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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에 머물더니 (열왕기상 19:9-18)

목사님 0 699

    

 

    코로나 19로 인하여 2020년은 어렵게, 지금껏 경험해 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이 와중에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에 희망의 빛을 던져주고 계십니다. 이 어려운 시기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청년, 서정훈이 지난 주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간증하려고 합니다. 

 

구약에는 몇 가지 감동적인 장면이 등장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하는 장면입니다. 

열왕기상 18장을 보면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를 물리친 사건이 

기록되어 있는데 엘리야가 기도할 때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하늘 문이 

열려 비가 쏟아졌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큰일을 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야는 자신을 죽이겠다는 

이세벨의 말 한 마디에 두려움에 사로잡혀 절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가 절망에 빠진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이 아닌 사람의 음성을 듣고 환경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앙 생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오는 이세벨의 음성은 무엇입니까? 사람이나 환경을 바라보지 말고 오직 주님의 음성을 들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플라톤의 작품 ‘국가론’에  ‘동굴의 비유’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굴 속에 거하는 죄수들이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어릴 때부터 손발은 물론 목까지 묶여 있었기 때문에 고개를 돌리지를 못하고 다만 동굴 벽만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평생 동굴의 벽만 봐온 죄수들은 자신들의 등 뒤에서 빛이 들어와 벽에 투영된 그림자가 세상이자 우주인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즉 실제 모습이 아닌 비친 모습 즉 그림자가 진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자기들이 본 것은 그림자가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의 죄수가 우연찮게 쇠사슬을 풀고 동굴 밖으로 나가 보니 세상에는 양, 소, 사람, 들판, 해, 달, 별 등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이 보아왔던 것이 실은 그림자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역시 동굴 속에 죄수처럼 갇힌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낙심하고 좌절하여 몹시 탈진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더 이상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엘리야를 발견합니다. 

우리 가운데도 한번 잘 살아보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느새 실패자의 모습으로, 희망을 잃어버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그렇다면 그분도 인생의 동굴 속에 갇혀있는 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현실이라는 벽 앞에서 좌절하여 살아가는 분들은 오늘 말씀에 귀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동굴 속에서 벌벌 떨던 엘리야는 동굴 속에서 그 인생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동굴의 고난과 실패를 거쳤기에 그는 이전 보다 하나님의 역사무대에서 존귀하게 쓰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실패와 고난의 연속인 이 동굴을 통해서 엘리야에게 무엇을 

깨닫게 하셨습니까? 엘리야가 발견한 삶의 의미와 메시지를 우리도 발견할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의 동굴도 더 이상은 동굴이 아닐 것입니다. 

인생의 동굴 속에 있는 엘리야를 가르치신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다시금 우리를 세우시기 원하십니다. 

그렇다면 엘리야에게 주신 주님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먼저 동굴의 경험을 통해서 엘리야가 엘리야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 원하셨습니다. 너 자신을 알라, 인문학의 출발점입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자신있게, 내가 뭐좀 하지, something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야는 이세벨의 그 말 한 마디에 베드로는 어린 계집아이의 질문 앞에 무너지고 맙니다. 이때야 비로소 겸손해집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과 연륜, 지혜와 지식이 대단한 것 같지만 작은 말 한마디, 작은 사건에  여지없이 무너지고 마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알 때  인생을 보는 눈이 새롭게 열립니다. 

이것을 알 때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겸손함이 생기는 법입니다. 

 

엘리야의 동굴은 미처 알지 못했던 자기 모습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오늘날 자신의 인생에서 낙심한 분이 여기 계십니까? 

이것 밖에 안 되는 존재란 말인가 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 여러분 원래의 모습을 보여주는 사건이요 여러분 자신을 발견하게 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나를 온전히 볼 수 있을 때 교만한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인물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10절 말씀은 엘리야가 현재 자기 모습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오직 나만 남았거늘” 엘리야는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바로 이 실패와 절망의 순간에도 구원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좌절하고 있는 엘리야에게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은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십니다. 

여러분도 혼자인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도 중보기도 동역자를 남겨 놓았습니다. 

 

마음이 지쳐서

 

우리 노회 목사님 중에 잘나가는 수학 강사였던 분이 계십니다. 

그래서 그 분 만나서 같이 이야기 하다 보면 가끔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학원 강사 할 때는 경제적인 어려움은 없었는데.

그런데 왜 목회의 길로 들어섰냐면 자기는 수학을 잘 하기는 했는데 가르치지는 못하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자기의 한계를 깨닫고 기도하던 중에 신학교에 입학하여 목회자가 되셨다고 합니다. 그 분 말씀이 “수학 잘하는 사람은 수학 선생하면 안 돼요.”라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왜냐하면 수학 잘하는 사람이 수학 선생을 하면 수학을 잘 못하는 학생을 이해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도 이해가 안 되니?”하며 도리어 답답해하는 것입니다. 학생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선생은 학생을 어떻게 데리고 가야할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아본 사람만이 위로를 할 수 있습니다. 고통을 당해본 사람만이 

고통이 무엇인지를 압니다. 고독해본 사람만이 고독이 무엇인지 압니다. 

지치고 힘든 일을 경험해본 사람만이 그것의 의미를 압니다. 

버림을 받아본 사람만이 버려진 인생이 얼마나 비참한지를 압니다. 

 

우리가 동굴의 고통을 당하고 있다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하나님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성공하는 자와 함께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실패한 자를 더 사랑하는 하나님, 상실의 괴로움을 갖고 있는 그에게 남편이, 아버지가 되어 주리라 말씀하시는 그 하나님, 소망이 끝났다고 이야기 할 때 소망을 노래하게 하시는 그 

하나님을 체험케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엘리야의 또 다른 문제점은 그가 있어야 할 곳에 있지를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본문 9절과 13절을 보면,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라고 두 번이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지금 엘리야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죽이려는 이세벨의 눈을 피해서 

호렙 산의 한 동굴에 들어가 숨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공급받은 엘리야는 그 힘으로 다시금 나아가 그를 대적하는 이세벨과 맞서 싸워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행했던 곳은 성읍이 아니라, 오히려 아무도 없는 동굴을 향해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엘리야의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물에는 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자기 자리가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도 저마다 정해진 자리가 있습니다. 

학생은 학교, 남편의 자리, 아내의 자리, 목사는 교회를 지켜야.

그러므로 자기가 있을 자리, 자기가 설 자리를 아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 

그렇다면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자기 자리를 알고 계십니까? 

그리고 지금 여러분은 자신이 있어야할 곳에 있습니까?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여러분의 심령에, 이런 음성이 들리시는 분이 있다면 세상을 향해 다시금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어긋난 또 다른 부분은 기도의 문제였다는 것입니다. 기도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의 교통입니다. 

엘리야가 원했던 하나님과의 교통함은 어떠한 것이었습니까? 

크고 강한 바람같은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지진과 같이 큰 요동함이 있는 만남이었습니다. 또한 불과 같이 임하는, 화끈한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기대하는 그런 모습으로는 하나님이 임재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전혀 엘리야가 예상하지 못했던 세미한 음성으로 임하셨다는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바로 이 세미한 음성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본문의 엘리야, 그는 크고 강한 바람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습니다. 요동치는 지진 속에서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불과 같은 뜨거움 속에서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자신의 마음과 심령을 추스르며, 하나님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그 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이 세미하게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16절에 나타난,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담긴 음성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때 엘리야는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동굴에 머물러 있는 그의 몸이, 이제 다시금 성읍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대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엘리야는, 그 험한 세상을 향해 담대하게 나아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는 이렇게 계속됩니다. “그가 내려가서 친구들에게 실제 하는 세상이 저기 있다고 말해보겠지만 친구들은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밖에 나갔다오더니 눈을 버려왔군. 밖에는 절대 나가면 안 될 걸세.’하고 결론짓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래도 좌절하지 않을 걸세. 그것은 밖에 실제하는 아름다운 세상을 보았기 때문일세. 새로운 실제를 본 사람은 이 땅의 기준을 가지고 살아가지 않는다네. 실제 동굴 밖의 아름다운 세계를 사모하기에 

그 세계를 바라보며 오늘을 살아간다네.”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오늘 이 땅이 우리 삶의 종착지는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죄악된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보았기에 아직도 알지 못하는 그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삶, 증인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어려웠던 2020년을 보내면서 영적 긴장감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예배하고, 더욱 더 열심히 기도하고, 무엇보다도 더 열심히 전도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신앙 생활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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