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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기억하사 (느헤미야 13:2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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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복음을 보면 여러분들이 잘 아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를 놓고 유명한 신학자 ‘리차드 니버’란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비유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등장한다. 하나는 강도라는 오직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이 있고, 또 다른 하나는 자기공동체에만 충실하게 살겠다고 

하는 레위인, 제사장 같은 사람이 있고, 마지막으로 선한 사마리아 사람 

같은 책임적인 인간이 있다고 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말씀을 우리는 깊이 생각하여야 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내가 이 사람을 돕지 아니하면 이 사람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을 생각합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 

생각의 중심이 나 자신에게서 이웃에게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거기서 이 천대받던 사마리아 사람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날 문제는 ‘이기주의’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기주의로 살면 나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착각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습니까? 

더 큰 문제는 이 이기주의가 얼마나 나를 불행하게 만든다고 하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나와 세상을 더 불행하게 만들 따름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성장해야 합니다. 또한 성장을 하여야 하되 균형있게 성장을 하여야 합니다. 몸이 자람과 함께 지식도 자라고 영도 자라가야 합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에는 자기 중심적으로만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는 나에게 젖을 먹여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젖이 둘인 것도, 하나는 나에게 먹이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가지고 

놀라는 것이므로 둘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더 크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이제는 주위 사람들도 돌아볼 줄 알게 됩니다. 흔히 철난다는 말을 하지 않습니까? 

상대방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고 그의 필요를 채워주려고 노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비로소 어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는 어지간히 나이가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철이 덜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르고 그 다음에 있을 결과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 감정, 내 기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라고 당연한 것처럼 말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십시다. 정말로 감정은 무방비상태입니까? 기분은 이렇게 마음대로 내버려두어도 되는 것입니까?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대하여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 감정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순간적인 

감정의 표출에도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 점을 잊지 맙시다. 

내가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된 것입니다. 

 

오늘은 10월 25일, 10월의 마지막 주일이고 10월 31일은 종교개혁 기념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를 놓고 고민을 하다가 오늘은 느헤미야가 하였던 

종교개혁을 통해서 개혁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 다음 주 11월 1일에 마르틴 루터를 통한 종교개혁에 대해서 같이 나누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느헤미야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는데 전반부 1-7장은 이스라엘 회복의 외적 증거인 예루살렘 성벽 재건을 보여 주었고, 후반부 8-13장에서는 

회복의 내적 증거, 즉 신앙 회복과 제도 정비 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10장 28절 이후에 보면 이방인들과의 혼인을 금하여 영적 순수성을 지키기로 하고, 안식일 준수, 십일조 등을 하기로 결단합니다. 그런데 본서의 마지막 장인 13장에서는 이스라엘이 타락한 것을 보여 주고있습니다. 

신앙은 한 번 은혜 받고, 한 번 잘 섬긴다고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은혜 받아야.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세월이 가면서 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기본 정신, 말씀으로 돌아가자! 말씀의 반대는 내 생각.

 

사람이나, 공동체가 무슨 일을 이루고자 할 때 분명한 목표와 원칙, 기준이 없으면 주변 사람 관계와 환경에 따라 흔들리게 되며 혼란이 따라 옵니다.   

느헤미야 10장 28절 이하를 보면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거룩한 삶을 살겠다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12년 만에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약속과 원칙이 다 무너져 있었습니다. 

오늘 13장을 보면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가 나옵니다. 

느헤미야의 세 번의 기도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세웠던 세 가지의 원칙과 기준을 무시하고 타락했을 때 그것을 다시 회복시키면서 드린 기도입니다. 14절, 22절, 31절

 

개혁이란 즉시 회개하고 시대와 상황을 뛰어넘어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1절 “그날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런데 거기에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란 것입니다.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이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23장 3절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그러면서 3절에서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모두 분리하였다고 

합니다. 성전의 순결성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진정성과 순결입니다. 

십계명의 첫 계명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십계명을 거꾸로 말하면 귀신을 쫓는 방법입니다. 

십계명에 있는 모든 얘기가 귀신들이 하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내 마음대로, 정욕대로, 이성으로 모든 일을 하기 때문에 신앙 생활이 어려운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성전을 거룩하게 지키지 못하면 망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 성경 중심,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형식화되어 갑니다. 

그래서 교회에 오는 것이 새롭지 않고 감동도 없게 됩니다. 

이러다 보면 먼저 교회에 대해 시큰둥해집니다. 교회가 신앙의 중심인데도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교회를 우습게 여기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교회를 섬기지 않고 자신의 방법대로 교회를 섬기게 됩니다. 

 

그리스 신화에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의 집에 철로 만든 침대가 있었습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지나가는 행인을 붙잡아 자신의 침대에 눕히고는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크면 큰 만큼 잘라내어 죽였고, 행인의 키가 침대보다 작으면 침대 길이에 맞게 늘려서 죽였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침대에 키가 딱 맞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프로크루스테스에게 잡히면 살아남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자기가 기준을 세우는 것.

 

5절을 보면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만들었으니”

도비야는 성벽을 건축할 때 산발랏과 함께 성벽 재건을 괴롭힌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보니 성전에 도비야를 위한 방이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도비야가 제사장과의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그 방을 사용한 것입니다. 

성전 건축 후 오랜 세월이 지나자 사람들의 생각이 무뎌진 것입니다. 

십일조와 안식일도 형식적으로만 지키게 되었습니다. 

내용을 타협하다보니 암몬사람, 모압사람을 받아들이기도 하고 성전 건축을 방해했던 도비야까지 성전 창고에 방을 주어 살게 한 것입니다.

무슨 일을 할 때에도 10년이 지나면 다시 한번 점검을 해봐야 합니다. 

원형과 달라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변질되기 때문입니다. 

국가나 사회, 가정,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느헤미야의 종교 개혁의 두 번째는 안식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셨는데도 불구하고 너무 바빠서, 세상이 좋아서 안식일마저 지키지 않습니다. 

발 다친 사람, 하나님께서 고쳐 주었더니 등산, 

 

마지막으로 신앙 개혁은 십일조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돈에 대해 자유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사람들이 돈에 대해 매우 예민한데, 여기에도 원칙이 있습니다. 십일조라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을 지키지 않으면 평생 고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느헤미야는 이 원칙을 다시 이야기합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동업. 부자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새는 돈이 없게, 목사들끼리는 우스개 소리로 다들 십일조한다. 병원이나 법원

 

교회가 새로워지는 방법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거룩하게 교회를 지켜야 합니다. 

성전을 성결하게 다시 세운 이후에 드린 첫 번째 기도가 14절의 기도입니다. 

그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안식일을 철저하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두 번째 기도가 22절 나옵니다. 

암몬과 모압 여인들과 결혼을 하며 이방신들이 판을 치는 세상을 만들었습니다. 대제사장 엘리아십의 손자는 사마리아 총독인 산발랏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세운 믿음의 원칙이 사람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무너진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며 가정을 다시 하나님 앞에 거룩하게 세웠습니다. 그러면서 드린 기도가 31절입니다. 

느헤미야서의 마지막 내용은 ‘내 하나님이여 나를 기억하사 복을 주옵소서’라는 느헤미야의 기도입니다. 

느헤미야의 마지막 기도에서 야베스의 기도가 생각이 났습니다.

 

야베스의 기도가 담겨 있는 역대상 4장 10절을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이르되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가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야베스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시작해서 성장하면서까지 환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런 어려운 상황 속에서 야베스는 탄식과 원망을 하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삶에 놀라운 반전을 일으켰습니다. 인생역전을 만들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야베스의 삶을 생각하면 그에게서 가장 기억이 되는 것은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야베스는 자신의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부르짖으며 기도했습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환난과 근심을 넘어 복을 주실 수 있는 분이 오직 하나님 한 분이라는 사실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야베스의 기도.

 

느헤미야의 삶이 바로 야베스의 삶과 같았습니다. 

느헤미야는 하나님을 인생의 중심에 두고 그 분의 말씀을 원칙과 기준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그는 진정한 복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가치였고 기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느헤미야를 높이셨고 그를 통해 놀라운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느헤미야가 붙잡았던 말씀 안에서의 원칙과 기준을 

우리들 또한 간직해 하나님의 진정한 복을 담을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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