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푯대를 향하여 (빌립보서 3:12~16)

목사님 0 966

 

 

    사진 1,2,3

한국나이로는 91세, 올해가 구순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우리 민족의 복의 개념은 ‘오복’.

그 오복이란 수, 부, 강녕, 유호덕, 고종명의 다섯 복을 말합니다. 

‘수’라고 하면 오래 사는 것, 장수하는 것을 말합니다. 

‘부’라고 하면 물질적인 넉넉함입니다. 

‘강녕’이라고 하면 심신이 건강하고 편한 것을 말합니다.

‘유호덕’이라고 하면 덕을 지켜서 얻는 낙을 의미합니다. 

‘고종명’이란 건강하고 편안한 삶을 살다가 깨끗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해온 복의 개념입니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면 이러한 복의 개념은 다 환경과 여건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복의 개념은 ‘복된 사람’이 핵심인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있는 사람은 시편 1편 1, 2절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 읽은 교독문 시편 1절과 2절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1절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절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우리들 생각 같아서는 복된 사람의 환경이란, 악인도 없고 죄인도 없고 유혹도 없고 오만한 사람도 없는 곳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늘의 성경 본문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복된 사람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사람들 속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유혹도 없고 죄도 없는 곳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시편 1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복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한다’는 말은 히브리 원문대로 보면 ‘걷지 아니한다’라는 뜻입니다. do not walk. 악인들의 꾀를 따라서 걷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또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고’ do not stand.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do not sit.

악인과 함께 가지도 않고, 서지도 않고, 악인의 무리에 섞여 앉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복이 넉넉하니까요. 복있는 사람은 자기 복과 행복에 충만한데 악인의 꾀를 따를 까닭이 없습니다. 

가끔 스스로 속았다고 탄식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내가 속았다’하며 억울하다, 분하다 하지만 억울할 것도 없습니다. 

왜 속았습니까? 자기에게 욕심이 있으니까 속았습니다. 유혹에 빠진 것은 

거기 빠지게 될 수 밖에 없는 허점이 내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적극적으로 말하면 내가 넉넉지를 못했습니다. 

내 행복으로 충만하다면 악인의 꾀를 좇을 이유가 없습니다. 

내 행복으로 충만한 사람이라면 악인의 꾀에 빠질 필요도 없고 죄인의 길에 서서 서성거릴 필요도 없고 오만한 자와 같이 앉아서 이야기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왜? 내 행복으로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복있는 사람은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합니다. 행복관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해서 율법을 읽고 율법 듣기를 즐거워합니다. 

하나님 말씀을 읽고 듣는 것 이것이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도 휴일 이 시간에 가고 깊은 데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예배가 더 중요합니다. 거기보다 여기가 더 행복합니다. 

그래서 여기 나왔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 이 행복을 아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바로 복된 사람이다. 그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또 여호와의 율법을 묵상한다고 하였습니다. 묵상한다는 것은 깊이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집중적으로 생각하고 딴 생각은 하지 않습니다. 명상을 합니다. 

하루 종일이라도 예수님 생각을 가만히 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85장.

이 생각 속에서 즐기는 이것이 인간적 행복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이라고 하는 프리즘을 통하여 우리는 무한한 세계를 바라봅니다. 

묵상할 때 여기서 지혜가 생기고 능력이 생기고 활력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자기를 초월합니다. 

자기 욕심, 자기 약점, 자기 나약함을 다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가장 잘 표현한 단어는 ‘크리스찬’입니다. 

시리아 안디옥에서 크리스찬으로 불려지기 시작.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 참으로 중요한 말입니다.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기로 맹세한 사람들,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초대교회에서는 ‘새 술에 취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술에 취해도 이성을 잃지만 새 술에 취해도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 잡혀 살아갑니다. 인간으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전적으로 주님께 삶을 위탁하여 사는 사람들을 크리스찬이라고 하였습니다. 

 

살다보면 우리들은 내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 되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에서 기도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뜻이 하나님의 뜻과 같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서 갈등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래의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여전히 우리는 현재에 매여서 헤어나지를 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체를 보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는데,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가지고 사소한 일에 목숨을 겁니다. 

하나님은 영원한 것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순간적인 것, 찰라적인 것을 달라 합니다. 우리는 고작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오늘은 새해 첫 주일입니다. 

새해가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새로운 결심을 합니다. 

여러분들은 어떤 결심으로 새해를 시작하십니까? 

1월을 영어로 ‘January’ 라고 하는데, 이 말은 로마 신화의 두 얼굴을 가진 ‘Janus’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한 얼굴로는 뒤를 보고, 다른 한 얼굴로는 앞을 보는 얼굴입니다. 아수라 백작.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지난날의 게으르고 안일한 마음에 새것을 담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새해에 새로워지겠다는 야심찬 마음으로 한 해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심령이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그것은 늘 해 마다 반복되는 공염불에 불과할 것입니다. 다짐하는 의미에서 찬양.

 

실로암.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는 이 아침, 우리는 실수와 허물과 죄로 얼룩졌던 지난날들을 잊어버리기로 합시다. 대신 주님과 더불어 벅찬 기대와 소망을 안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로 합시다. 

우리 하나님은 오늘 이 아침에 우리 모두에게 찾아와서 ‘이제 우리 새롭게 다시 시작해 보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에게 속삭입니다. 너는 끝났어.

그러나 새 언약의 백성인 우리들은 언제나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넘어졌어도 아무리 망가졌어도 아무리 실수를 많이 했어도, 아무리 많은 죄를 지었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우리말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 속에는 시작하기 전 결정에 대한 갈등과 고통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시작을 했다는 것 자체가 큰일을 해 낸 것입니다. 

이제 다시 믿음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2021년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본문 빌립보서 3장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지점은

13절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14절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13절에 보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지난 날을 잊어버리라는 뜻입니다. 잘못한 것만 아니라 

내가 좀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들도.  

간혹 쓸데없는 옛날 일을 기억하면서 교만해지는 사람을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때에 우등생이었다. 그것이 오늘에 와서 어떻다는 말입니까?

지난 날에는 대단했었다 하여 그 때문에 지금까지 가슴 부풀어 있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과거를 생각하면서 과거에 지배당하는 사람은 과거에 사는 사람이지 

오늘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과거지향적인 생에서 탈피하여 미래지향적인 생을 사는 것이 새로워지는 비결입니다. 

과거는 깨끗이 잊어버리고 오늘과 내일만을 생각합시다. 그것이 바로 지혜롭게 사는 길입니다. 

에스겔 18:22 “그 범죄한 것이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하나님께서 기억하시지 않는 과거를 내가 왜 기억합니까? 

하나님께서 용서한 나를 내가 왜 용서하지 못합니까?

돌아온 탕자를 보고 이런 사람을 염치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은 

그 속에 진정한 신앙이 있는 것입니다. 과거가 어찌되었건 오늘 새로워지고 새로워진 입장에서 나를 재평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깨끗이 잊어버려야 비로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에 잘살고 성공했던 것을 생각하는 것도 소용없는 일이지만 또 실패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낙담하는 것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다 잊어야 합니다. 

 

14절 ‘푯대를 향하여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이 말은 ‘디오코’ 즉 온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뛴다는 뜻입니다. 

운동선수가 경기장을 뛰는 모습을 가리킨 것입니다. 생각도 마음도 모든 힘을 모아서 앞으로 기울이고 달려가는 모습을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달릴 때는 뒤도, 옆도 안 보이고 저 끝에 있는 푯대만 보여야 하는데 볼 것이 많은 선수들을 목표에 다다르지 못합니다. 

여러분! 무슨 이야기입니까? 목표를 한 번 정했으면 온 힘과 온 정열을 다해서 뛰어야 합니다. 몸을 앞으로 기울이고 뛰는 것입니다. 

 

목표가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목표를 향해서 뛰어야 합니다. 

세상이 내게로 다가오기를 기다리지 맙시다. 

내가 세상을 향해서 뛰어야 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서 희생해주고 새로운 것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서는 안됩니다. 내가 희생을 하여야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열립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때 없이 졸다가 쓰러지는 베드로를 보고 

마태복음 26:41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종종 믿는 우리들 사이에서 변명으로 쓰입니다. 

마음은 간절하지만 육신이 약해서, 사랑하지만 돈이 없어서라고 변명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정말 마음이 간절했습니까?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내 운명을 건 목표다라고 생각하고 앞으로 내달리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새로운 것이 이루어집니다. 목표만 보고 총력을 기울여 뜁시다. 그러면 새로운 기적이 내 앞에 나타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금년에도 과거에 그랬듯이 앞으로도 깜짝깜짝 놀랄 일이 계속될 것입니다. 놀랄 것 없습니다. 그렇게 역사는 흘러 왔습니다. 

새해가 진정한 새해가 되게 하고 싶으십니까? 적어도 금년만은 새롭게 살아보고 싶습니까?

과거를 깨끗이 청산하고 푯대를 향해서 죽을 힘을 다해 달려가십시오. 

그렇게 될 때에 내 앞에 새로운 세계가 전개될 것입니다.

그 새 하늘과 새 땅에 들어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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