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설교말씀

선택과 결단 (창세기 13:1-13)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Loading the player...
이태리를 가면 로마와 피렌체 사이, 페루자 근처에 아시시라는 아름다운
마을이 있습니다. 이 마을이 유명한 이유는 성자 프란체스코 때문입니다.
아시스의 프란시스코는 ‘인생에서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제일 좋은 일을 가로 막는다’ 죄가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악이 가로 막는 것이 아닙니다.
두 번째로 좋은 일이, 차선책이 최선을 가로 막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니은 우리에게 최상의 인생을 약소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의 편의에 의해서 차선의 인생을 살아가면서 투덜댑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선택을 합니다. 그런데 선택은 자유이지만 우리는 내가 선택한 바에 대하여 일생을 두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오늘 설교 제목은 선택과 결단입니다. 영어로는 ‘choice’와 ‘decision, determine’입니다. ‘choice’가 여러 가지 가운데서 하나를 고른다는 의미라면, ‘decision’은 하나를 선택하기 위해서 다른 것들을 버리는 결단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때 선택하는 것 외의 나머지는 버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선택을 하는 동시에 포기하는 결단을 아울러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시편 대표 구절은 1편과 23편일 것입니다.
시편 없으면 잠언 없습니다.
1편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23편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히브리어에는 ‘복’이란 단어가 둘로 표현됩니다. ‘아쉬레’와 ‘바로츠’입니다.
바로츠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복을 이야기합니다.
반면에 ‘아쉬레’는 잘못된 것을 의지적으로 끊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시편 1:1에서 이야기하는 복은 ‘아쉬레’입니다.
자신의 잘못된 것을 의지적으로 끊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태도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합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그 가정을, 그 자손을, 그 민족을 선택하십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켜 선민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창세기 12:1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게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십니다.
히브리서 11장 8절에서는 당시의 상황을 가리켜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라고 말씀합니다.
어디로 가라는 말씀이 없습니다. ‘일단 떠나라’ 먼저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그런 뒤에 땅을 보여주겠다고 하십니다.
그리고 2절에서 자손에 대한 복을 약속하시면서 너는 복이 될지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자식이 없는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실 때 아브라함의 나이 일흔 다섯이었습니다. 그 즉시 주셔도 늦다 할 판에 10년을 기다려도 주시지 않자, 그는 하갈을 택하여 이스마엘을 얻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신앙이 좀 더 좋았더라면 니스 사태.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니라, 이스마엘은 언약의 자손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15년이 지나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요 사라가 90세가 되었을 때, 사라가 이미 경수가 끊어져 인간으로서 도저히 잉태할 수 없는 그 때에 하나님은 이삭이라고 하는 귀한 아들을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고, 이것이 하나님의 때입니다.
우리가 생각한 대로 된다고 한다면 그 분은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가만히 보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성실하게 변함없이 일하십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선택하고도 휘청휘청합니다.
많은 실수를 합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여전하십니다.
그 모든 실수를 따지지 않으시고 꾸준하게 성실하게 약속을 지켜나가십니다.

창세기 12장 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일행이 가나안 땅에 이르자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브라함이 발붙일 만큼의, 장막 칠 만큼의 땅조차 허락받지 못한 채, 평생을 유랑 생활하였다는 것을 성경에서 봅니다.
땅을 처음 얻게 되는 것이 사라가 죽고 매장지로 막벨라 굴을 살 때입니다.
그것도 바가지 써서. 23장 11 - 16절
그러던 중 가나안 땅에 기근이 심하게 들어 먹고 살수가 없어 그 약속의 땅을 버리고 애굽으로 갑니다. 성경에서 애굽은 언제나 세상을 의미합니다.
애굽으로 내려갔다는 이야기는 세상의 유혹에 빠졌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곳에서 죽을 뻔도 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다시 가나안 땅으로
되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오늘 본문 1-4을 보면 인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이주했던 아브라함이 애굽에서 가족을 이끌고 귀환해서 맨 처음 제단을 쌓았던 벧엘에서 회개와 감사의 단을 쌓은 사실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조카 롯과 함께 나와서 가나안 땅에 머뭅니다. 아브라함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고 롯에게도 가족과 소유가 있었습니다. 땅은 한정되어 있고 소유는 많아지자 자연히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납니다.
상황이 이리되자 아브라함이 롯을 불러 말합니다.
8절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그러면서 아브라함은 자기의 기득권을 롯에게 양보합니다.
9절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참으로 엄청난 양보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중요한 선택을 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화평’을 선택하고 화평하기 위하여 양보를 합니다.
화평하려면 양보부터 하여야 합니다. 양보없이 화평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전부는 못할지언정 반이라도 양보해야 화평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반도 양보할 마음이 없으면 애초부터 화목을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보는 절대로 손해가 아닙니다. 신앙적 양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양보해서 손해를 좀 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그 손해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엄청난 것으로 보상해 줍니다. 이것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양보를 해 보았습니까?
양보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해 보았습니까?

양보하려면 우리가 구체적 사건 하나하나에 너무 연연하지 말 것입니다.
지위건 명예건 사업이건 건강이건 어떤 것이든 간에 여기에 목숨을 거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목회자 세미나에서 은퇴한 목사님이 고백을 하는데 나이 들고 보니 그토록 장로님들과 다투었던 일들도 지나고 보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사업, 지위, 명예 다 그렇습니다.
부모들 중에는 “너 이 일류대학에 반드시 들어가야 한다,”하고는 “이 대학 못 들어 갈 바에야 너 죽고 나 죽자”는 부모님들이 있다고 합니다.
못 들어간다고 죽어야 합니까? 안되면 다른 대학 가면 되지요,
대학 정 가기 싫으면 직업을 가져도 되지 않겠습니까?
이 문이 닫히면 저 문으로 들어가면 될 것 아닙니까?
그릇된 집념이 사람을 죽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왜 양보했는지 아십니까? 덕이 있고 인격이 높아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더 높은 곳이 보였기 때문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I don’t care. 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신다면 나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살 것입니다. 더 바랄 것이 없는 아브라함입니다. 그래서 여유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그는 미래를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래서 그는 자기 중심적인 판단을 버리고 온전히 깨끗하게 하나님만을 따르기로 결단합니다.
세상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반면 롯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눈을 들어 요단들을 바라봅니다.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러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릅니다.
롯은 보는 대로 선택했습니다. 넉넉한 물을 보고 자원이 풍부한 것을 보고 그것을 택했습니다. 그 들을 바라보면서 롯의 생각은 얼마나 분주했겠습니까? 저 정도면 무엇도 할 수 있겠고, 무엇도 할 수 있고, 나름대로의 자기 계산에 아마 머리가 아플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현실적이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어쩌면 우리들의 대부분도 이럴 것입니다. 당장의 넉넉한 소유를 택하고, 눈에 보이는 현재를 택하고, 풍부한 물질을 택하는 것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너무 보이는 것이 좋을 때는 정작 그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생각도 못해보고 아예 들여다보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눈에 보이는 대로 선택 할 때 그 안에 있는 것이 잘 보입니까?
아니 자세히 보려고 하기나 합니까? 실제로 잘 안됩니다.
사람은 보는 대로 가고, 보여 지는 대로 운명이 결정됩니다.
그래서 그 속을, 내용을 깊이 볼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소돔은 죄가 관영한 곳이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런데도 죄가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보고 롯은 뭐라고 합니까?
‘여호와의 동산’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눈으로 보니 마치 축복 받은 땅처럼 보인다는 종교적인 각색까지 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롯이 보여주는 돌이킬 수 없는 또 하나의 실수는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잘못 된 선택은 죄 속으로 한 걸음씩 깊이 빠져 들게 한다는 사실입니다. 롯은 아예 죄 구덩이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쯤에서 우리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합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옳은 것인지, 바른 선택에서 바른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이 일을 두고 캘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롯은 장차 낙원 속에 살게 될 것이라고 상상하였으나 결과적으로는 지옥의 심연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습니다. 그는 장차 이 아름다고 풍요한 땅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 줄 것으로 믿었습니다마는, 결국 이 때문에 망하고 맙니다.

반면, 철저하게 신앙적인 기준으로 선택한 아브라함은 본문 14절 이하에 보면 하나님의 큰 보상을 받게 됩니다.
분명 외적으로 볼 때는 롯이 선택한 지역이 더 풍성하고 조건도 좋은데
상대적으로 조건이 좋지 않은 쪽을 선택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보상을 받아 더 잘 된 것입니다.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할 때마다 여러분들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사업, 직장, 배우자 등 현실적인 문제를 선택할 때 어떤 기준으로 선택합니까? 솔직히 꽤 고민이 됩니다.
믿음대로 하려니, 신앙적인 기준을 따르려니 손해 볼 것 같고, 현실을 너무 모르는 것 같아서 말입니다.
괴테는 유명한 ‘태초에 갈등이 있었다’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아무 고민 없이 가뿐하게 선택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이렇게 고민하다가도 결국 신앙적인 기준을 가지고 선택하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바로 이런 순간에 우리의 진짜 신앙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기준으로 알아서 선택하겠다, 이것은 ‘내가 책임지는 삶’입니다.
반대로 나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선택하겠다, 이것이
‘하나님이 책임지시는 삶’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청담 교회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어떤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혹, 잘못한 선택 때문에 지금 고민을 하고 계십니까?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시 궤도 수정을 하시기 바랍니다.
바른 선택을 해 놓고 그 아름다운 선택을 지키기 위해서 시련을 겪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참고 견디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3:14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한 자가 되리라”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속에서 올바른 선택과 결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된 삶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Date: 2016/07/17 11:12:56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