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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자 (창세기 39:1-6)

목사님 0 125

   

 

 

     많은 사람들이 ‘은혜받는다’ 하면 보통 영적으로만 유익하다고 생각하는 

 경향들이 있는데 성경은 요한 3서 2절에서 말하기를 “사랑하는 자여 네 영   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영혼이 잘되는 것이 영혼이 잘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영혼이 잘되기 때문에 범사(모든 일)가 잘 되어 진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받는 은혜가 영적인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 성령을 받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7절을 보면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그 사람이 뒤로 넘어지고 부들부들 떨고 이런 신기한 일이 일어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사람에게 임하면 자녀들은 예언을 하고 젊은이들은 비전을 보고 늙은 사람은 꿈을 꾼다, 모든 연령층에 걸쳐서 비전이 생기고 장래에 대하여 꿈을 꾸게 된다. 이런 말씀입니다. 

지금 코로나 19로 인하여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비전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영이 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현재 우리의 모든 어려움, 경제적·사회적 여러 가지 어려움은 우리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으로는 해결책을 얻을 수 없습니다. 

정치로부터 해결책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비전을 얻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은 내 운명을 바꾸고 가정의 운명을 바꾸고 국가의 운명을 바꾸고 인류의 운명을 바꿉니다. 

 

세상에서 어떤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까? 시한부 생명을 사는 사람입니까? 파산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정말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은 바로 꿈이 없는 사람입니다. 꿈이 없으니까 내일이 반갑지 않습니다.

꿈이 없으니까 날마다 그 날이 그 날입니다. 아무런 발전이 없는 것입니다. 

 

저도 어려서부터 특별한 꿈이 없었습니다. 인생에 대한 특별한 계획도 없었고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면서 말씀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의 법과 식대로 살다 보니 꿈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식대로 산다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말씀대로 살다보니 죽어서만 간다고 생각했던 하늘 나라가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부담스럽고 때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믿고 순종하면 한 번의 예외도 없이 언제나 뒤끝이 기가 막히게 좋았습니다. 

예수를 믿다보니 정작 어려서는 큰 꿈이 없던 제가 나이 들어 가면서 저와 여러분이 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아름다운 꿈을 꿉니다. 

저는 저를 나이 들어서 꿈꾸게 하시는 하나님이 참으로 좋습니다.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욕심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젊어서는 환상을 보고 늙어서는 꿈을 꾸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꿈 하면 성경에서 우리 머리 속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인물은 요셉입니다. ‘꿈’을 빼놓고서 요셉의 생애를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의 별명이 꿈꾸는 자, Dreamer입니다.  

요셉은 꿈을 꾸었고, 모진 시련에도 불구하고 그 꿈을 간직하고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습니다. 성경이 완성되기 전에는 하나님이 당신의 계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방법으로 ‘환상’과 더불어 ‘꿈’을 많이 사용하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완성된 후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으로 말씀해 주십니다.

 

요셉이 열일곱 살 되던 해에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었습니다. 

밭에서 열 한 개의 곡식 단이 일어나 자기에게 절하는 것입니다. 

또 며칠이 지났는데 열 한 별이 자기를 둘러서서 절하는데 해와 달도 자기에게 절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꿈을 꾸자 너무나 흥분해서 자기 아버지와 형들에게 이런 꿈을 꿨다고 막 자랑하였습니다. 

요셉은 자랑하지만 듣는 형들은 기분이 좋을 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형들에게 왕따 당하고 미움을 받다가 드디어 미디안 장사꾼에 의하여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집으로 종이 되어 팔려갑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게 된 것입니다. 

어떤 준비도 하지 못했습니다. 순식간에 당한 일이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들은 우리에게 준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다가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부분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왕자처럼 살던 한 아들이 갑자기 노예로, 종으로 전락했습니다. 

남자들은 군대 갔을 때에 이런 문화적인 충격을 경험하곤 합니다. 

제대한 후에 가장 큰 악몽은 제대를 하지 못하는 꿈입니다. 어린 요셉도 

어마어마한 문화적인 충격을 감당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 무렵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랑하는 아들 요셉아! 이 모든 시련은 네가 총리대신이 되고 가족과 민족을 구하기 위한 과정이니라. 조금만 참고 견디거라.” 그랬다고 하면 견딜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성경 어디에도 그런 기록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도 요셉에게 찾아와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의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으로 내려가매”

마태복음 4:1 예수님께서 금식을 마친 이후에 마귀에게 시험받으러 가시는 장면을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이끌리어, 동일한 단어를 쓰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을 애굽으로 가게 한 것은 형제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벌어지는 일도 하나님이이 하셨다.

  

2절 넘어오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요셉의 생애 가운데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이 바로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이 말입니다. 지금까지 아버지의 품에 그늘에 있을 때는 하나님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보이지 않자 하나님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바로 이때 나타난 단어가 “함께”라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십계명 제일 계명은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우상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자식이 될 수도 있고, 심지어 열심이 될 수도 있지만 무엇이든지 하나님보다 우선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에 둔해 집니다. 

신앙이 좋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에 민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상이 끼어들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지 않기 시작합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는 고백을 하게 될 때 

하나님이 나와 동행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더라는 단어입니다. 

 

여러분들 100층 이상의 고층 건물을 지을 때는 GPS, 즉 위성항법장치를 쓰는 것을 아십니까?

인공위성으로부터 계속 정보를 얻어야 건물을 지을 수 있다고 합니다.

고층 건물 하나 짓는데도 하늘 높이 우주에 있는 인공위성의 check를 계속 받아야 하듯 우리들도 시시각각 하나님의 check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기치 않은 상황이 생기셨습니까? 인간관계가 어려우십니까?

지혜가 부족하십니까? 사람이나 땅을 바라보지 마시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인생의 해결은 오직 주님께만 있는 것입니다.

 

함께 할 때에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냐 하면 2절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성경에서 말하는 형통의 의미는 우리가 인생을 살다 어려움에 부딪혔을 때에 그것을 잘 이기고 극복하게 되서 우리의 신앙이 한걸음 더 전진하게 됩때 이것을 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형통이 때로는 실패일 수 있습니다. 병든 것일 수 있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일 수 있습니다. 손해 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비난을 받는 것일 수 있습니다. 순교하고 죽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 형통하다고 찬송가 384장, 

‘나의 갈 길 다가도록’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런 요셉의 형통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3절에서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본다”는 단어가 2번이나 반복적으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누가 보았습니까? 이방인인 그의 주인이 보았습니다. 

무엇을 보았습니까? 어 저 사람 뒤에는 누군가가 있어. 저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야. 요셉이 가는 곳곳마다 형통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보았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막연히 느낀 것이 아닙니다. 어림짐작한 것이 아닙니다. 소문들은 것이 아닙니다. 확실히 본 것입니다. 

요셉과 함께 하는 하나님을 본 것입니다. 

그래서 4절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신임을 얻어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가정 총무는 집안을 다스리는 책임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디서 젊은 노예가 한 명 왔습니다. 일을 맡겨 놓으면 정확하게 일을 합니다. 믿을 수 있는 성실한 사람, 우리 집 재산 몽땅 다 요셉한테 맡기자. 

요셉 네가 맡아라. 가정 총무가 된 것입니다. 

그는 진실했습니다. 환경이 어떻게 바뀌던 그는 언제나 진실했고 성실했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라는 자세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가 과거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억울하고 분하고, 그 한을 생각한다면 아마 가슴이 터져서 죽었을 겁니다. 그러나 그는 한의 노예가 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변에서 한풀이에 남은 일생을 다 바쳐버리는 어리석은 사람들을 많이 봅니다. 

지난날의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제 또다시 소중한 현재와 미래를 그 과거에 바쳐 버릴 것입니까? 요셉은 그 억울한 한을 품고도 자유했습니다. 

아무 소망도 없는 노예생활이지마는 그는 이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진실하게 성실하게 경건하게 열심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하셨다. 창세기 45:8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그러자 복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5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획을 확실하게 긋고 있습니다. 

요셉이 만지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관여하기 시작한 때부터, 요셉이 주관하기 시작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이방 사람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애굽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눈길이 머무는 그 자녀를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요셉이 만지는 모든 소유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복은 받는 것이 아닙니다. 복은 존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내가 복 있는 존재가 되면 내가 가는 곳에 복이 따라 온다는 것입니다.

나 때문에 우리 가정 안에 복이 내리기 시작합니다.  

나 때문에 내가 일하는 회사가 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한 공동체 안에 복덩어리가 가면 공동체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은 좋은 꿈을 꾸어야 할 때입니다. 

때로는 그 꿈이 고난에 부딪힐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분명히 내게 비전을 주었는데 요셉이 애굽으로 내려갔던 것처럼 

현실적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를 버린 것인가? 하나님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는 것인가? 

내가 꾼 꿈이 잘못된 것인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한 번도 떠난 적이 없으십니다. 버린 적이 없으십니다. 그 꿈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반드시 그 꿈은 이루어지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 한 번도 나를” 

 

그러나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금 인스탄트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인터넷도 두 번 누르는 것도 싫어합니다. 

그러나 꿈이 있는 사람들은 인내에 인내를 더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은 응답이 없는 것처럼 보일 지라도 인내함으로 참고 견딤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꿈을 꾸준히, 힘차게 이루어 나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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