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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게 하시는 이 (고린도전서 3:5-9)

목사님 0 806

   

 

   11월 들어 가을 바람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가을을 넘어 겨울의 문턱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코로나 사태가 장기화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올해는 단풍이 오래가고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저는 교회 오갈 때 남산 소월길로 다니고 있는데 노란 단풍이 길위에 뒹구는게 가을의 운치를 더해 갑니다. 

특별히 2020년은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전세계가 위기에 빠져 있지만  

우리 나라만큼 코로나를 잘 이겨나가는 나라도 드물지요. 

우리 국민들의 단합된 힘을 보여주는 좋은 사인이라고 생각합니다. 

평소에는 잘 보이지 않던 힘이 어려운 시기에 잘 발휘되고 있는 것 같아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대한민국의 저력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크리스찬들의 신앙은 어려운 때일수록 발휘되어야 합니다.

마음이 어려워서 신앙생활하기가 어렵습니다. 땡!

삶이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이 신앙이고 신앙은 삶의 어려움을 통하여 성장해 나가는 법입니다. 

 

인간은 크게 두 종류의 욕망을 가졌다고 합니다. 

육체적 욕망과 지적인 욕망이라고 하는데 육체적 욕망은 여러분들 잘 아시다시피 먹고 싶은 욕망, 자고 싶은 욕망, 그리고 생식본능입니다.

그리고 지적인 욕망으로 인하여 인간은 계속 보려 하고, 들으려 하고, 알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지적인 본능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기는 현상을 정보 기아 현상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도소에서 가장 지독한 징벌이 독방에 가두는 것입니다. 

멀리 교도소까지 갈 것도 없습니다. 며칠 전에 혼자 사시는 할머니에게 삶을 어렵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여쭤봤더니 TV가 고장나는 것이 제일 삶을 어렵게 한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계속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고 또 말해야 합니다. 

그래서 미국에는 대부분의 실버 타운, 양로원은 도심 다운타운에 있습니다.물 좋고 공기 맑은 산속에, 처음엔 좋다고 갔다가 다들 나옵니다. 산속에서 가만히 있어 보니까 죽음 같은 정적만 흐르고 아무튼 못 사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양로원, silver town은 도심에 지어야 합니다. 

왜? 사람은 계속 보아야 하고 들어야 하고 말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지적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내 말이라면 다 믿어주는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행복한 것입니다. 왜? 내 존재가 인정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내 존재를 인정하시고 계신다,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으신다, 이렇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을 보면 고린도 교회에 분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울 파니 베드로 파니 아볼로 파니 이 무슨 소리입니까? 

다 하나님의 사역자일 뿐입니다. 분쟁이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은 자기 중심으로, 부분적으로 보기 때문이라고 진단합니다. 

전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종말론적으로, 우주적으로, 하나님의 역사 앞에서 크게 보아야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보고 현재만 보니까 그런 분쟁이 생기는 것입니다.  

좀 더 성숙한 세계관, 좀 더 높은 차원의 인생관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트럼프도 승복하지 않으니까 얼마나 추해 보입니까? 

자기의 욕망, 이기심에 사로잡혀 커다란 역사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5절을 보면 사도 바울은 ‘주께서 각각 주신대로’라고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대로 살 것입니다. 젊으면 젊은대로, 나이 들면 들은대로... 

여러분, 주름 생기면 생기는가 보다 하고, 흰머리 생기면 생기는가보다 하고, 또 늙으면 늙는거니 할 것입니다. 있어야 할 일들이 있는 것입니다. 

It is normal. 자연 현상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하여야 하는 피조물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간의 불행은 피조물인 우리 자신이 피조물임을 잊기 시작할 때부터 시작됩니다. 인간은 하나님 앞에 있는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저는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곳이 무덤이라고 생각합니다. 

돈 있는 사람이랍시고 비석도 크게 만들고, 무덤도 크게 만들고. 

하지만 무덤이 크나 작으나 썩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평생 ‘나는 다르다. 나는 돈이 있다. 나는 능력이 있다’고 하다가 마지막에 가서야 ‘그것이 아니구나. 다 같구나’하고 죽습디다. 안 그렇습니까? 

결국은 남과 내가 같다는 것을 좀 더 일찍 깨달았더라면 저도 사람답게 

살고, 많은 사람에게 덕을 끼치며 살 수 있었을텐데, 왜 고독하게 살고 

왜 비틀어진 인간으로 살아갑니까? 

나는 남과 다르다는 생각, 바로 여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내 적성을 알아야 합니다. 

적성은 쉽게 말해서 내가 즐거워하는 그 일이 내 적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직업도 적성에 맞추어서 구해야 합니다. 

적성을 신학적으로는 은사라고 합니다. 

모름지기 내게 주신 은사, 내게 주신 경륜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각각 주신 바가 있고 그 길을 통해서 살 것입니다. 

그것만 따라가면 되는 것입니다. 남 부러워할 필요 없습니다. 

요한복음 21장 20절 이하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고 질문을 합니다. 예수님의 대답이 “네게 무슨 상관이냐”

한 걸음 더 나아가 중요한 것은 내게 주신 일을 충실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을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열심히 하고 할 수 없는 일은 남에게 맡깁니다. 자기가 할 일과 못할 일을 구별해 낼 줄 알아야.

 

자 다시 오늘 본문을 보면 씨를 뿌리는 자도 있고, 물을 주는 자도 있고, 

거두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토양을 주셨고 비를 주셨고 태양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심어야 하고 가꾸어야 하고 거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이 있고 내가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돈, 내가 부지런해서 벌었다고 생각할 것만은 아닙니다. 

쓰일 데가 있어서 내 손에 주어진 것입니다. 

쓰라고 주신 돈이지 꼬옥 움켜쥐고 있으라고 주어진 돈이 아닙니다. 

모든 시간, 모든 건강, 모든 재능이 쓰임받기 위해서 존재합니다. 

목적 의식을 분명히 할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존재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고용되었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대로 그가 주신 능력 안에서 그 기간 안에 충성을 다할 뿐입니다. 자기 의식을 분명히 하여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러분은 성경의 4복음서에 다 기록되어 있는 오병이어의 이야기를 잘 아십니다. 오병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기적은 예수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런데 이 역사를 위해서 사람들이 봉사하여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우선 5천명을 무리지어 앉히는 것은 사람이 할 일입니다. 

떡 다섯 덩이를 예수님께 바쳐서 예수님의 손에 들려지게 하는 것도 사람이 할 일입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도 제자들이 할 일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죽은 나사로를 살리실 때에도 그러한 역사가 일어납니다. 

무덤 앞에 막아놓은 돌을 옮겨 놓은 것은 사람이 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신 것은 예수님의 일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하실 일, 내가 할 일이 따로 있습니다. 내가 할 일은 내가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 책임을 돌리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싫어 하시는 행동 중의 하나가 원망과 핑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하나님의 높은 경륜을 미쳐 몰랐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이렇게 인도하시나, 하나님은 왜 이렇게 오랫동안 광야에 머무르게 하시나, 원망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교육학에 보면 ‘hidden curriculum’라고 하는 용어가 있습니다. 숨겨진 교육과정이라고 하겠습니다. 이 말의 뜻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는 알려 주지 않고 선생님 혼자만 아는 교육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만 학생들은 선생님을 믿고 이 교육과정을 따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hidden curriculum’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 하나님의 섭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입니다. 하나님의 숨겨진 뜻을 우리는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하여야 합니다.

 

도산 공원에 가면 도산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이 

“그대는 나라를 사랑하는가? 그러면 먼저 그대가 건전한 인격이 되라.

우리 중에 인물이 없는 것은 인물이 되려고 마음 먹고 힘쓰는 사람이 

없는 까닭이다. 

인물이 없다고 한탄하는 그 사람 자신이 왜 인물이 될 공부는 아니하는가?“

 

참으로 주인의식을 잘 표현한 문장입니다.

주인공 의식과 주인 의식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주인공 의식은 쉽게 표현하면 왕자병, 공주병이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을 

말씀의 은사를 가진 분들이라고 합니다. 뭐든지 말씀으로만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주인공 의식이 있는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불평, 불만을 많이 합니다.   

반면에 주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은 자원하는 심령을 가지고 일을 처리합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가 지금 하는 일이 즐겁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즐겁습니까? 아니면 스스로 하는 일이 즐겁습니까? 

노예는 노동을 합니다마는 그 속에 기쁨이 없습니다. 

땀은 흘리고 있으나 즐거움이 없습니다. 이것이 노예입니다. 

자발적으로 주인 의식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오직 자원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며 정말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일하는 것, 그 질적인 충성을 하나님께서는 보시는 것입니다. 323장 3절.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

신앙이 가장 위대한 생산력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결론입니다. 8 “각각 자기가 일한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교회에 나오지 않는 분들이 많이 하는 말 중의 하나가 나도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는 정도의 믿음은 귀신들도 갖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2:19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를 더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11:6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나는 상을 바라지 않아’라고 하는 것은 나 믿음 없어와 동의어. 

저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 모세가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사랑하는 새하늘 교회 교우 여러분!

달란트 비유에서 보듯 다섯 달란트건, 두 달란트건 남겼다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몇 달란트이냐를 묻지 않습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얼마를 받았든지, 주신 바가 무엇이든지 충성을 다 할 것입니다. 

오직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나에게 맡겨진 바를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수용하고 

충성되이 묵묵히 감당하여 자기 상을 반드시 받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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