성경일독에 참여해 주시기 바랍니다. 꾸준함이 승리를 가져다 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하나님이 동행하시는 복된 길이라는 겁니다. 홍해 광야 길은 멀고 험한 길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복된 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광야에는 길이 없습니다. 누가 지나가도 모래 바람 한 번 불면 흔적조차 남지 않습니다. 어디가 어디인지 잘 모릅니다.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 밤에는 살인적인 추위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동행하시므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겁니다. 

그래서 승리의 길이요 복된 길입니다. 본문 21절~22절을 봅니다. 

요즘 내비게이션이 나와서 편리한데, 사실은 구름기둥 불기둥이 ‘원조 내비게이션’입니다. 광야 길은 처음 가는 길이며 돌아가는 길이기에 하나님이 친히 GPS가 되신것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GPS(Global Positioning Spirit)를 몸에 달고 살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와 ‘구원자’로 고백할 때 마음속에 들어온 ‘성령님’이 바로 영적인 GPS 이십니다. 로마서 8:14절 말씀에 보면 진리의 성령이 바로 우리를 인도하는 분이시라고 했습니다. 영적인 GPS라는 것입니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스라엘이 광야 길로 나아갔지만 막막하지 않은 이유는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매 순간 길을 인도해 주십니다. 결코 잘못되지 않습니다. 그들이 불순종해서 문제이지, 순종만 하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면 인생길을 잘 찾아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장애물이 있어도 거뜬히 돌파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길이 멀고 험한 것 같아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미래가 불투명해도 불안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절대 보호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 이런 고난 저런 고난 많은 것 같지만 지나 놓고 보면 결국 승리를 주십니다! 궁극적인 승리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시대가 급변하고 있습니다.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믿는 우리들을 인도해 주고 계십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능력과 지혜가 끝나는 바로 거기서부터 하나님의 일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진정한 지름길이 없습니다. 

우직해 보여도 하나님의 지름길을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안전하게 바른 길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부디 한눈팔지 말고 하나님의 지름길로 오늘도 내일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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