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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았더니 (창세기 32:24-28)

목사님 0 993

  

 

     신앙이라는 것은 최악에서 최선을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문제입니다. 

환경이 나빠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믿음이 없어서 불행한 것입니다. 

어떤 고난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닛시!

그리고 그 승리는 우리 새하늘교회 교인들에게는 현재진행형입니다. 

 

창세기에는 네 명의 족장들이 등장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입니다. 

성경에 요셉같이 완벽한 사람들만 있다면 우리는 절망할 것입니다. 

그러나 구약에는 야곱이 있고 신약에는 베드로가 있어 행복합니다.   

 

야곱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사기꾼, 꾀돌이, 교활 뭐 이런 단어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묘사된 이 세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야곱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야곱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야곱의 일생은 축복을 쟁취하고자 애쓴 생이었습니다. 

그는 쌍둥이로 태어나 형의 축복을 탐낸 사람이요, 끝내는 형이 받을 축복을 가로챈 집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노력도 참 많이 하였지만, 자신의 욕망을 위하여 거짓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복을 추구하는 데에 야곱처럼 집요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야곱이 생각했던 복의 개념은 야곱의 삶의 자리에 따라 변합니다. 

처음에는 장자가 되는 것이 복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아버지를 속이고 형을 속여서 장자의 축복을 받아내게 됩니다. 그러나 형이 받을 축복을 속임수로 가로챘기 때문에 결국은 형의 증오를 사서 집을 떠나 하란으로 쫓겨가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외가집이 있는 하란으로 향하는 도중,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노숙까지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외가가 있는 하란에 도착하여 외삼촌 라반을 만납니다. 

거기서 그는 아리따운 여인 라헬을 만나 반하고 맙니다. 

야곱은 또 다시 생각했을 것입니다. ‘라헬과 결혼하는 것이 복이다’라고.

그리하여 라헬을 아내로 취하고자 라반 밑에서 7년 동안 봉사를 합니다. 

7년이 짧지는 않지만 연애하는 까닭에 7년을 수일같이 여겼다고 성경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29:20 “그를 사랑하는 까닭에 칠 년을 며칠 같이 여겼더라”

그러나 7년이 되는 날에 그가 아내로 맞은 것은 라헬이 아니라 그녀의 언니 레아였습니다.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 외삼촌 라반과 야곱의 수싸움.

 하나님은 자기가 사랑하는 자를 연단시켜 축복을 받기에 합당한 그릇으로    만들어 가십니다. 한 사람이 위대해서 축복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축복의 언약이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이 하나님의 사람으로 빚어 가는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라헬과 사는 것이 진정 복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와의 생활도 그리 기쁜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야곱은 라헬의 지나친 질투심으로 시달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야곱은 라헬과의 결혼도 진정한 복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음으로 야곱이 생각한 복의 개념은 물질이었습니다. 

부가 곧 복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열심히 일을 합니다. 

재산을 모으기 위하여, 경제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하여. 열심히 일하여 마침내 큰 부를 쌓게 됩니다. 그러나 이제는 처갓집 식구들에게 그 부로 인하여 시기를 받게 되고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는 또 깨닫습니다. 

부가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것을. 

 

이렇게 열심히 살아온 그가 나이 130에 바로 앞에서 한 자기소개를 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합니다. 창세기 47장을 보면 야곱이 바로 앞에 섰을 때에 바로가 “네 나이가 얼마냐?”고 묻습니다.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백삼십 년과 험악한 세월,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복을 쟁취하고자 애썼던 야곱을 생각하면 

“아 130년을 살고 보니 그래도 얻은 게 많습니다.”라고 해야 할 것 같은데.

 

멀고 험한 이 세상 길

 

이런 세월을 거쳐 야곱은 한 가문을 형성하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형 에서입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했던 에서가 고향에 버티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 사람을 보내서 동정을 살피게 합니다. 

그 사자들이 형 에서가 사백 인을 거느리고 야곱을 만나러 온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자기를 해치러 오는 것인지, 환영하기 위해서 오는 것인지 

잘 파악이 되지를 않습니다. 

야곱은 지금 고민이 많습니다. 형이 나를 어떻게 대할까? 

그 동안 모았던 내 재산은 어떻게 되고 내 가족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앞서갑니다. 

 

늘 불안하고 쫓기듯 인생을 살아와야 했던 것이 야곱의 인생이었습니다. 

행여 우리 가운데 살아가면서 평안이 없고, 늘 쫓기듯 불안하게 사시는 분들이 계십니까? 이 시간 그 문제를 푸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인생을 거꾸로 살아서 그렇습니다.

앞에 있어야 할 것이 뒤로 가고 뒤에 있어야 할 것이 앞으로 왔기 때문입니다. 예수가 우리 인생의 앞에 서고 나는 뒤에 서야 하는데, 

십자가는 앞세우고 우리의 욕심은 뒤에 묻어 두어야 하는데, 

말씀은 앞세우고 자아는 뒤로 가야 하는데 

우리 인생의 문제는 우리가 거꾸로 산다는 것입니다.

순서를 바르게 살아야, 예수가 앞에서야,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지배해야 거기에 평안이 있고 형통이 있는 것입니다.

 

밤이 깊어지자 불안과 근심 걱정도 깊어져만 갑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찾아오십니다. 

이 상황을 본문 24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내가 홀로 남은 시간, 고독을 느끼는 그 시간은 하나님이 찾아 오시는 시간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에 간섭하시는 시간입니다. 

현대인들의 문제는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할 시간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사람들과 어울릴 때는 우리는 자신의 실체를 잘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많은 사람들 속에 파묻혀 살아갈 때에는 진정한 내 모습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살아갑니다. 폼을 잡고 허세를 부립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진정한 나의 모습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여러 가지 가면을 쓰고 살 때가 있습니다. 

 

드디어 기다리시던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내 곁에서 떠나가게 합니다. 

홀로 있게 합니다. 그때가 하나님이 나를 찾아 오시는 시간입니다.

오늘 성경은 야곱이 하나님과 독대한 이 자리를 얍복 나루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얍복이란 말은 ‘비운다’라는 뜻입니다. 

얍복 나루터는 지금까지 쌓아왔던 자기인생을 철저히 비우는 장소입니다. 

벗어야 만날 수 있고, 비워야 새로운 것을 채울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얍복 나루터입니다. 이곳까지 와서도 자신을 비우지 못하면, 가면을 벗어 던지지 못하면, 헛된 욕망을 쏟아 버리지 못하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울 수 없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밤에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와 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두려워 할 때, 춥고 외로울 때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의 어려움을 가지고 부르짖을 때 외면치 않으시고 찾아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 밤에 하나님이 야곱과 밤새도록 씨름을 하는데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는 야곱의 자아나 야곱의 생각이 완강함을 보여줍니다.

얼마나 우리의 자아나 생각이 완강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쳐서 넘어뜨립니다. 

허벅지 관절은 힘의 근원이 되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허벅지 관절을 내려 치시자 야곱은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맙니다. 지금까지 야곱의 철학은 “나는 내 힘, 내 재주, 내 꾀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태어나 장자가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맨손으로 미인 아내와 재산을 얻었습니다. 

“내가 마음먹으면 안되는 일이 없다.” “나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 목적을 이루고야 만다.” 이러한 야곱을 하나님은 때려 눕히시는 것입니다.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이 순간 야곱은 하나님을 붙들게 됩니다. 

 

이때의 상황을 호세아 선지자는 이렇게 주석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2:3 “야곱은 모태에서 그의 형의 발뒤꿈치를 잡았고 또 힘으로는 

하나님과 겨루되 4 천사와 겨루어 이기고 울며”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는데 왜 웁니까? 기뻐 뛰어야지 왜 웁니까? 

이 눈물은 가슴 깊이 숨겨두었던 자신의 속내를 들어 내 보이는 눈물이었습니다. 꼭꼭 가두어 두었던 가식을 털어내는 눈물이었습니다. 

남들이 볼 때에는 행복해 보이고 잘 사는 것 같아 보이지만 힘들고 외로웠던 자신의 인생에 대한 진실한 고백의 눈물이었습니다. 

가장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허벅지 관절이 부러진 다음에야 진실한 기도, 제대로 된 기도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내 인생을 버티어 주던 허벅지 관절이 부러지는 얍복 나루터!

거기서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고난은 하나님을 만나게 합니다. 성숙하게 합니다. 

많은 믿음의 사람들이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야곱이 압복 강가에서 두려워하며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찾아 오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에 응답하여 야곱에게 정말 놀라운 축복을 주십니다. 

야곱의 삶의 방식을 바꾸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이 대답합니다. “야곱입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다시는 야곱이라 부르지 마라. 이제 네 이름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동안에는 내 힘을 의지하고 살아 왔다면 이제는 철저히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인생으로 바뀌게 되는 순간입니다. 

이제는 인생의 모든 문제에서 사람들과는 다투지 않고 하나님과 승부를 하는, 하나님과 씨름하는 자가 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승리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내 인생을 맡기고 사는 것. 그래서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것. 이것이 승리인 것입니다. 

누가 승리자입니까?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가 승리자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입니까? 하나님께 무릎 꿇고 매달릴 수 있는 사람, 두손 들고 항복하는 자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아직도 내 목이 뻣뻣하여 하나님 앞에 무릎 꿇어 본 경험이 없는 사람, 

나는 내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다. 자신을 믿고 살아온 사람, 

바로 그가 야곱이요,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주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두 손들고 무릎 꿇고 하나님 앞에 나온 경험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이스라엘이요 승리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이제 우리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야곱이 자기 힘과 꾀로 살아가는 삶이라면 이스라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나의 인생을 맡기고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존하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내 인생을 맡길 때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다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삶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람다운 방법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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