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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 (시편 119:97~104)

목사님 0 871

     

 

   

     코로나 블루의 시대라고 합니다. 코로나로 인하여 모든 분야가 다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믿는 우리들은, 크리스찬이라고 하는 우리들도 이 어려움을 잘 극복하여 나가야 할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잘 듣고 우리 모두 이 어려운 시기를 잘 이겨나가도록 합시다.

극복합시다.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사회에서는 ‘영혼의 상실’이라고 불리는 병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병에 걸리면 마음이 혼란하며 생각이 산만해지고 삶의 의욕이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럴 때 인디언들은 이것은 몸이 잘못된 것이 아니고, 

정신이 잘못된 것도 아니고 영혼이 병든 것이다 해서 마을의 현자를 찾아가서 상담하고 진단을 통해서 치유의 길을 찾는다고 합니다. 

여러분! 잘 들으셔야 합니다. 삶의 의욕이 없을 때 이건 혼자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혼자서 끙끙대고 혼자서 해결하려고 할 때 자기 자신이라는 감옥에 깊이 깊이 갇히게 됩니다. 그런고로 치유의 첫길은 일단 현자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톨릭에서는 고해성사가 있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지혜로운 자가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합니다. 

이렇게 지혜로운 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 이 현자를 찾아가는 사람은 우울이 찾아와도 우울이라는 덫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현자를 인정하지 않는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내 문제는 아무도, 심지어는 하나님도 어쩔 수 없다고 단언해 버립니다. 그것이 망하는 길입니다. 

 

인디언들의 현자들은 이 ‘영혼의 상실’이라는 병을 진단하면서 몇 가지 질문을 한다고 합니다. 여러분들도 한 번 진단해 보시기 바랍니다.

첫째 ‘살면서 노래가 그친게 언제인가?’ 

콧노래가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일단 병에 걸린 것이라고 합니다. 

둘째 ‘춤추기를 그친 것이 언제인가?’

아예 흥이 없습니다. 음악소리가 들리면 어딘가 움직여야 하는데, 아이들은 들썩들썩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습니다. 

BTS의 다이나마이트, 나훈아의 십팔세 순이든지.

마태복음 11:17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이런 것보다 제일 중요한 진단법은 ‘혼자서 조용히 있는 것이 무엇을 하는가?’라고 합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혼자 있을 때 무조건 핸드폰, 텔레비전을 켜시는 분들이 있으십니까? 그렇다면 중증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후서 4:3에서 이렇게 진단합니다.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귀가 가려워서’는 듣기 좋고 자기를 즐겁게 하는 말에 쉽게 동의한다.

그러면 진리에서 떠나게 되고 그 다음에는 허탄한 것을 좇습니다. 

중요한 것은 들어야 할 것을 못 듣는 사람은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게 돼 있습니다. 카더라 통신.

혼자 조용히 명상 하는 것을 즐겨야 합니다. 왜? 기독교인들에게는 혼자 있는 시간이 하나님과의 대화가 가장 활발한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오직 말씀으로 삽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말씀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신앙과 행위에 대한 유일한 법칙이라고 하는데 그런 말만으로로는 설명이 부족합니다. 

신학자 본회퍼는 그의 저서 ‘윤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좋은 말씀(good words)이기도 하고, 옳은 말씀(right words)이기도 하고, 아름다운 말씀(beautiful words)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은 살아있는 말씀(living words)이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는 말씀입니다. 항상 현재적으로 역사하는 것이 성경입니다. 오늘도 살아서 내게 말씀합니다. 히브리서 4: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우리가 읽는 것은 몇 천년 전의 사건이지만 마음 문을 열고 기도하며 읽는 사람의 마음 속에 언제나 현재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모세의 이야기를 통해서 나에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살아서 역사한다는 것을 내가 체험하게 됩니다. 

개별적으로 현재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성경의 특징인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은 살리시는 능력을 가지고 역사합니다. 읽는 사람에게 지식을 주고 지혜를 주고 능력과 용기를 줍니다마는 그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생명을 준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에는 운동력이 있어서 병든 우리들을 살리시고 성장케 하시고 승리케 하십니다. 생명은 언제나 사망과 더불어 싸웁니다. 

우리 몸을 흐르고 있는 피 속에는 끊임없이 싸움이 진행되고 있다고 합니다. 몸에 해로운 병균이 들어왔을 때, 백혈구가 나서서 싸워 이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백혈구가 이기지 못하고 지고 말면 병에 걸리고 마지막에는 죽고 맙니다. 이와 같이 생명은 사망과 더불어 끊임없이 싸웁니다. 

마찬가지로 이 전쟁은 어디에서나 계속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영혼은 죄와 싸우고, 불신앙과 싸우고, 절망과 싸웁니다. 

그래서 생명의 말씀이 공급되지 않으면 이길 수가 없습니다. 

내 마음에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계셔서 내 마음을 주관하고 계실 때에만 죄를 이기고, 나를 이기고,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말씀만이 구원의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만이 영혼을 변화시키며, 양심을 밝게 하며, 몸도 사회도 바르게 개혁해 나갈 수 있는 것입니다. 

 

382장

 

마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시험당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 중에 첫 번째 시험이 돌들이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하는 시험입니다. 

예수님은 그 당시 40일 동안 금식하고 주렸습니다. 사람이 사흘만 굶어도 정신이 없는데 40일 금식하셨으니 얼마나 극심하게 배고팠겠습니까?

그런 터에 돌로 떡 만들어 먹으라 하고 마귀가 유혹을 하는데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마태복음 4:4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엄청난 의미가 있는 말씀입니다. 경제 우선이 아닙니다. 정치 우선이 아닙니다. 40일을 굶은 이 절박한 현실에서도 말씀이 먼저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삽니다. 그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빵이 중요하고 아무리 경제가 중요하다지만 그 모든 것의 근본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주도하는 영이 우리를 다스릴 때 우리는 온전한 인격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게 거꾸로 되어 육체가 우리를 지배할 때 인간존재가 망가지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합니다. 말씀은 나를 지혜롭게 합니다. 스승보다도, 노인보다도’ 경험이 없어도 경륜이 없어도 말씀에 순종할 때 나는 지혜롭게 되고 명철하게 될 수 있습니다 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엽니다.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마음에 혁명을 일으킵니다. 말씀이 아니고는 우리가 인간되지 못합니다. 

 

‘높은데서 뛰어 내려라’ 신명기 6:16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시험하지 말고” 한계가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 그게 바로 철이 난다는 것입니다. 

철난다는 것은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것입니다. 

천하만국을 보이면서 ‘내게 절하라. 그러면 이 천하만국을 네게 주리라’ 합니다. 신명기 6:13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성경이 무기요, 마귀를 이길 수 있는 힘이란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 말씀으로 우리 마음을 채워놓아야 이런 저런 시험을 당할 때 이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나온다고 뭐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100% 이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듣기도 하고 흘리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듣고 가면 그 말씀이 은근히 내 마음을 다스리고 내 인격을 다스려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공급이 끊어지면 문제가 됩니다. 계속적으로 말씀의 공급을 받아야 합니다.  

알아듣든 못 알아듣든 교회에는 나와야 합니다. 사실 교회에 나올 때마다 

은혜 받는 것도 아니지요. 공치는 날도 있지만 그래도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 우리가 반갑게 들을 때도 있고 잘 모를 때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들어야 합니다. 

소는 위가 4개인데 풀을 뜯어 먹을 때에는 뜯어서 그냥 삼켜 버립니다. 씹지 않습니다. 뜯어서 꿀꺽꿀꺽 삼켜놓고는 나중에 한가할 때 그것을 꺼내서 씹습니다. 이렇게 넘기고 넘기고 하면 이것이 살이 되고 피가 되고 기름이 되는 것입니다. 

소가 저렇듯 풀을 먹어서 씹고 또 씹어 넘길 때 이것이 피가 되고 살이 되고 힘이 되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성경 읽을 때나 설교 말씀 들을 때는 우선 집어 넣는 것입니다. 우선 들어 둡니다. 다 들어 놓고 그 다음에 기도와 함께 이것을 명상합니다. 되새김질을 합니다. 깊이 생각하고 곰곰이 생각할 때 생명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신앙은 성장하는 것입니다.

식물로 말하면 전에 나왔던 잎이 떨어지고 새로 잎이 나오고, 파충류로 말하자면 허물을 벗고 새로운 것을 입고, 계속 새로워지고 새로워지는 그 역사가 성장입니다. 그대로 있는 게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전진 아니면 후퇴입니다. 내가 전진하고 있지 않으면 뒤로 물러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앙이 성장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깨닫고 내가 해야 할 일과 내가 도와야 할 일을 구별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성가대를 보아도 지휘하시는 분이 있고, 반주하시는 분이 있고, 성가대원들이 있는 것입니다. 성가대원들도 파트별로 나뉘어 있습니다. 

소프라노 할 사람이 베이스 하겠다고 고집부리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내 목소리를 어떤 방향으로 정해주셨나, 그걸 알아서 그쪽으로 노력하고 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성장이라는 것입니다. 

 

성장한 사람들이 103절과 같이 고백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귀에 들려오는 이야기가 달게 느껴질 때가 언제입니까?

사랑할 때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음성은 아무 때 들어도 달콤합니다. 

무슨 말이라도 좋습니다. 그의 음성은 언제나 들어도 들어도 좋기만 합니다. 

연애편지는 글씨를 보는게 아니라 사랑하는 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요, 사랑하는 님의 얼굴을 그리는 것입니다. 

 

오늘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너무도 즐거운 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참된 맛은 여기에 있습니다. 

성경말씀이 달고 오묘하고 너무도 아름답고 너무도 귀합니다. 여기에 심취합니다. 그때의 묵상 속에서 내가 나를 이기게 되고, 죄를 이기게 되고, 세상을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말씀을 이해하는 게 아닙니다. 말씀이 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나를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나를 주도하는 것입니다. 흔들리는 이 세상 속에서 말씀만이 절대적 진리임을 믿고 그 말씀의 맛을 누리며 살아가게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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