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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개여! (룻기 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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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어려워서 잊지 못할 2020년의 마지막 달입니다. 코로나 19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당연하게 누리던 많은 것들을 당연하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보신각 타종행사도 하지 않기로 했다고 합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제 바로 우리 옆에 침투한 느낌입니다. 

다들 경계심을 가지고 조심들 해야.

저희 새하늘 교회 예배는 방역당국이 비대면으로 전환하라고 하기 전까지는 지금 이 상태로 대면예배를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오늘도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분들을 위하여 동영상이 동시에 나가고 있기 때문에 장소는 다르지만 같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다들 잘 이겨나가시기를 바랍니다. 특별히 목회자로서 바라는 것은 신앙이 후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전진하지 않으면 후퇴. 

 

구약 성경에는 그 당시의 엄격한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도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두 권의 책, 룻기와 에스더서가 있는데 룻기는 그 중의 하나입니다. 룻기의 기록 목적은 다윗이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치적 덕망이있어서나 군사적으로 뛰어나서가 아니라 다윗의 조상들의 신앙을 축복하신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된 것임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앞에 놓여있던 세상과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 하나님을 택하였기 때문에 예수님의 조상이 되어 성경에 기록되어지는 영광의 자리에 

나아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들도 항상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중에서 결단하고 선택해야 하는데 

우리들의 인생은 지금 내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룻기는 모압 여인인 룻이 유대인인 보아스와 결혼하게 되는 과정을 담고 있습니다. 룻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사사 시대에 베들레헴에 엘리멜렉과 나오미란 부부가 살았는데 그 땅에 흉년이 드니까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이방 땅인 모압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언약의 땅인 가나안 베들레헴에 흉년이 드니까 좀 더 나아보이는 

이방 땅 모압으로 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땅에 있어야 하는데 조금 나아보이는 이방 땅 모압으로 갑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하여 모압으로 갔는데 거기서 남편이 죽고 뒤이어 

두 아들이 다 죽고 두 며느리와 함께 남게 됩니다.

살 길이 막막하여진 나오미는 이제 귀향할 것을 결심하게 되는데 두 자부 중 하나인 오르바는 자기 친족에게 돌아갔으나 룻은 시어머니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귀향합니다. 룻의 고백 1:16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귀향했지만 그야말로 집도 재산도 없는 과부들에 불과한 나오미와 룻의 생활이 시작됩니다. 

룻은 먹고 살기 위하여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습니다.

이삭 줍는다는 뜻, 추수할 때도 이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남겨두어야, 

신명기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몫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가져오지 말고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남겨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리시리라”

감나무도 까치 먹을 것은 남겨두어야. 

재벌들이 횡포를 부리고 착취를 하는 것은 약자의 하나님임을 모르기 때문. 

 

그 후 보아스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는 룻과 결혼하기로 결심을 하면서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1절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기업 무를 자에 해당하는 히브리 원어는 고엘입니다. 

고엘 제도는 친족들 사이에서 지켜야 할 권리와 의무에 관한 제도, 특히 

가문의 보존과 땅문제를 가리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대를 잇는 것과 종종의 땅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요. 

히브리 율례상 어떤 사람이 생활이 어려워 땅을 팔 경우에는 그 가문의 친족이 제일 먼저 살 권리가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야만 그 가문의 땅이 다른 가문에도 넘어가지 않고 계속 보존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엘 제도의 또 다른 중요한 사항의 하나로 형제가 자식없이 죽었을 경우에는 가까운 형제 순으로 남겨진 미망인과 결혼을 하여 그 가문이 존속되게 하여야 했습니다. 이것을 계대 결혼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엘리멜렉의 집안의 대가 끊어지게 되니까 그 

집안의 며느리인 룻과 누군가가 결혼해서 그 집안의 대를 이어야 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을 무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족은 아니었으므로 기업을 무를 권한이 있는 사람에게 먼저 물어봅니다. 

 

그런데 1절 말씀에 아주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룻기 성경은 그 기업 무를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룻기 성경은 그를 ‘아무개’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분명 그 사람도 이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성경은 그의 이름을 기록해 주지 않고 ‘아무개’라고 기록하고 있을까요? 

이것은 우리나라 전라도 말로 “어이 거시기”라는 표현같은 것입니다. 

그는 분명 베들레헴 사람으로 성경 기자가 그의 이름을 몰랐을 리가 없을 것입니다. 엘리멜렉, 나오미, 말론, 기룐, 오르바, 룻, 보아스, 

마태복음 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23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저는 여러분들의 이름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은 몰라줘도 하나님만 알아주면. 순교자들.

 

본문의 아무개는 모압 땅으로 이주해 간 엘레멜렉과 나오미의 친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모압 땅에서 돌아왔는데 그 땅을 되찾아 줄 사람이 바로 

그 “아무개”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주어진 책임을 회피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기업 무를 책임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 권리를 포기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는 처음에 보아스가 말할 때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합니다. 

4절 하반절을 보면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그러나 곧바로 포기합니다. 5절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세워야 할지니라 하고” 

보아스가 말하기를 “단지 땅만 사는 것이 아니라 룻을 취하여 아내를 삼고 그의 대를 잇게 해야 한다”는 설명을 듣고는 기업 무를 의무를 포기합니다. 이 아무개는 멍청이고 미련한 놈이 되고 맙니다. 왜냐? 

당장 눈앞에 닥친 손해를 안 보려다가 영원히 손해 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어리석고 미련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이런 모습이 우리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장 눈앞에 닥친 손해를 안보려고 하나님이 주신 복을 포기합니다. 

이유가 뭡니까? 6절을 보면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그가 생각한 것은 “내 재물”입니다. “재산상의 손해”가 있을 것을 걱정하여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와 의무를 포기한 것입니다. 

결국 그 욕심이 그 복을 걷어찬 것입니다. 야고보서 1:14-15절

14.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낮엔 해처럼 밤엔 달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이익이 될 것 같을 때는 나서지만 손해가 될 것 같아 보이면 포기하잖습니까? 그것은 누구나 다 갖게 되는 자세입니다. 

본문의 그 ‘아무개’만이 아닌 오늘날 저와 여러분도 똑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구주로 믿는 저와 여러분! 이제 생각을 더 깊이 해야 합니다. 

우리는 혹시 이 본문의 아무개처럼 하고 있지는 않나요? 

사람들은 당장의 눈앞에 이익만 생각합니다. 당장 이익이 없으면 절대로 움직이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당장은 손해일지라도 영원한 미래를 바라본다면 손해를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고 교훈합니다. 

오늘 보아스는 남이 지기 싫어하는 그 일을 기꺼이 나섰습니다. 

먼저 그는 기업 무를 권리가 있는 아무개가 기회를 포기 하자마자 기꺼이 자신이 기업을 무르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로운 사람이기에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순종했고 결국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메시야의 족보중에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그가 재산의 손해를 감수하고라도 기업 무를 자로서의 의무를 이행했더라면 그는 분명 보아스 대신에 다윗의 선조가 되는 성경에 그 이름이 기록되는 엄청난 복을 누리는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가문에 찾아온 놀라운 축복의 기회를 당장의 이익에 눈이 멀어 넣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남이 싫어하는 그 일을 기꺼이 나섰습니다. 먼저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양보하고 그가 그 기회를 포기하자 기꺼이 자신이 기업 무를 자가 되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축복은 보아스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책임과 직무를 수행하려면 일시적인 손해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그런 희생과 대가를 다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묻겠습니다.

우리가 주께 드리는 것이 많습니까? 우리가 받는 것이 많습니까? 

눈앞에 작은 이익 때문에 주님이 주시는 엄청난 복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솔직히 우리가 드리는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극히 작은 것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도, 물질도, 봉사도, 그렇습니다. 

농부가 씨를 땅에 심는 것은 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가가 사업을 하기위해 돈을 투자하는 것은 결코 허비하는 것이 아닙니다. 투자는 재생산을 위한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믿는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따르고 순종하는 것은 손해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말씀을 따르는 일이라면 과감해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1순위자인 아무개가 포기한 것을 2순위자인 보아스는 꽉 

붙잡았고 결국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무명의 친족처럼 잠시 이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영원하고 정말 귀중한 하늘나라의 기업을 놓치는 어리석음이 없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이 좀 어렵고 힘들어도 그리고 시간과 물질, 여러 가지 

손해가 찾아올지라도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를 자원하여 포기할 때 하늘의 진정한 상급과 축복이 주어짐을 믿고 보아스와 같이 영원한 기업의 소유자가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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